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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 부녀, 만경봉호 상봉 아는가

함남 홍원 출신 감추고 프로레슬러 생활 … 남북 중 한 곳 선택 궁지, 영화같은 삶과 사망

  • 이순일/ 재일 르포라이터 lee-sun@yk.rim.jp

역도산 부녀, 만경봉호 상봉 아는가

  • 12월15일 영화 ‘역도산’이 개봉됐다. 역도산은 어떤 삶을 살았던 사람인가. ‘조선’ 국적을 가진 재일동포 3세 이순일씨는 역도산의 삶을 철저히 추적해 ‘또 한 명의 역도산’을 출간했다.
  • 이 책은 최근 한국에서 ‘영웅 역도산’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그가 주간동아 독자들을 위해 역도산의 숨겨진 삶을 공개했다. 편집자 주
역도산 부녀, 만경봉호 상봉 아는가

영화 ‘역도산’ 포스터.

역도산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40년이 흘렀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1963년) 나는 두 살이어서 생전의 역도산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나보다 젊은 사람도 역도산이 일본에서 큰 활약을 한 것을 잘 알고 있다. 역도산은 생존 당시 ‘일왕 다음으로 유명한 일본인’으로 일컬어졌다. 일본의 모든 계층, 모든 세대,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조선인(당시 한국인은 조선인이라고 불렸는데, 여기에는 모멸의 의미가 포함돼 있었다)이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는 역도산 외에도 스포츠나 연예계에서 활약한 조선인이 많았다. 그러나 역도산만큼 이름을 떨쳤음에도 조선인이란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조선인도 아마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역도산에 관한 책이 30권 넘게 출간됐지만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밝힌 글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역도산이 살아 있을 때 일본인들이 그가 조선 출신이라는 것을 밝혀서는 안 되는 금기로 여겼고, 역도산 또한 조선 출신임을 숨겨왔기 때문이다.

1923년생 조선인 김신락

1923년생인 역도산은 1940년, 스모 선수가 되기 위해 함경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의 일본행은 고향인 함남 홍원군 용원면에서 열린 조선 씨름대회에 출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역도산에게는 형이 둘 있었는데, 큰형(金恒洛)이 유명한 씨름 선수였다. 1938년 그때는 역도산 대신 김신락(金信洛)이라는 본명으로 불렸던 15세의 소년은 큰형을 따라 씨름대회에 참가해 3등을 차지했다. 이때 이 대회에서 역도산의 가능성을 알아본 한 일본인이 스모 선수로 키우기 위해 2년 후 일본으로 데려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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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링 인터내셔널 선수권 벨트를 차고 링에 오른 역도산. 1958년부터 62년까지 이 벨트를 맸다.

지금도 그렇지만 스모 선수는 이름 외에 ‘산(山)’ 자가 들어간 이름을 하나 더 갖는데, 이때 김신락에게 붙여진 호칭이 ‘역도산’이었다. 역도산이 된 김신락은 일본이 패전하는 1945년까지 주목받는 스모 선수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 역도산의 꿈은 스모의 최고봉인 ‘요코즈나’에 오르는 것이었으리라. 일본이 패전할 당시 역도산은 요코즈나 두 등급 아래인 ‘세키와케’에까지 올라가 있었다.



1945년 일본의 패전은 일본에 있는 조선인에게 ‘전승(戰勝) 국민’의 지위를 가져다준 사건이 되었다. 이 시기 역도산은 ‘인디언’이라고 하는 미국제 대형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패전 뒤의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매우 궁핍하던 시절 일개 스모 선수가 최고급 미제 오토바이를 탄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사건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이야기하면 식민지 출신의 스모 선수로 억눌려 살아왔던 역도산으로서는 전승 국민의 특권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맞은 것이다. 일본 국민들이 고개를 숙이고 걸을 때 ‘조선인’ 역도산은 알록달록한 알로하셔츠를 입고 대형 오토바이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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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2월11일 쿠라마에 국기관에서 열린 역도산 대 기무라의 일본 선수권 대회. 기무라는 유도의 달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나 이 경기에서 졌다. 그 후 기무라는 “역도산에게 져주기로 미리 각본을 짰다”고 밝혀 또 다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다 돌연 그는 ‘존마게’라 불리는 스모 선수의 상징인 상투를 잘라버리고 선수 생활을 중단했다. 스모 선수가 존마게를 자르는 것은 은퇴한다는 의미인데, 은퇴하는 선수의 존마게는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스승이 잘라줘야 한다. 그런데 역도산은 제 손으로 깎고 스모계를 떠난 것이다.

역도산은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첫째 이유는 조선인이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패전으로 재일 조선인은 외국인이 되었는데, 외국인은 아무리 강해도 요코즈나가 될 수 없었다.

