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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가방 끈에 목숨 건 사회

  • 진 중 권/문화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가방 끈에 목숨 건 사회

  • 사회는 학력을 속인 자의 의원직을 빼앗고 그의 몸을 감옥에 넣어버렸다.
  • 사회는 자신을 속인 괘씸한 자를 이렇게 단호히 처벌한다. 이것으로 정의는 회복됐다.하지만 정의가 이런 것인가? 대학원 나온 것도 모자라 옆에서 대신 가방 끈을 늘려주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초졸’의 학력으로 생존이 가능하겠는가?
”직함을 무엇으로 기재할까요?”

어디에 원고를 쓰거나 방송에 출연할 때면 늘 받는 질문이다. 한마디로 뚜렷한 직업이 없는 자를 대중에게 소개하자니 난감하다는 얘기다. 이럴 때 가장 만만한 대답이 ‘문화평론가’ 아니면 ‘시사평론가’다. 신문이나 잡지에 이런 직함으로 소개되는 이들은 대개 뚜렷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다. ‘평론가’라는 말은 ‘돈 안 되는 취미활동’과 ‘돈 되는 번듯한 직업’의 차이를 흐려, 나 같은 반(半)실업자를 번듯한 직업인으로 둔갑시켜주는 마법의 단어다.

또 하나 번거로운 일은 가방 끈을 접어 처리하는 문제. 가방 끈에 대한 이 사회의 집착은 너무도 집요하다. 나는 독일에서 학위를 못 따고 그냥 돌아왔다. 따라서 학위가 문제 된다면, 나의 독일 유학은 공식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런데 내 원고가 실린 신문의 필자 소개란에는 가끔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수료’라고 적힌다. 미국과 달리 독일에는 박사 학위를 위한 ‘과정’이라는 게 없고, 따라서 그 과정의 ‘수료’라는 절차도 없다.

‘초졸’의 학력으로 생존 불가능한 현실 개탄

이렇게 본인 대신 주위에서 나서 가방 끈을 늘려주는 행복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스스로 몰래 가방 끈을 늘리다가 주변 사람들에 의해 적발되는 불행한 경우도 있다. 아마 이게 더 일반적일 것이다.



12월10일 열린우리당 이상락 의원이 대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됨에 따라 의원직을 상실하고 구속 수감됐다. 학력을 속인 것도 잘못이지만, 그보다 더 큰 잘못은 그 일을 한 방식에 있을 것이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위조했다. 어떤 논리로도 이것만은 정당화하기 힘들다.

학력 위조는, 없는 학위를 마치 있는 것처럼 꾸며 자격이 없는 자가 특정한 직위를 차지하는 방식이다. 가령 얼마 전 호텔의 벨보이를 하던 친구가 위조된 학위증으로 한 대학의 영문과 교수가 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락 의원은 경우가 다르다. 그가 위조한 것은 학사, 석사, 박사의 학위가 아니라 겨우 고교 졸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졸업장으로는 교수도 될 수 없고, 고위직이나 전문직도 얻을 수 없다. 그저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뿐이다. 그의 학력 위조는 한마디로 ‘생존용’이다.

이미 대학 진학률이 70%에 이르는 사회에서 그가 얻으려 한 것은 고작 ‘고졸’의 신분이었다. 그가 보기에 ‘고졸’은 대한민국에서 인간 대접 받으며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었을 게다. 공부하기 싫어 학교를 때려치운 게 아니라면, 거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연이 있을 게다. 그 사연 중 몇몇은 가슴 아픈 것일지도 모른다. 가방 끈에 목숨 건 사회에서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으로 살면서 그가 겪어야 했을 남모르는 차별과 모욕의 세월은 또 다른 문제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의원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사실은 입지전에 가깝다. 만약 자신의 학력을 떳떳이 드러내고 정면승부로 의원직에 올랐다면, 지금쯤 하나의 ‘전설’이 되었을 것이다. 설사 선거에서 패했더라도 견고한 학벌사회의 장벽을 뚫고 스며들어오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초등학교 졸업’이라고 당당하게 밝히지 못했을까? 물론 ‘초졸’의 학력으로는 도저히 당선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게다. 유감스럽게도 이 판단은 내가 보기에 대단히 ‘현실적’이다.

사회는 학력을 속인 자의 의원직을 빼앗고 그의 몸을 감옥에 넣어버렸다. 사회는 자신을 속인 괘씸한 자를 이렇게 단호히 처벌한다. 이것으로 정의는 회복됐다. 이렇게 삐딱하게 기운 천평칭(天平秤)을 흔히 ‘정의’라 부른다.

가방 끈에 목숨 건 사회
하지만 정의가 이런 것인가? 대학원 나온 것도 모자라 옆에서 대신 가방 끈을 늘려주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초졸’의 학력으로 생존이 가능하겠는가? 하지만 학벌 사회는 자신에게 결코 책임을 묻지 않는다. 학벌은 변명하지 않는다. 다만 처벌할 뿐이다.



주간동아 465호 (p96~96)

진 중 권/문화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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