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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전제품·승용차도 자발적 기부?

적십자사 선심·뇌물성 기부금품 관행 백태 … 억대 의료기기, 직원 연수비까지 거둬 말썽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가전제품·승용차도 자발적 기부?

가전제품·승용차도 자발적 기부?
대한적십자사(이하 적십자사)가 거래 업체들로부터 수백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선심성 또는 ‘뇌물성’ 기부금품을 관행적으로 받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해당 업체들은 적십자사로부터 약품 원료를 독점적으로 공급받는 제약사이거나, 적십자사와 ‘불법’ 수의계약을 맺고 적십자사에 약품과 의료기기를 단독 공급하는 약품 도매상 등 평소 거래 관계에서 적십자사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기업들. 기부금품의 항목에는 직원 연수비는 물론 가전제품, 승용차, 억대의 의료장비까지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적십자사 소속 모 기관장은 해당 기관의 정원을 꾸민다는 명목으로 주변 러브호텔 업주들에게서 기부금을 거둬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주간동아가 독점 입수한 적십자사 내부 감사자료와 문건에 따르면, 적십자사는 올 1월12일 자신들이 약품의 원료를 독점 공급하는 D제약으로부터 2005년 적십자사 100주년 기념사업 명목으로 3000만원 상당의 기부품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기부품은 전직 대통령들의 친필 현판을 비롯해 박문수 친필 서간, 독립신문과 황성신문 원본 등 소장가치가 높은 물품들. D제약과 적십자사 측은 “기부품은 대개 적십자사 100주년을 기념할 만한 사료들”이라며 “적십자사의 이념과 봉사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아 자발적으로 기부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원료 독점 공급받는 D제약사 기부 의혹의 눈길

그러나 이런 해명에도 주변에서는 D제약의 기부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는 D제약이 적십자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제약사이기 때문이다. D제약은 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 소속 장호원 혈장분획센터로부터 각종 혈액제제의 원료를 반제품 상태로 공급받는 제약사. 지난해 D제약은 적십자사로부터 받은 반제품을 부풀려 비자금을 조성한 의혹이 일면서 이와 관련해 검찰에 고발된 상태이며, 또 보건복지부 관료들에게 ‘금품’을 제공한 혐의도 받았다.



D제약의 사례는 적십자사의 비정상적 기부금품 수수 관행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적십자사 인천병원은 2002년 9월2일 약품 도매상 D약품으로부터 1억200만원짜리 초음파 촬영기를 기부받아 사용하고 있다. D약품은 3000만원이 넘는 물품을 구입할 때 일반경쟁입찰을 해야 한다는 적십자사 계약사무 시행규칙을 위반하고 2000년 9월1일~2001년 3월31일과 2001년 7월1일~2002년 6월30일에 각각 한 차례씩 총 2회에 걸쳐 인천병원과 수의계약으로 의약품을 독점 공급한 약품 도매상으로, 2002년 적십자사 자체 감사에 적발돼 시정을 요구받았던 곳이다. 인천병원이 이 약품 도매상에서 초고가 초음파 촬영기를 기부받은 시점은 이 도매상과의 두 번째 수의계약 기간이 만료된 지 겨우 두 달이 지나서였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초음파 촬영기를 기부한 시점이 정부의 의약품 실거래가 상환제가 시행되면서 실제 거래 가격과 계약상 거래 가격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리베이트성 랜딩비가 거의 사라지던 시점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면서 “사회봉사단체인 적십자사 계열 병원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가전제품·승용차도 자발적 기부?

헌혈의 집에서 헌혈을 하고 있는 사람들.

이에 대해 적십자사 회원홍보국 관계자는 “해당 제약사 사장이 적십자사 인천지사에 상임이사로 있어서 개인적으로 기부를 한 것이지 리베이트로 받은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이 해명대로라면 인천병원은 공개경쟁입찰을 해야 하는 규정까지 무시하며 자신들이 속해 있는 인천지사 상임이사에게 약품 독점 공급권을 준 셈이니, ‘끼리끼리’ 나눠먹기를 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적십자사 소속 병원들의 기부금품 수수 관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천병원은 올 3월16일 환자로 보이는 사람에게서 1870만원 상당의 승용차를 기부품으로 받았는가 하면, 경남의 통영병원은 모 의료기 제조업체로부터 2002년과 2003년 두 차례에 걸쳐 1700만원 상당의 의료소모품을 기부받았다. 이 병원이 각 의료기기 제조업체로부터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받은 기부품은 의료소모품을 비롯, 에어컨 냉장고 청소기 냉온풍기 복사기 등 모두 2600만원 상당에 이른다. 같은 경남의 거창병원도 올 들어 9월 말 현재까지 제약사와 관련 거래업체 13곳으로부터 에어컨 냉장고 가습기 텔레비전 등 1200만원 상당의 기부품을 받았다.

이와 관련 제약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제약업계의 뿌리 깊은 랜딩비, 리베이트성 기부 관행을 없애기 위해 제약협회 차원에서 각급 병원에 대한 선심성 기부를 모두 중단하기로 합의하고, 이를 어길 경우 자체 정화키로 약속했다”며 “이는 공정거래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이루어진 것인데, 이런 조치에도 올 들어 이런 일이 적십자사 병원에서 계속됐다는 게 충격”이라고 밝혔다. 이런 기부품 수수 행태는 적십자사의 다른 병원들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지고 있다.