백인 거구 때려눕혀 일본인 우상

또 하나 주목할 일은 그가 1950년 8월에 머리를 깎았다는 점이다. 한반도에서 발발한 6·25전쟁은 재일 조선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역도산은 전쟁이 일어난 한반도를 보면서 언제 고향에 돌아갈까를 놓고 심각히 고민했을 것이다. 역도산의 고향은 38선 이북 아닌가. 그리고 얼마 뒤 그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일본에 온 뒤 역도산은 가네무라 미쓰히로(金村光浩)로 창씨개명을 했다가 다시 가네무라 쇼노스케(金村昇之介)로 개명했는데, 일본 국적을 취득하면서는 모모타 미쓰히로(百田光浩)란 이름을 가졌다. 역도산이 일본 국적을 가진 것은 전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고국을 잊고 일본에서 인생을 살아보겠다는 결심인 것으로 보인다.

1951년 역도산은 도쿄 신바시에 있는 은마차라는 나이트클럽에서 일본계 2세인 미국 레슬러 헤럴드 사카다와 시비 끝에 싸움을 한 것이 인연이 돼 프로레슬러로 전향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프로레슬러 세계를 익힌 뒤 일본으로 돌아가 전국 순회 경기를 했다. 그리고 TV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1954년, 그는 일본에서 미국의 사프 선수와 피비린내 나는 3연전을 벌여 2대 1로 이겼는데 패전국 선수가 미국 선수를 이긴 이 경기가 전 일본을 흥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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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시내를 걷고 있는 전성기의 역도산(가운데). 맨 오른쪽은 김일 선수다.

그 후 미국에 졌다는 기억을 갖고 있는 일본인들은 TV 앞에 모여들어 2m에 가까운 미국 선수를 상대로 가라데 촙을 날리며 쓰러뜨리는 역도산에게 열광하기 시작했다. 프로 레슬링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는데 그 최전선에는 언제나 역도산이 버티고 있었다. ‘기무라 앞에 기무라 없고, 기무라 뒤에 기무라 없다’고 할 정도로 최고의 유도 선수라는 격찬을 받고 레슬링으로 전업한 기무라도 역도산의 앞길을 방해하지 못했다. 역도산은 일본인의 우상이 되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일본인은 역도산을 일본인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만약 이때 역도산이 ‘조선인 김신락’으로 링에 올라 거구의 백인과 흑인을 쓰러뜨렸더라면, 일본인들은 그렇게 열광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도산은 일본인이어야 했고, 그 또한 일본인으로 행세해야만 했다. 얼마 뒤 한국에서 김일(金一)이 건너와 역도산에게서 ‘오오키 긴타로(大木金太郞)’란 이름을 받고 제자가 되었지만, 많은 일본인들은 김일조차 일본인 오오키 긴타로로 알았다. 일본인들은 ‘착한 일본인’인 역도산이 ‘악한 외국인(미국인)’을 격파하는 구도를 열렬히 원했으므로 그 외 모든 것은 부정되었다.

역도산 부녀, 만경봉호 상봉 아는가

장년의 역도산. 그는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조선 국적을 버리고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왼쪽).1960년 4월 열린 프로레슬링 제2회 월드리그전에서 피투성이가 된 역도산의 머리를 제자들이 닦아주고 있다. 맨 오른쪽이 오오키 긴타로라는 일본 이름을 가졌던 김일 선수다.

그러나 1950년대 말이 되면서 ‘프로 레슬링은 쇼’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레슬링의 인기가 한 풀 꺾였다. 역도산은 30대 후반이 되었으므로 체력적으로도 말년을 맞은 상황이었다.

1959년 12월 동해 쪽에 면하고 있는 일본의 니가타 항으로 ‘만경봉호’라는 이름의 북한 배 한 척이 들어왔다. 공화국으로 가려는 재일 조선인을 태우러 온 배였다.

원래 재일교포의 95% 이상은 남한 출신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북한에 들어간 것은 가까운 시기에 조국이 통일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 외 경제적, 정치적인 이유로 만경봉호에 탄 사람도 있었다.

63년 판문점 방문 때 울부짖어

역도산의 고향은 이북이다. 그곳에는 소식이 끊어진 지 오래인 노모와 두 형, 세 누이, 그리고 일본 가기 전에 결혼한 처(朴信峰)와 딸(영숙)이 살고 있었다. 실향민 역도산의 가슴을 아는지 모르는지 만경봉호는 일주일에 한 차례씩 니가타와 그의 고향에서 가까운 원산을 오갔다.

하지만 역도산은 일본인으로 행세하고 있었으므로 고향에 간다고 할 수가 없었다. 어느 일본인이 거대한 미국인을 때려눕히는 역도산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겠는가. 그러나 북한에서는 ‘일본의 영웅’ 역도산이 함남 홍원 출신이라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1961년 만경봉호를 타고 작은형(金公洛)이 역도산의 딸을 데리고 니가타에 도착했다.

