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5

2003.05.22

한국 지식사회의 서글픈 초상

  • 입력2003-05-14 13:5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한국 지식사회의 서글픈 초상

    이수경의 '나무'

    1990년대 초 대학의 위기가 가시화하는 상황에서 등장한 말이 학문후속세대다. 말 그대로 풀이하면 다음 세대 학문을 이끌어갈 연구자들, 즉 석사과정 이상의 대학원생들과 박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연구소나 대학에 취직하기 이전의 연구자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1961년에서 91년 사이 대학원생 숫자가 4700명에서 9만1304명으로 20배 가까이 늘어난 경이로운 증가세 덕분에, 90년대 이후 학문후속세대는 박사 실업자와 비슷한 말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답답한 상황에서 학문후속세대의 새로운 전망을 꿈꾸며 발행된 무크지 ‘모색’이 4호를 맞았다. 중앙대 대학원 석·박사과정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2001년 창간호를 낸 ‘모색’은, 21세기에도 봉건적 충성서약으로 얽매여 있는 ‘학문후속세대의 일상과 정체성’을 대학원생들의 육성을 통해 들려줘 충격을 던졌다. 이어 2호에서 GRE와 토플책에 매달리는 대학가의 해외유학 풍속도를 화두로 삼았고, 3호에서는 진보적 학문 연구활동을 표방해온 학술단체협의회를 비판의 도마에 올리기도 했다. 1년 만에 선보인 ‘모색’ 4호는 ‘학문 세계의 자화상-여성 연구자’와 ‘국가 학문 지원 정책 비판’으로 문을 연다.

    “여성 연구자는 연구자가 아니라 단지 여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표현은 너무 과격한가. 교수로부터 “나는 여학생들에게 절대 F학점을 안 준다. 빨리 졸업하고 나가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들어야 하는 현실에서 ‘대학원 사회의 성차별’은 더 이상 가슴속에 묻어둘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 연구자들은 “학문 공동체의 성별 위계적 문화가 학문적 대화를 가로막는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들은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최김희정의 ‘김교수 성폭력 사건, 그 족쇄를 풀고서’는 2001년 10월31일부터 2003년 2월5일 재판이 끝날 때까지 전 과정을 차분하게 들려준다. 1년3개월에 걸친 사건에서 최김희정씨가 얻은 결론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교수들은 최소한의 도덕성도 저버린 채 서로를 보호한다”는 것과, 주위에 교수 성폭력 피해자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었다.

    쟁점탐구 ‘국가 학문 지원 정책 비판’은 한 해 1212억원(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 지원 사업)을 쏟아 부은 국가 주도의 학문정책이 연구의 질적 향상과 거리가 먼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오창은씨는 현재의 기초학문 육성계획에 대해 박사들의 공공근로사업, 긴급 수혈식 응급처방이라고 비판했고, 염정민씨는 갑작스러운 연구비 호황 속에 과제 공모를 위해 사적 인맥을 동원하고 명의 빌려주기에다 겹치기 출연을 마다하지 않는 부도덕한 학문세계를 폭로했다.



    현실은 11년 전 서울대 교수들이 모여 ‘학문후속세대 육성방안’ 토론회를 열고 학문의 질적 저하를 우려했던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자신의 목구멍에 풀칠하는 데만 혈안이 됐다”는 원색적인 비판 앞에서도 그것이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지식인들의 초상이 있을 뿐이다.



    확대경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