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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달력이야, 예술작품이야

기업의 얼굴 인식 중요한 아트 상품 자리매김 … 받을 사람 구분 ‘달력 프로젝트’ 진행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달력이야, 예술작품이야

달력이야, 예술작품이야

2005년 사회공헌을 내세운 기업들이 발행한 ‘점자달력’. 한국점자도서관에 보관 중인 한화의 점자달력.

달력은 곧, 골동품이 될 운명이라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다이어리에 컴퓨터 휴대전화에까지, 누구나 달력 한두 개씩을 가진 시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기 침체는 달력의 명줄을 더 빨리 재촉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다. 확실히 날짜 확인을 위한 실용적인 저가 달력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달력이 충무로 인쇄 골목에 특수를 가져다주던 시절은 끝났다. 그러나 달력을 만드는 사람이나 기업들이 줄어든 만큼 달력의 부가가치는 커지고 있다.

“달력 구하기가 힘들어지면서 달력이 중요한 아트 상품이 되었고 기업 이미지에서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요. 예전엔 연말이 다가오면 기업체에서 대충 풍경화 골라 인쇄소에 맡겼는데, 최근엔 삼성처럼 1년 동안 달력 기획에 매달리는 팀이 있기도 할 만큼 기업들이 신경을 많이 쓰지요.”

삼성, LG, 하나은행 등 기업 마케팅팀과 함께 달력 기획을 해온 인사아트센터 김명선 팀장의 말이다.

아트 상품화한 달력은 ‘웰빙달력’ ‘건강달력’ ‘약초달력’처럼 특정한 용도를 겸하기도 한다. 미술작가들은 실용성 없는 도록 대신 자신의 작품을 이용한 달력을 나눠주기도 하고, 기업들은 사회 봉사활동의 하나로 달력을 만들거나 달력을 이벤트와 연결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한다. 이처럼 달력이 한 기업의 얼굴이 되다보니 대개 받을 사람도 구분하여 기획이 이뤄지고, 이 때문에 연말이면 이른바 VIP용 달력을 구하기 위한 물밑 움직임이 감지된다.



달력이야, 예술작품이야

SK가 제작한 점자 달력.

올 연말 달력을 이용한 기업 이미지 홍보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은 SK라는 평가다. SK는 각종 악재로 떨어졌던 기업 신뢰성을 회복하기 위한 전략으로 올 여름 주요 사장단 회의에서 ‘자원봉사’라는 새로운 캠페인 테마를 내놓고, 장애우들을 위한 점자달력을 제작했다. SK 관계자의 설명이다.

“의례적으로 불우이웃돕기용 돈을 내기보다 직원들이 직접 나서서 자원봉사를 실천하자는 게 ‘자원봉사’ 캠페인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달력도 장애인단체에 한꺼번에 맡기지 않고 개인별 신청을 받아 12월에 발송할 예정입니다.”

달력이야, 예술작품이야

달력을 만든 기업의 개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2005년의 달력들.

점자달력에 독일의 일러스트레이션 작가인 키티 카하네의 도면을 이용해 밝고 명랑한 느낌을 준 것도 눈에 띈다. SK는 1만부를 예정했지만 워낙 반응이 뜨거워 5000부를 추가 인쇄했다.

대충 골라서 맡기기 옛말 … ‘VIP용’ 달력 구하기 치열



SK 관계사들이 구입해 배포하는 VIP용과 일반용 달력은 지난해와 비슷한 50만부가 발행되며, 각각 박수근의 도판과 조정래의 소설을 테마로 하고 있다.

한화그룹은 탁상용이긴 하지만 2000년에 처음 점자달력을 내놓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당시 김승연 회장이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이 달력이니, 시각장애우들을 위해 기획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첫해 5000부를 발행하던 것이 이제 3만부(벽걸이 세트)로 늘었을 만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달력이 생각보다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한화는 1년에 걸쳐 달력을 제작한다.

2005년엔 사진작가 강홍구, 2006년엔 사진작가 이지누가 우리 국토를 누비며 사계절을 담아 그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달력을 만드는 식인데, 촬영 지점은 최창조 풍수연구가의 검증을 받았다. 한컴의 성정순 차장은 “달력처럼 강력한 홍보매체도 없어 우리 국토에 대한 기업의 애정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담았다”고 말했다.

2001년 전까지 아마추어 사진작가인 그룹 총수의 취향 때문에 당시론 드물게 계열사 모두가 사진 달력으로 통일했던 LG의 경우, 계열사의 독립 경영이 강조되면서 올해는 무려 7종의 달력이 발행된다.

최덕규, 이응로 같은 대가의 달력이 있는가 하면 일러스트레이터 김수임의 작품과 디지털 이미지 2종, 작가 김영택의 펜화, 세계 도시의 사인물 등을 쓴 달력 견본이 먼저 나오면 계열사들이 마음에 맞는 것을 골라 주문한다. 달력에서도 경영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셈이다. 물론 2005년을 관통하는 그룹 이념은 한 가지로 ‘테크놀로지를 통한 휴머니즘’이다. 모든 작가 선정이 이에 맞춰 이뤄진다.

