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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ㅣ2004 살인의 추억

“범인 못 잡는 형사는 죄인이지요”

미제사건 담당 형사들의 애환 … 수개월 잠복근무 ‘몸고생’ 피해자 가족 생각에 ‘마음고생’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범인 못 잡는 형사는 죄인이지요”

“범인 못 잡는 형사는  죄인이지요”

사건 발생 7개월이 지난 ‘보라매공원 여대생 피살사건’수사본부가 있는 보라매 파견소 모습.

올해 안에 기어이 범인 놈을 잡아, 돌아가신 윤 반장님 영정 앞에 무릎을 꿇리겠습니다. 기필코….”

포천경찰서(이하 포천서) 강력반 형사들의 눈매에는 일종의 ‘살기’가 느껴진다. ‘2004 경찰행정 국민 만족도 조사’에서 전국 1위를 차지했다는 ‘형식적’ 지표 따위는 술자리 안줏거리에도 오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올해 2월,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한 여중생의 죽음과 이 사건을 지휘했던 고 윤석명 강력1반장(47)의 자살 때문이다.

“범인을 못 잡는 형사는 죄인이지요”라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던 윤 반장의 죽음을 접한 포천서 형사들은 한동안 술자리에서 서로의 눈물을 훔쳐주느라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주지 못했다. 실종 현장과 시체 발견 현장에 남겨진 작은 흔적과 물증을 찾기 위해 날마다 현장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갈무리한 지 수개월, 어느새 이 사건은 이들에게 평생 짊어져야 할 ‘업(業)’이 되고 말았다.

살인사건 날 때마다 “동일범 아닐까” 연관성 찾기 수사





그간 포천서는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는 등 범죄자의 엽기적 행각에 주목하고, 인근 지역의 성도착자와 정신병력자, 심지어 외국인 노동자와 사소한 전과자까지 모조리 훑기를 반복해왔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팽팽한 긴장감만은 사건 발생 1년이 다된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담당 형사들은 잠자리에 들어서도 피해자 가족에 대한 죄스러움과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숨진 엄모양(15)의 얼굴, 그리고 이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범죄자에 대한 증오감 때문에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한마디로 야수가 된 느낌입니다. 뉴스에서 살인사건 얘기만 나와도 신경이 곤두서고 내가 맡은 사건 파일이 무의식적으로 펼쳐지곤 합니다.”

구로경찰서(이하 구로서)에서 만난 한 강력반 형사는 자신을 본능에 충실한 ‘야수’라고 표현했다. 미제사건 담당 형사들은 수사가 진척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인근 지역의 유사 사건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유영철씨의 엽기적 살인 행각이 언론에 보도된 올여름, 가장 민감하게 움직인 이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미제사건을 담당한 강력반 형사들이었다. 이들은 유씨의 엽기적 행각에 놀라면서도 자체적으로 살인마의 행적을 촘촘히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물론 자신이 담당한 사건과의 연관성이 있을지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 때문. 유씨는 그간 미제로 남았던 ‘구기동 노파 살인사건’을 순순히 자백함으로써 이 같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물론 또 다른 범죄가 드러날 여지가 많아 아직도 유씨의 행적을 뒤쫓는 형사들이 적지 않다.

구로서는 올해에만 세 건의 미해결 살인사건이 발생한, 형사들에게는 어느새 고통스런 이름의 대명사로 부각됐다(표 참조). 올여름 대부분의 언론이 ‘서울판 살인의 추억’으로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알려진 ‘비 오는 목요일 밤’의 살인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미 7개월이 흐른 일련의 사건 수사는 상당 부분 진척됐고, 당초 언론이 제기한 ‘연쇄살인’은 아니라는 결론에 근접했지만 여전히 범죄 실체를 파악하는 데는 실패했다.

“범인 못 잡는 형사는  죄인이지요”

‘포천 여중생 살인사건’ 증거 수집을 위해 인근 야산을 뒤지고 있는 포천경찰서 의경들.

구로 관악 노량진 관내에서 벌어진 사건은 모두 6건으로 1월과 2월에 일어난 2건은 미수에 그쳤고, 나머지 4건의 피해자는 모두 숨졌다. 서울 지역의 특정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미제사건이 한꺼번에 발생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사건 초기인 5~6월 경찰청은 각 경찰에서 강력반 형사 10여명씩 이 지역에 파견하며 관내 수만 가구를 모조리 방문하는 저인망식 수사방식을 구사해 주민들의 불안감을 잠재우는 전략을 사용했다.

미제 살인사건을 책임진 수사 형사들의 하루는 그야말로 가시방석과 다를 바 없다.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잠복근무, 탐문수사, 그리고 인근 관할 지역에서 발생하는 유사범죄 추적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제사건에 대한 질책에서부터 정보 교류가 이뤄진다.

