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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발목잡힌 ‘옥수수재단’

김순권 이사장, 대선서 이회창 후보 지지 후유증 … 이사들 문제제기하며 “손떼겠다” 압박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정치에 발목잡힌 ‘옥수수재단’

정치에 발목잡힌 ‘옥수수재단’

사퇴 의사를 표명한 김순권 국제옥수수재단 이사장(오른쪽).

‘경북대 국제농업연구소 소장 겸 석좌교수’ ‘국제옥수수재단 이사장’이란 공식직함보다 ‘옥수수 박사’로 더 유명한 김순권 교수. 김교수만큼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는 인물이 또 있을까. 한쪽에선 “옥수수밖에 모르는 순박한 농사꾼, 남북화해의 물꼬를 튼 평화주의자”라고 극찬하고, 다른 한편에선 “정파를 넘나드는 기회주의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독불장군”이라고 폄하한다.

그런 김교수가 곤경에 처했다. 국제옥수수재단(이하 재단)의 주요 인사들이 대선기간 김교수가 한나라당 이회창 전 후보의 선거운동에 나선 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 재단 이사로 참여했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박창일 신부 등 일부 인사들은 재단에서 사실상 손을 뗐다. 북한에서도 김박사에게 방북에 필요한 초청장을 보내주지 않는 등 대북사업도 주춤하고 있다. 김교수가 ‘이사장직 사퇴’라는 배수진을 치고 문제 해결에 나섰지만, 재단의 내홍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전망이다.

재단 이사인 이남주 YMCA전국연맹 사무총장은 “중립을 지켜야 할 NGO 대표가 정치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여러 차례 설득했지만 효과가 없었다”면서 “항의 차원에서 이사회에도 참가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형모 시민의신문 발행인(재단 이사)은 “이사회에 이사직을 내놓겠다고 밝혔다”며 “대북 지원에 회의적인 입장을 가진 후보를 지지한 것은 당위성이나 필요성 차원에서도 설득력이 없다”고 말했다. 박창일 신부도 “재단엔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며 “김교수의 비상식적인 처신에 크게 실망했다”고 토로했다.

5년 전 대선 때도 DJ 지지 선언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12월1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교수는 이날 한나라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통일과 남북화해 과제가 특정 정치단체와 기업의 소유물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이회창 후보가 적격”이라고 주장했다. 이 전 후보에 대한 지지선언 후 김교수는 대구지역 유세에 참여하는 등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에 나섰고, 대선 직전에는 한나라당의 방송연설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꼭 5년 전. 김교수는 1997년 12월15일 기자회견을 열고 김대중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김교수의 만남은 임동원 전 대통령 외교안보특보가 주선했다. 김교수는 DJ에게 “북한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슈퍼 옥수수 개발을 위해 10억원이 필요하다”며 “방북해 북한주민들을 돕고 싶다”고 건의했다. 김교수는 DJ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DJ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당시 그는 여러 차례 방북 의사를 밝혔으나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상황이었다.

결국 김교수는 두 번이나 스스로 선거판에 뛰어든 셈이다. 그것도 두 번 모두 ‘대선 직전’에 ‘배신자라는 비난을 각오하고’ 결심한 것이다. 그는 DJ 지지선언 이전에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받는 과정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한 관계자는 “5년 전의 지지선언은 재단 출범 전인 데다 동서화합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김교수를 ‘사기꾼’으로까지 몰아세웠던 한나라당을 ‘노골적으로’ 지지한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정부와 김교수가 옥수수 지원 사업을 가장해 정치적 목적의 대북지원을 하고 있다”면서 대북커넥션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재단의 내홍으로 인해 당장 재정이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60%), 천주교(30%), 기업(10%) 등에서 기부한 후원금이 재단의 주요 재원. 따라서 박신부와 이발행인 등이 이사직을 사퇴하게 되면 천주교와 시민단체들로부터 지원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발행인은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면 다시 함께 일해볼 생각”이라고 했지만, 박신부는 “천주교로부터의 기부금이 줄어들더라도 다시는 김교수와 일할 생각이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정치에 발목잡힌 ‘옥수수재단’

북한 내 1100개 협동농장에서 김순권 교수가 개발한 옥수수가 자라고 있다.

그렇다면 김교수는 왜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선거판에 뛰어들었을까. 그는 “DJ 정부의 부정부패와 DJ에 대한 실망이 이후보를 지지한 가장 큰 이유”라고 밝혔다. 그는 또 “옥수수 사업을 통해 DJ가 노벨상을 받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도움은 거의 받지 못해 이용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김교수가 DJ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된 것은 재단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이하 민화협) 간에 비료대금 문제로 갈등이 생기면서부터. 민화협과의 갈등이 계속되자 김교수는 청와대에서 DJ에게 “민화협으로부터 돈을 받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성과가 없자 그는 민화협이 비료대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이후보를 지지하겠다고 주변에 밝혔고, 북측에도 민화협이 12월10일까지 돈을 갚지 않으면 이후보를 지지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대북 지원단체들은 남북관계의 현실상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권력의 향배에도 민감해지기 쉽다. 추파를 던지는 정치권도 문제지만,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지원단체들도 잘못이라는 지적이다. 김교수는 “스스로 한나라당을 찾아갔다”고 주장하지만, 반대급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는 보기 어렵다. 한 관계자는 “대북사업은 정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제대로 추진할 수 없다”면서 “김교수가 정권이 교체될 경우에 대비한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한의 25개 연구소와 1100개 협동농장에선 그가 만든 옥수수가 자라고 있다. 김교수는 북한의 식량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슈퍼 옥수수’를 만들기 위해 지금도 농장에서 비지땀을 흘린다. 임원택 전 옥수수재단 사무처장은 “김교수는 옥수수밖에 모르는 순진한 분”이라고 말한다. 옥수수밖에 모르는 ‘순진한 과학자’가 정치권력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씁쓸하다.





주간동아 374호 (p58~59)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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