저작권 엄격 … 특A급 컷당 300만원 호가

VIP용 달력을 만들지 않는 LG·한화와 달리, VIP 달력으로 ‘홍역’을 치른 바 있는 삼성은 올해도 VIP용이 ‘한정판’으로 나온다. 삼성의 VIP용 달력은 배포 후 8만원(2005년도 기준)의 고가를 받고 파는데도 연초가 되기 전에 매진될 만큼 인기가 있다.

달력이야, 예술작품이야

브로마이드를 겸했던 옛날 달력(오른쪽에서 첫 번째, 두 번째)과 옛날 이미지를 이용한 복고풍의 2005년 달력(‘토토의 오래된 천국’ 제작).

문화 기업 이미지를 세우기 위해 노력해온 삼성은 IMF 이전 두 해에 걸쳐 인쇄물이 아닌 진짜 판화 작품으로 VIP용 달력을 만들었는데 당시 가격이 70만원을 넘어 기업 및 미술계에서 큰 화제가 됐다. 그야말로 이 달력을 삼성으로부터 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 자신이 한국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IMF로 삼성은 원판화 달력 제작을 중지했지만, 이후 나온 VIP용 달력(‘명화캘린더’가 공식 이름)도 특수 오프셋 인쇄술로 만들어 색과 질감이 원화와 거의 같다는 평을 받는다. 인쇄업계에서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도 까다로워 삼성 달력 덕분에 한국 인쇄술이 진일보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삼성은 2005년용으로 현대작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이미지를 쓴 VIP용 달력과 ‘삼성리움소장 국보선(리움미술관이 소장한 고미술품 중 국보)’, 어린이달력, ‘아름다운 우리땅-길’ 등 모두 7종 100만부의 달력을 만들어 배포한다. 재미있는 것은 어린이달력의 경우 작가 신상우가 과자로 세계 최초 발명품을 오브제로 만들어 이를 달력 그림으로 쓰고, 연초에 삼성어린이박물관에서 전시도 한다는 점. 또 ‘아름다운 우리땅-길’은 사진작가 김대벽이 찍은 우리 길을 김재학이 재현해 그리고, 대목수이자 작가로 유명한 신응수가 글을 썼다.

자기 분야에서 일정 경지에 이른 세 명의 예술가가 뭉쳐 달력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이다.

대기업은 아니지만 한독약품 달력을 빼놓을 수 없다. 한독약품은 창업해인 1964년부터 독일 훼히스트와 합작법인이어서 훼히스트로부터 필름을 받아 달력을 만들었다. 당시 한국에선 볼 수 없던 유럽 유명 미술관 소장 명화 달력인 데다 특이하게도 앞 뒷면으로 24점이 들어 있고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붙어 있어 미술학도들이 선망하던 달력이었다. 한독약품은 2000년 합작이 끝나 독일에서 슬라이드를 받을 수 없게 됐지만, 한독 달력 팬들의 희망과 전통을 존중해 40년 동안 이어온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달력을 찍고 있다. 미술사가 김미진 홍익대 교수가 유럽의 명화들에서 선정하는데 해마다 12만부가 제작된다.

‘명품 지향’ 신세계도 기업 이미지에 맞춰 미로, 마티스 같은 세계적 대가들의 걸작들을 달력으로 보여줘 유명하다. 2005년에는 인상주의 작가들의 걸작을 썼다.

미술계 후원기업으로 유명한 하나은행은 해마다 달력 공모전을 열어 저작권 문제도 해결하고 작가도 후원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고 있고, CJ는 캘린더 전시를 열어 관객들로 하여금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을 뽑게 해 이를 달력 이미지로 쓰기도 했다.

미술계에서는 올해 요절한 구본주를 추모하는 달력이 만들어졌고, 가나아트센터는 ‘1900년대 외국인이 본 한국풍경’이라는 독특한 달력을 냈다. 20세기 초 한국에 살았던 작가들이 그린 이미지를 이용한 것인데 두 경우 모두 저작권 사용료 없이 달력을 만든 경우다.

실제로 달력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기획력 중 하나가 저작권료 해결이다. 달력 제작 비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저작권료는 작가와 기업, 양자의 관계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특A급은 컷당 300만원을 호가한다.

최근 한 병원에서 2004년 달력을 낸 뒤 그림만 잘라 ‘전시’를 열다 작가한테서 저작권 소송을 당한 사건은 달력 그림으로 예술적 욕구를 채웠던 옛날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면서 달력의 저작권이 매우 엄격해졌음을 보여준다.

김명선 팀장은 “달력은 순수미술 작가와 대중이 가장 쉽게 만나고 서로를 이해하는 매체가 되었고, 작가 저작권 판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고 말한다. ‘달력을 위해서라면’ 작가도 이미지 변형을 허락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고, 달력을 문화적인 기업의 얼굴로 인식하는 기업들도 ‘달력 전쟁’에 투자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간동아 2004.12.16 464호 (p62~63)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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