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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송두율, 진정한 참회의 눈물 쏟아라”

1992년 귀국 ‘간첩’ 오길남씨 … “노동당 서열 23위 ‘외눈박이’ 시선으론 北 진실 못 봐”

  • 글ㆍ사진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송두율, 진정한 참회의 눈물 쏟아라”

“송두율, 진정한 참회의 눈물 쏟아라”

외부와의 연락을 일절 끊고 살았던 오길남씨의 최근 모습. 외로움 때문인지 술과 담배에 의지하는 그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내가 죽거들랑 돌아오지…, 이런 만남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알기나 해?”

오길남씨(61)는 9월27일 송두율 교수와 12년 만에 해후한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고 한다.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에서 대질심문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전 독일 브레멘대 교수 오길남. 언론은 그를 ‘간첩’이라고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1992년 독일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지 이미 10년도 넘었건만 아직도 그는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구국의 소리’에 관여했던 거물급 간첩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입북할 것을 권유했다고 알려진 송교수와의 엇갈린 운명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는 송두율이 애처롭게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이미 진실을 다 말했기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1992년 입국할 때부터 이런 상황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함께 민주화운동 한 사이인데, 밀고하는 게 치사하잖아? 이런 입장이 되는 게 제일 싫었는데….”

“한발 물러나 보고 북한 미련 끊어야”

오씨는 현재 한 국책연구소에서 북한경제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10월1일, 기자는 서울 변두리에 있는 그의 낡은 아파트를 찾았다. 오씨 혼자 사는 집에는 짙은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북에 두고 온 처자식 생각에 고통이 크리라 생각됩니다.

“아직도 밤에 악몽을 꾸고 있소. 침대에서 잠을 못 이루고 의자에서 쪼그리고 자야 맘이 편해. 술도 많이 먹지만 아직 알코올 중독까지는 아니고. 됐다. 마, 심각하게 물어보지 마소.”

말끝을 흐렸지만 그는 단 한 장 남았다는 가족사진을 꺼내 들고 그리움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아내와 두 딸은 정치범수용소로 악명 높은 요덕수용소로 보내졌으며 아직까지 생사 여부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부산 사투리를 걸쭉하게 쓰는 그는 부산고와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1970년 독일로 건너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브레멘대에서 강의하던 1985년, 그는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그러나 북한 체제에 절망감을 느끼던 중 지식인을 포섭하라는 명령을 받고 1986년 12월 독일로 돌아왔다. 그 뒤 그는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고 가족송환운동을 벌였지만 실패하고 홀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송교수는 어떻게 만나 어떤 관계를 유지했습니까?

“1973년 3월1일, 독일 뮌스터에서 유신체제 반대 집회를 열고 송교수를 ‘민주사회건설협의회’ 의장으로 선출하고 나는 부회장직을 수행했지. 당시 그는 독일에 유학 와 그를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존경심을 가질 만큼 대단한 인물이었고, 나 역시 그보다 두 살이나 많았지만 송형이라고 부를 정도였소. 말이면 말, 글이면 글, 모든 것을 갖춘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학 같은 순수함도 지니고 있었지.”

-그러나 이번에 입국하면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많은 사람을 실망시켰습니다.

“나 역시 그래. 그의 통일철학은 너무도 훌륭했지만 그가 평소에 말해온 ‘단(斷)의 철학, 끊음의 철학’이라는 것을 이제는 몸으로 보여줘야 할 때가 온 거야. 죽은 아버지 무덤 앞에서 우는 것은 이해가 돼. 그러나 이제는 진짜로 울어야 해, 나처럼 말이야. 그래도 그는 나처럼 비참하지 않잖아? 자식 둘도 번듯하게 자랐고….”

그는 북에 두고 온 자식에 대한 미련을, 번듯하게 자란 송교수의 자제에 투영시켰다. 얼마 전 9월17일이 살아 있다면 25살이 됐을 둘째 딸 생일이라고 했다.

“송두율, 진정한 참회의 눈물 쏟아라”
-1985년에는 송교수가 입북을 권유했고, 1987년 이후에는 윤이상 선생이 재입북을 강요하고 송교수 또한 이에 가세했다는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강요라기보다는 무조건 북으로 돌아가라 이거야. 1991년 말에 하루는 윤선생이 애들 사진과 함께 애들 목소리를 카세트에 담아 왔더라고. 아내의 부탁 말도 함께 전해주더군. 원래 성격이 호방한 윤선생은 나더러 가족한테 돌아가라고 호통을 쳤지. 나는 가족 생각에 거의 실성 상태였는데 (충격으로) 구두도 팽개치고 도망쳤어. 송교수에게도 가족을 되찾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는 이 대목에서는 명확하게 알아듣기 어려울 만큼 말끝을 흐렸지만 국정원에서 진술한 내용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줬다. 그러나 1985년 월북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송교수에 대해서는 애증이 교차하는 듯 보였는데, 송교수에 대한 신뢰는 끝내 버리지 않았다.

