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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 “타협은 무슨, 대선자금 다 까자”

정치권 무한 사정 새판짜기 신호탄 … 사정 칼날에 누가 치명상 입을지 아무도 몰라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盧 “타협은 무슨, 대선자금 다 까자”

盧 “타협은 무슨, 대선자금 다 까자”

11월2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대선자금 관련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이 검찰에서 SK 비자금 관련 사실을 실토한 것은 SK그룹 한 고위 관계자와의 휴대전화 통화내역 때문이다. 그는 당 지도부에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근거를 들이댔다”며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비밀을 고백한 배경을 설명했다. 한 검찰 관계자는 “다른 정치인과는 달리 최의원이 비교적 양심적인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이런저런 상황을 설명하자 억지나 고집을 부리지 않고 바로 사실을 밝혔다”는 것.

비자금 폭풍에 휘말린 한나라당의 고민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할 비밀이 생각보다 훨씬 쉽게 드러났고,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지난해 대선 때 여러 차례 최의원의 심부름을 했던 한 당직자는 “최의원의 휴대전화 통화내역에는 또 다른 대기업 고위 관계자들의 번호가 있었다”고 말했다. 만약 검찰이 SK 비자금 문제와 같은 논리로 최의원을 압박해 들어갈 경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당직자의 생각이다. 그는 “대선자금과 관련해 당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대화에는 신경 썼지만 통화기록에까지 보안의식이 발휘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검찰의 수사가 이뤄진다면 대선자금 수사는 전방위로 전개될 수밖에 없고, 한나라당의 비자금 수사 대책은 모두 바뀌어야 한다”고 부담감을 토로했다. 불행히도 이 당직자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날 것 같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이하 대검 중수부)가 이 점을 주목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SK 비자금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은 최의원의 휴대전화 통화내역에서 SK 외 일부 다른 재벌 그룹 고위 관계자들과의 통화 흔적을 찾아냈다고 한다. 지난해 11월과 12월 등 민감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통화가 이뤄졌다는 얘기까지 나돌고 있는 상황이다. 한 검찰 관계자는 10월31일 “아마 최의원과 통화한 기업 관계자들을 소환해 SK와 유사한 방법으로 불법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있는지 여부와 후원금 지원 내역을 조사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상당부분 흔적을 포착해놓고 있지만 경제문제 등 수사 외적인 상황 때문에 발걸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검찰 4대기업 기본 ‘파일’ 확보

그러나 11월2일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자금 전모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규정, 검찰의 부담을 털어낸 뒤 대검 중수부의 사정 칼날이 SK 울타리를 넘어서고 있다. 대검 중수부는 삼성 LG 현대차 롯데 등 4대 기업과 다른 업체들에 대해 기본적인 ‘파일’을 이미 확보했다. 이들 기업이 지난해 대선 당시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제공한 선거자금 중 불법 의혹이 제기된 부분을 확인하는 것이 수사의 출발점이다. 한 검찰 관계자는 “더 이상 ‘정치적’ 또는 ‘타협’이란 용어를 기대하기 어려운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 말은 정치자금 앞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한국의 정치현실을 감안할 때 모든 정치인이 무한 사정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경우에 따라 검찰 수사의 파장이 노대통령을 덮치는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역시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게 이 인사의 설명이다. 대선자금을 둘러싼 여야와 검찰의 대립은 ‘윈-윈’이 아닌 ‘All or Nothing’ 게임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대목이다.



“대선자금 전모를 밝혀야 한다”고 발언하고 나선 노대통령의 정공법은 10월 말부터 청와대 주변에서 흘러 나왔다. 재신임 국민투표와 비자금 정국의 뒤를 받칠 노대통령의 결정타가 터져 나올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청와대 비서진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감지됐기 때문이다. 당초 청와대에서 나돌던 노대통령의 결정타는 자신의 대선자금을 자진 공개함과 동시에 여야의 대선자금 전모를 밝히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상식의 허를 찌르는 반전수로 기득권 유지에 집착하는 한나라당을 ‘수구 꼴통’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판단이 뒷받침됐다. 노대통령은 자신의 대선자금 공개 문제를 조만간 언급할 것으로 보인다. 노대통령은 대선자금 문제를 매우 정치적인 문제로 판단, 접근하고 있는 흔적을 노출하고 있다. 그는 대선자금을 지렛대 삼아 구 정치와 새 정치를 갈라놓으려는 의도를 풍긴다. 개혁을 추구하는 새로운 세력과 과거 기득권에 집착하는 낡은 세력을 총선 전에 극적으로 대비시켜 국민들의 평가를 유도하겠다는 계산이다. 이른바 ‘판 흔들기’다. 노대통령이 이런 전략을 구상하고 추진한 배경에는 이광재 전 국정상황실장의 역할이 있었다는 주장이 따라붙는다. 이 전 실장은 청와대를 나서기 전까지 참여정부의 ‘소방수’ 역을 맡았다. 이슈나 타개해야 할 현안이 생길 때면 이 전 실장은 곧잘 보고서를 작성했고 그 보고서 내용이 현실정치에 적용된 경우가 많았다는 것. 청와대 한 관계자는 “이 전 실장은 특히 외국의 비슷한 사례 등을 중심으로 각종 대책과 대안을 자주 연구했다”고 말했다.