이들은 니가타에 내리지 않고 대신 역도산이 배 안으로 들어가 두 사람을 만났다. 역도산의 딸 영숙씨는 아버지를 닮아 거구였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딸은 평양의 체육대학 입학이 결정돼 있었다고 한다.

역도산 부녀, 만경봉호 상봉 아는가

일본 프로레슬링 TV 중계사상 87%라는 전무후무한 시청률을 기록한 역도산과 루테스 간의 NWA 세계 헤비급 선수권 대회. 57년 10월27일 고라쿠엔 경기장에 열린 이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는데 일본에서 열린 최초의 프로레슬링 선수권전으로 유명하(왼쪽).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모 선수 생활을 할 때의 역도산.

역도산은 그러한 딸에게 “열심히 해서 올림픽선수가 돼라. 그래서 1964년 일본에서 열리는 도쿄올림픽에 선수로 와라. 그렇게 되면 당당하게 일본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 않겠냐. 나도 도쿄올림픽이 끝나면 모든 것을 청산하고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역도산 자신은 그때 40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프로레슬러로서는 이미 육체적 한계에 이르렀다. 경제적으로도 많은 문제에 봉착해 과거와 달리 생활이 구차해졌으니 고민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한 때 딸을 만났고 고향에 있는 친지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역도산은 고국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다.

니가타항에 입항한 만경봉호에 승선했던 역도산은 50년대 말 제법 발전했던 북한 모습을 찍은 영화를 본 일이 있다고 한다. 역도산은 그 필름을 집으로 가져와 여러 번 보며 감탄을 거듭했다고 한다. 북한은 남한에 비해 산이 많고 토지가 황폐해 농업이 별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그는 굶주린 배를 안고 자라났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 일본으로 건너왔는데, 그가 떠난 고향에 번듯한 건물이 들어서고 들판은 황금색 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역도산으로서는 그곳에 가서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역도산 부녀, 만경봉호 상봉 아는가

역도산 도장 현판.

만약 역도산이 무사히 64년을 맞았다면 그는 일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 만년을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은 그가 고향에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역도산이 딸과 재회한 바로 그해(1961년) 한국에서는 박정희 소장이 정권을 장악하고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한국과 일본이 실제로 국교를 맺은 것은 65년이지만, 두 나라 사이에 오고 가는 흥정 속에 역도산의 운명도 크게 변해가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맺는다는 것은 일본·미국-한국으로 이어지는 동북아의 서방국가 동맹이 더욱 강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한반도에 그어진 휴전선이 반공의 방위선으로 더욱 명확히 굳어진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북쪽에는 북한과 중국, 소련이라고 하는 또 다른 동맹이 있다.

역도산 부녀, 만경봉호 상봉 아는가

1961년 2월, 역도산이 그의 또 다른 제자인 안토니오 이노키(왼쪽)를 훈련시키는 모습.

“그의 인생이 재일교포의 일생”

서방국가에 포함된 일본에 사는 일본인이자 일본의 영웅인 역도산은 절대로 휴전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그의 고향이 휴전선 이북에 있다고 할지라도, 또 그의 생각이 무엇이든 간에….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맺고자 할 때 역도산이 “실은 저는 북한 출신입니다. 그래서 고향에 돌아가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도산의 귀향을 저지하기 위해 수많은 정치인들이 나섰을 것이다. 역도산은 남과 북 중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로 몰렸을 것이다.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뤄지기 전이자 도쿄올림픽을 한 해 앞둔 1963년 1월, 역도산은 한국의 박경일 문교부 장관의 초청을 받아 한국을 방문했다. 자세한 방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국교정상화 이전의 방한이었기 때문에 이 방문에는 뭔가 정치적인 배경이 깔려 있었지 않나 추측된다.

한국에 도착한 역도산은 판문점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점퍼를 벗은 역도산은 큰 소리로 뭔가를 외쳤다고 한다. 한국어였는지 일본어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울부짖는 소리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와 그해 12월 술집에서 야쿠자와 시비가 붙어 싸우다 야쿠자가 찌른 칼에 맞아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사인(死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억측과 소문이 떠돌고 있다. 야쿠자와의 시비가 아니라 의료 사고로 사망했는데, 의료 사고 뒤에는 거대한 조직이 있다. 그 조직이 역도산을 모살(謀殺)하려 한 것이라는 억측이…. 이러한 소문에 대해서는 여기서 굳이 열거하지 않겠다.

말년의 역도산은 남북 이데올로기 대립이라고 하는 흐름에 농락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지나칠 정도로 유명했던 역도산이었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대국에 농락당해야 하는 재일교포이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우리 민족의 숙명인가.

이 글을 마치면서 내가 감히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역도산의 인생이 바로 재일교포의 인생이다. 그런 점에서 재일교포는 모두가 역도산이다.”(번역 이수항)





주간동아 2004.12.16 464호 (p58~61)

이순일/ 재일 르포라이터 lee-sun@yk.rim.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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