-선생님이 관여하신 라디오방송 ‘구국의 소리’는 남한 청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지금 386세대는 그 방송을 들으며 주체사상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지. 굉장한 영향을 끼쳤어요. 나는 민영기라는 가명으로 방송했고, 당시 최고 경제학자인 박현채 선생 글을 베껴서 방송원고로 쓰곤 했지요. 우스운 것은 당시 북한에는 그 같은 경제이론을 분석할 수 있는 학자가 없었다는 겁니다.”

-송교수의 노동당 입당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만….

“해외인사들한테는 바로 비밀당원 자격이 부여됐습니다. 그들이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게 맞아요. 김일성 사진 앞에서 입당선서를 하고 옆에서 간부 하나가 선언하는 거지.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 교시를 받들어 남조선 혁명가인 송두율 선생을 우리 당에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박수치면 끝이었어. 그런데 비밀당원이 아닌 남한에서 월북한 사람들은 철저한 ‘밀봉교육’을 받습니다. 1983년에 월북한 철학자 윤노빈 교수가 대표적인데, 3년간 주체사상을 암기하고 유격시험을 통해서 당원이 됐어요. 송교수한테는 이른바 특혜가 주어진 셈이야.”

-노동당에 입당하지 않고 입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까?

“그건 나도 모르겠어. 여하튼 노동당 입당이 큰 영예로 여겨지던 시절이었기에 기회가 주어지면 서로 입당하고 싶어했지.”

-송교수가 노동당 서열 23위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재외학자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높은 서열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실권은 김정일 측근들이 다 쥐고 있어서 당 서열 자체는 별 의미가 없어요. 송교수에게 그렇게 높은 서열을 부여한 이유는 북한으로서 가장 중요한 목표가 남조선 혁명이기 때문이지. 당 서열 23위는 유럽총책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대남통일전선사업 담당 총책이기 때문이에요. 그만큼 북한에게는 고마운 최고급 철학자였던 게지, 체제 선전에도 도움이 됐을 테고….”

-18회나 북한에 간 송교수는 북한에서 무엇을 하며 지냈습니까.

“북한에는 여러 명소에 초대소가 있지요. 이를테면 별장이고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안가’예요. 전국 주요 명소에서 시간을 보낸 거지. 그가 벤츠나 타고 다녔기 때문에 나같이 현장에서 북한을 바라보지 못했다는 점이 오늘날의 비극을 부른 거요.”

-그럼 송교수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이제는 처벌당할 수도, 추방당할 수도 있는데요.

“나는 그가 반성하고 다시 독일로 돌아가야 된다고 봐요. 1년이나 2년쯤 다시금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서, 북한에 대한 미련을 끊어야지. 인간 송두율이가 용기를 내서 자기를 꺾고 자기를 부정해야만 살 수 있어요. 그가 마음 비우고 아집과 아망을 버리기를 바랍니다.”

인터뷰를 마친 오씨는 기자를 인근 술집으로 데리고 가 두 시간 동안 소주잔을 건네며 얘기를 나눴다. 그는 북한에서의 경험을 통해 극적으로 변한 자신의 인생을 비교적 담담하게 설명했다. 인상적인 것은 그가 북한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이 북한 금서 목록에 ‘마르크스’가 포함돼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라는 점. 그는 역사의 발전단계에는 비약이 있을 수 없다는 ‘자본론’을 통해 얻은 확신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남남갈등’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특히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상이하게 다른 양쪽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김정일 체제를 내부적으로 인정하는 길만이 평화정착을 앞당긴다는 진보주의적 관점이 주된 방향으로 자리잡았습니다만….

“허허, 나에게는 북한 체제 극복이 최대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보수보다 더한 극우라고 볼 수 있겠죠. 김정일 체제가 변화되지 아니하고서는 어떤 문제도 풀릴 수 없다고 봅니다. 모든 사람의 운신과 정신을 속박해버리는 봉건사회가 바로 북한입니다. 자립경제는 불가능합니다. 김정일이 이끄는 북한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주간동아 405호 (p42~43)

글ㆍ사진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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