盧 “타협은 무슨, 대선자금 다 까자”

10월24일 아침, 출근하고 있는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

최근 비자금 정국과 관련한 그의 역할설은 이탈리아 검찰이 1992년부터 3년간 벌였던 ‘마니 폴리테’(깨끗한 손) 운동으로 연결된다. 당시 1000여명 이상의 비리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을 단죄한 마니 폴리테 운동은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 전 실장은 오래 전부터 이 마니 폴리테식 부패척결 방식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마니 폴리테식 부패척결 방식에 대해서는 청와대 정무비서실에서도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전기획과 시나리오가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지만 노대통령의 잇따른 강수는 가시적인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당장 지역대립과 고비용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정치질서를 깰 힘이 없어 보이던 열린우리당이 탄력을 받고 있다. 김원기 신당준비위원장의 한 측근은 “‘10·30’ 재·보선 결과를 보면 영호남 민심의 변화가 피부에 와 닿는다”고 주장했다. 재신임 정국이 전개되기 전까지 민주당에 일방적 지지를 보냈던 호남 등 일부지역 민심이 이탈하는 현상들이 감지되고 있다는 것. 열린우리당 김성호 의원은 “10대 그룹의 대선자금 지원과 관련한 전모가 추가로 공개될 경우 한나라당 내부로부터 균열이 발생할 가능성도 높다”고 말했다. 삼성, LG그룹 등 대기업들이 전통적인 관행에 따라 지급했던 정치자금과 관련해 검찰 주변에서는 “SK 외에 다른 기업들이 정치권에 제공한 대선자금 중 일부가 적법하게 회계처리되지 않았고 상당액은 사적으로 유용된 단서를 포착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돈다. 한나라당 이재오 사무총장은 11월2일 “검찰이 대선 전후 각 후보 진영의 모든 자료를 확보하고 이미 내사를 끝낸 것 같다”고 말했다. 검찰 수사 결과 이런 사실들이 드러날 경우 정치권의 빅뱅은 불 보듯 뻔하다.

盧 “타협은 무슨, 대선자금 다 까자”

10월28일 한나라당 운영위원회에 참석한 최병렬 대표(오른쪽)가 홍사덕 총무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당초 11월 중순 휴가를 계획했다. 추석연휴를 전후해 현대 비자금 등에 대한 수사가 끝날 것이라 보고 휴가를 잡은 것이다. 그러나 느닷없이 터진 SK 비자금 사건과 대선자금 전반에 걸친 수사로 이번에도 휴가를 가기 어려울 것 같다는 게 대검 중수부의 분위기다. 대검은 대선자금 수사의 1차 시한을 연말로 잡고 있다. 물론 수사가 벽에 부딪히지 않았을 경우다. 만약 정치권이 이것저것 간섭할 경우 수사는 내년까지 연장된다. 그 경우 2차 시한은 설날을 전후한 시기로 조정된다. 대검 중수부는 참여정부 출범 이후 박지원, 한광옥 전 대통령 비서실장,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안상영 부산시장 등 30여명 이상의 유력 정치인들을 처벌했거나, 처벌할 계획이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권력자거나 변방의 권력자에 불과했다. 대검 중수부는 내년 설날까지 살아 있는 권력을 상대로 명실상부한 정면승부를 벌여야 한다. 국민들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눈으로 검찰을 지켜보고 있다. 검찰은 과연 새 역사를 쓸 수 있을 것인가.



주간동아 409호 (p24~25)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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