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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아동’ 또 짓밟는 어른 사회

수사·치료·보상 시스템 모두 주먹구구 운영 … 피해자 가족들 절망과 분노의 호소

  •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성폭력 아동’ 또 짓밟는 어른 사회

‘성폭력 아동’ 또 짓밟는 어른 사회
”별로 하고 싶은 말 없습니다. 저 빨리 일하러 가야 해요….”

열두 살짜리 딸을 성폭행한 범인을 40여일 만에 잡아낸 어머니의 목소리엔 지친 한숨이 묻어났다. 월급 90만원을 받던 식당일도 제쳐두고 범인 잡는 일에 나섰던 어머니는 이제 딸의 치료와 가족의 부양을 위해 생계에 전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범인을 잡기 위해 생업까지 포기한 어머니가 경찰에 대해 느꼈을 절망과 분노의 감정 또한 흘러나왔다.

이 어머니뿐이 아니다. 5월 초 성폭행당한 네 살짜리 딸을 데리고 다니며 이틀 동안 네 군데의 병원과 두 곳의 경찰서에서 진료와 수사를 거부당했던 다른 어머니는 아동 성폭력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안일한 대처방식에 절망했다. 사랑하는 딸을 지켜주기에 사회라는 울타리는 너무도 허술했기 때문이다.

아직 성 정체감조차 없는 어린이들이 성폭력 위협에 노출돼 있지만 비합리적 제도와 각 기관의 주먹구구식 대처로 아동 성폭력 피해 가족들이 또 한 번 고통받고 있다. 이들은 “성폭력 피해 아동의 인권 보장을 꾸준히 주장해왔지만 제도 마련이 쉽지 않았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진단서 한 장 발급받기도 어려워



병원과 경찰, 성폭력 상담기관이 효율적 연계망을 갖지 못한 현재의 시스템은 아동 성폭력 피해자 가족을 울리는 가장 큰 요인이다. 영국의 경우 성폭행 당한 아이를 진단한 가정 주치의에게 경찰에 즉각 신고할 의무가 있는 반면, 한국의 성폭력 피해 아동들은 병원에서 진단서 한 장 발급받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게다가 정부에서 지정한 260여개의 성폭력 담당 병원들도 자신들의 병원이 해당 병원인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다.

물론 의사들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청담마리병원 홍순기 원장은 “성폭행 당한 아동의 초진은 다른 진료보다 많은 시간과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데도 그에 대한 인센티브가 전혀 없다”면서 의사에게 무조건적 희생을 바라는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실제로 성폭행 증거물 채취 등 어려운 작업은 수사관이 담당하게 해 의사의 일방적 부담을 줄이면 의사의 진료 거부 행위도 사라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동성폭력피해자가족모임 송영옥 대표는 “경찰병원 상담실에 인원과 재정 지원을 확대하고, 상주경찰을 두어 피해자들이 진료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는 일만은 막아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현재 성폭력 진단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경찰병원이 경찰과 병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연계할 수 있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성폭력상담기관들이 제 구실을 못해 피해자 가족에게 혼란을 준다는 지적도 높다. 앞서 언급한, 35시간 동안 수곳의 병원과 경찰서를 돌아다닌 어머니는 H성폭력상담소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상담소측은 신속하게 병원을 연결해주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상담소측은 이에 대해 “13명의 상담원이 하루에 14건씩 접수되는 사건을 일일이 동행하며 해결해줄 수 없는 일”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상담소측이 애타는 부모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더라면 그런 식으로 대응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일부 상담소의 자문병원과 법률가들에 대한 불신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지난해 1월 한 성폭력 상담센터가 연결해준 P산부인과에서 초진을 받은 S양(9)은 기본적인 성병검사를 받지 못해 임질에 시달렸다. 경험이 부족한 남자 의사가 성폭행을 당한 경우 초진 당시에 성병검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기초적 지식조차 모른 채 S양을 진료했던 것.

H성폭력상담소의 자문 변호사는 지난 2월 상담자 K씨에게 500만원의 변호사 비용을 보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성폭행 당한 딸의 소송을 위해 K씨는 변호사에게 절박한 심정으로 돈을 보냈다. 하지만 강간 사건은 변호사를 통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속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K씨는 결국 변호사로부터 돈을 돌려받았지만 상담소에 대한 신뢰는 잃고 말았다.

무엇보다 성폭력을 당한 아동들에게 고통스러운 부분은 사건 조사 과정에서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 7~8번씩 같은 진술을 반복해야 하는 상황이다. 다행히 법무부가 6월부터 피해 아동의 조사를 1회로 제한하고 조사 내용을 비디오로 촬영하는 방법을 시범적으로 실시하기로 했지만 그 제도가 제대로 운영될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성폭행을 당한 딸을 위해 5년간 소송을 벌여온 아동성폭력피해자가족모임 송영옥 대표는 “딸아이가 아직도 법정의 증인 출석요구서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법무부에서 피해아동 조사를 1회로 제한한다 해도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피의자측에서 ‘부동의 절차’를 밟을 경우 피해자인 어린이는 법정에 출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 송대표는 “겨우 밝고 명랑한 성격을 되찾은 초등학교 4학년인 딸에게 5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가혹한 처사”라며 딸이 법정에 다시 서지 않도록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딸을 지켜온 힘은 법이나 제도, 상담소가 아니라 잘못된 제도에 맞선 자신의 투쟁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5월27일 아동 성폭력 피해자 가족들의 간절한 목소리를 담은 탄원서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할 예정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경찰 조사 과정에서 한 번만 진술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만들어달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유엔에 우리의 요구서를 제출할 것입니다.”

송대표의 단호한 의지에서는 절박함이 절절히 묻어났다.





주간동아 387호 (p42~43)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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