서울 보라매공원에 위치한 노량진경찰서(이하 노량진서) ‘보라매 파견소’는 ‘서울판 살인의 추억’의 시발점이 된 ‘보라매공원 여대생 피살 사건’의 수사본부가 위치해 있다. 이 사건은 5월9일 오전 1시55분, 귀가하던 여대생 김모씨(22)가 보라매공원 앞에서 괴한이 휘두른 흉기에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비 오는 밤 인적이 드문 곳에서 발생한, 더구나 아무런 증거가 남지 않은 이 사건은 올해 경찰에 던져진 최대의 미스터리로 꼽힌다. 그간 구로지역 살인사건과의 유사성 때문에 ‘연쇄살인’이라는 관측이 있었지만 이에 대한 뚜렷한 반증이 없어 세간의 질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실종자 찾기 위해 하천·야산 수색하고 전국 보호시설 뒤져



노량진서는 그간 우선적으로 아내가 없거나 이혼한 남성, 혹은 노부모와 함께 살고 있지만 아내가 없는 남성, 여성에 대한 혐오증이 있으며 사회에 불만을 가진 30·40대 남성을 찾아왔지만, 아직까지 실마리가 될 만한 내용은 없는 상태. 오늘도 노량진서는 형사과장 이하 모든 강력반 형사들이 오전 9시에 사건이 발생한 장소에서 100m 떨어진 수사본부에서 조회를 하고 밤 9시에 다시 회의를 진행하는 끈질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첨단 과학수사가 발전했다고 해도 수사는 역시 발로 뛰는 것이다”고 말하는 노량진서 진창현 강력계장은 “30년 수사 경력에 이런 사건은 처음이다”며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진 계장은 2003년 마포경찰서 강력반장으로 근무하며 서울지역 연쇄살인의 공포를 던진 ‘홍대 괴담’을 해결한 30년 경력의 베테랑 형사. 당시 한 달간 잠복근무를 지휘해가며 ‘퍽치기’ 사건의 범인을 검거해 수사형사의 대명사로 떠올랐지만, 또다시 미제사건을 떠안으며 고난의 행군을 지속하고 있다. 그렇지만 “꼭 잡아야지, 잡아야지…”를 되뇌는 진 경감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힘이 배어 있다.

10월과 11월 두 명의 여학생이 살해된 천안경찰서(이하 천안서) 역시 연인원 2000명을 동원하는 ‘올인(all-in)’ 전략을 펼쳤다. 12월2일, 이모양(17)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이모씨(25)가 자살함으로써 경찰의 집중적인 수사 효과를 입증했다. 실제로 유전자 감식 결과 이양의 몸속에 남아 있던 정액 DNA와 일치하는 것으로 나왔다. 반면 박모양(16) 사건은 뚜렷한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경찰은 시신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 천안 일대 하천과 야산 등을 수색하고 주변 인물 탐문과 원한 관계 등을 집중 조사했지만 뚜렷한 단서를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다. 또 한 팀은 전국의 정신병원, 쉼터, 보호시설 등을 뒤졌지만 역시 별 성과가 없었다.

“범인 못 잡는 형사는  죄인이지요”
“납치라면 목격자가 나와야 정상인데…. 전단지를 뿌려도 뾰족한 제보조차 없어 힘들지만, 만약 살아 있다면 다른 지역으로 데려갔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수사는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다.”(천안서 형사과장)

그렇지만 이와 같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수사 과정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적잖은 부수적인 효과를 거뒀다는 평가도 흘러나온다.

“철저한 수사를 반복하다 보니 수사형사들의 수사력이 증대됐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대민 이미지가 높아졌습니다. 또한 인근 경찰과의 수사 공조도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고요.”(노량진서 장경서 형사과장)

이 같은 헌신적인 형사들의 모습을 지켜본 주민들은 “형사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스스로 능력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는 소명의식에 놀랐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최근 철저한 수사 덕에 경찰에 대한 주민들의 이미지가 바뀌기 시작한 셈이다.

역설적으로 미제사건 지역은 완벽한 치안 상태를 유지한다고 말하는 주민들이 늘고 있다. 포천서가 전국 평가에서 1위를 기록한 까닭도 이러한 일선 경찰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졌다는 평가다. 그러나 일선 형사들은 “피해자 가족들을 만나거나 범죄 현장을 지나칠 때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든다”고 고백한다. 고위 경찰 간부들조차 “패장은 병법을 말하는 법이 아니다”며 오늘도 계속되는 수사 상황을 빠짐없이 점검하고 있다. 형사의 임무는 피해자 가족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이라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주간동아 2004.12.16 464호 (p28~29)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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