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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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출산’이 사람 잡을라

장거리 비행은 임산부·태아 모두에게 위험천만 … 피로·심리적 압박으로 유산 가능성 높아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3-11-06 17: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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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정출산’이 사람 잡을라
    얼마 전 미국으로 ‘원정출산’하러 갔던 30대 주부가 유산한 사실이 밝혀져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이 여성의 경우 만삭의 몸으로 10시간이 넘는 비행기 여행을 하다 아이를 잃었다. 태아의 사망원인은 태반이 분만 전에 착상 부위에서 분리되는 태반 조기박리 현상이었다. 무리한 비행기 여행이 불러온 결과였다.

    항공사는 진단서·서약서 요구

    항공사에서 제시한 최소한의 안전 가이드라인조차도 무시된 이번 일은 전 세계에 한국인의 그릇된 자식사랑을 각인시키는 한편, 국내에서는 무분별한 원정출산 문화에 경종을 울렸다. 원정출산을 꿈꾸는 국내 임산부들에게 자신의 몸 관리가 태아의 건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깨닫게 하는 반면교사가 된 것이다.

    2002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지는 한국인이 미국으로 원정출산을 와 낳는 아기가 연간 한국 신생아 수의 1%에 해당하는 5000명에 달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과거 극소수 부유층만의 전유물이던 원정출산이 불과 최근 1~2년 사이에 중산층 사이에까지 확대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 문제는 중산층의 원정출산이 자칫 태아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비용부담 때문에 미국 내 체류기간을 최대한 줄여야 하는 중산층으로서는 출산일이 임박해서야 미국행 비행기를 타게 되기 때문에 태아 사망률이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비록 외부로 알려진 사고 소식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감추어진 태아 사망사건은 더욱 많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장시간의 항공여행이나 소홀한 산전·산후 관리 등 곳곳에 도사린 위험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원정출산에 나선 산모는 의료 전문가들의 눈에는 ‘외줄을 타는 아이들’만큼이나 위험천만해 보인다.

    그렇다면 실제로 원정출산에 나선 산모한테 닥치는 위험은 어떤 것일까. 먼저 원정출산을 위해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동을 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항공여행은 임산부가 피할 수 없는 관문의 시작이다. 항공여행을 위해 임산부가 거쳐야 하는 절차는 꽤나 까다롭다. 보통 항공사에서는 국제선의 경우 임신 32주 이내의 임산부에게만 정상적인 탑승을 허가한다. 32주 이상의 경우 산부인과 면허가 있는 의사가 작성하고 서명한 건강진단서가 있으면 탑승할 수 있다. 이 진단서에는 해당 임산부가 항공여행을 해도 되는지 여부와 예상 출산일자를 적어야 한다. 항공사에서는 진단서와 함께 비행 중 유산이나 조산을 해도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받는다. 이는 임산부, 특히 임신 말기 임산부에게 항공여행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특히 유산한 경험이 있는 임산부나 임신중독증, 당뇨병, 자궁근종 등이 있는 임산부는 임신 개월 수에 관계 없이 항공여행 자체를 피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경고다.



    임산부가 임신에 따른 스트레스를 줄이고, 충분한 휴식과 안정을 취하는 것은 정상적인 출산을 위한 필수조건. 하지만 원정출산의 경우 평균 10시간 이상의 항공기 탑승을 요구하는 장거리여행에 따른 피로, 원정출산에 따른 심리적 부담, 시차로 인한 생활환경 변화 등으로 심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피하기 어렵다.

    한양대 의대 산부인과 박문일 교수는 “임산부가 느끼는 스트레스나 정신적 피로 및 긴장감은 그 몇 배 강도로 태아한테 전달될 수 있다”며 “이러한 것들이 결국 정상출산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해 유산할 가능성이 다른 산모에 비해 몇 배 이상 높다”고 경고했다.

    또 하나, 항공여행에는 본질적으로 여타 다른 여행과는 달리 긴급한 상황에서 전문의의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갑작스런 진통이나 출혈의 가능성이 항상 있는 임신 말기의 산모는 특히 위험하다. 장스여성병원 이인식 원장은 “긴급상황 발생시 조기에 진료받지 못하면 임산부의 생명까지 위험할 수 있다”며 “특히 임신 말기에는 항공여행을 자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정출산을 떠나는 임산부의 대부분이 경비 절감을 이유로 임신 말기에 비행기에 오른다는 점을 감안할 때 가장 우려되는 점이 아닐 수 없다. 항공여행 때 임산부가 경험하는 기압차 또한 태아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원정출산에 나선 산모와 태아가 감수해야 하는 위험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원활한 혈액순환이 요구되는 임산부에게 이코노미클래스증후군은 일격에 산모와 태아를 죽일 수 있는 ‘복병’이 될 수 있다. 좁은 이코노미클래스 좌석에 장시간 앉아 있으면 혈액에 혈전이 생성되고 이 혈전은 혈구의 흐름을 막아 임산부와 태아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것. 최근 이코노미클래스증후군으로 사망한 영국 여인도 평소에는 건강했지만 뚱뚱한 체구에 좁은 이코노미클래스 자리에 오래 앉아 있다 변을 당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공항에 도착한다고 임산부의 고통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여행을 마치고 공항에 도착하면 새로운 위험이 임산부를 맞이한다. 장스여성병원 이원장은 식습관의 변화로 인한 불균형한 영양섭취와 기후, 시차와 같은 급격한 환경변화가 임산부와 태아의 건강을 위협하는 또 다른 ‘복병’이라고 지적한다. 이와 함께 총 2만 달러가 넘는 경비를 줄이기 위해 낡은 모텔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등 소홀한 산전관리로 인한 위험도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 몇 달 전에는 괌에 도착한 지 몇 시간 만에 응급실에 실려와 출산을 하거나, 분만시의 통증을 줄이기 위해 마취약을 과다 투여해 산모의 목까지 마비되자 급히 제왕절개로 분만한 위험천만한 사례도 있었다.

    좁은 좌석이 혈액순환 방해할 수도

    보통 출산 후 한 달 이내에 귀국하도록 되어 있는 원정출산 알선업체의 평균적 일정을 감안하면 소홀한 산후관리나 면역력이 떨어지는 영아의 비행기 탑승 또한 여간 부담되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정상적인 임신의 경우에도 유산과 조산의 위험이 있는 임신 초기와 8개월 이후 임신 말기 임산부의 항공여행은 태아 살인행위로 간주해 법적으로 무조건 금지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불가피하게 항공여행을 해야 한다면 사전에 전문의를 찾아 충분히 상의, 응급시 대처사항을 꼼꼼하게 익히는 등 의료인의 책임 하에 여행할 것을 당부한다. 비록 위험기간 외의 임산부라 하더라도 의료인의 충분한 사전 교육과 항공사의 주의가 필요하다.

    임산부가 위험에 처하고, 아이가 죽는다면 원정출산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원정출산을 꿈꾸는 임산부들은 태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어’와 ‘군대문제’가 아니라 ‘건강’임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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