각급 병원과 제약사에 혈액을 공급하고 있는 적십자사 혈액본부는 한 술 더 떠 헌혈을 할 때 받드시 사용해야 하는 의료용품 생산회사로부터 직원연수 및 기념식 경비까지 조달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대구경북혈액원은 2003년 7월31일 헌혈의 집 개소식을 하면서 S업체로부터 100만원을 받아 사용했고, 충북혈액원은 2002년 2월 집기 비품을 사는데 E업체로부터 330만원을 받은 뒤 그 해 11월25일에는 직원들의 연수 비용 명목으로 S업체와 E업체로부터 각각 30만원을 챙겼다.

적십자사의 한 내부 관계자는 “한 해 수백억원의 성분 채혈키트를 만들어 공급하는 3개 업체가 경쟁적으로 키트의 소비자인 헌혈의 집과 그곳 직원들에게 물량 공세를 퍼붓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이는 관행적으로 계속돼온 것”이라고 밝혔다.

헌혈의 집 집기나 비품 “업체 제공이 관행”

성분 채혈키트는 일선 헌혈의 집에서 피를 뽑을 때 혈액을 이루는 각 구성 성분 중 혈장, 혈소판 등 특정 성분만을 따로 분리해 뽑을 때 사용하는 의료용기로, 혈장용 채혈키트는 헌혈자 한 명당 1만7000원 선, 혈소판용 채혈키트는 한 명당 17만원에 달한다. 지난해 혈장 성분 채혈을 한 헌혈자 수가 63만명, 혈소판 성분 채혈을 한 헌혈자가 3만9000명 수준인 점을 고려하면 전체 키트의 수요만 해마다 170억~200억원에 달한다. 적십자사에 이 키트를 공급하는 회사는 E업체와 S업체, H업체 등 3개 회사. 거래 물량이 큰 만큼 이들 회사는 적십자사에 대한 적극적인 ‘구애’에 나설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가전제품·승용차도 자발적 기부?

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 소속의 각 혈액원과 헌혈의 집에 비치된 E사와 S사의 성분채혈 기계들과 성분채혈키트(원안).

여기에다 이들 회사는 한 대에 수억원씩 하는 성분 채혈 기계도 수십대씩 적십자사에 공급하고 있어, 그야말로 적십자사와 이들 업체의 관계는 ‘갑과 을’의 관계일 수밖에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즉 환자의 수혈용으로 쓰는 전혈 채혈 대신, 의약품으로 공급되는 성분 채혈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이들 회사로서는 엄청난 이득이 남는 셈이다. 따라서 이들 회사가 어떻게 해서든지 성분 채혈을 많이 하도록 적십자사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이치.

실제 적십자사의 내부 문건에 올라간 E사와 S사의 각 혈액원에 대한 기부 목록을 보면 헌혈의 집 개소식 비용과 직원연수 경비 외에 각 혈액원 및 헌혈의 집에 들어가는 텔레비전, 오디오, 냉난방기 등 가전제품까지 포함돼 있다. 거기다 일부 혈액원은 E사와 S사로부터 300만원에서 1000만원씩 성분 채혈키트를 공짜로 받아 쓴 것으로 드러났다.

적십자사의 한 관계자는 “헌혈의 집의 경우 각종 집기나 비품은 대개 이들 업체가 마련해주는 것이 관행이었다”며 “비록 이들 업체들은 아니지만 채혈을 하기 위해 필요한 버스의 구입 비용도 기부금으로 내는 업체도 있었다”고 전했다.

적십자사 혈액본부는 납품업체의 기부 행위가 내부에서 문제가 되자 올 8월 각 혈액원에 이들 업체로부터의 기부금품 수수 행위를 금지하는 공문을 내려보냈다. 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 관계자는 “다른 기부금품에 대해서는 모두 시정조치를 내렸으며, E사와 S사가 기부한 채혈키트 중 일부는 불량이 생긴 제품을 기부 형식으로 다시 받은 것도 있다”고 해명했다.

헌혈의 집과 혈액원에 집기와 비품, 의료용품을 기부한 업체들은 채혈키트 납품업체 외에도 일반 제약사와 의료기 생산업체들도 많았다.

심지어 적십자사 소속 모 교육원 원장은 교육원의 환경미화를 한다며 주변 업소들로부터 100만원씩 기부금을 거두었다가 자체 감사에 적발돼 말썽이 난 경우도 있었다. 주변 업소들 중에는 러브호텔도 끼여 있었다.

적십자사 김영철 회원홍보국장은 “기부금품 모집 과정에 다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적십자사의 회비와 성금 모금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면 한다”면서 “2005년이 적십자사 100주년인 만큼 지금까지의 과(過)보다는 앞으로의 미래를 봐달라”고 요청했다.

“선심성 기부금품은 당연히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선심성 기부금품이 접수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10월11일 서울 남산동 적십자사 본부에서 있었던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열린우리당 장향숙 의원의 추궁에 적십자사 임광진 사무총장이 약속한 말이다. 과연 적십자사는 납품업체와의 잘못된 기부 커넥션 사슬을 끊고 진정한 사회봉사단체로 거듭날 수 있을까. 사랑과 봉사정신이라는 적십자사의 기본 이념이 다시 한번 강조되는 시점이다.





주간동아 2004.12.16 464호 (p40~42)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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