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4

2003.03.06

“용의자 정신질환자 아니다”

전문의 “중풍·실직으로 좌절감·스트레스 시달렸을 것” … 정신과 치료 받은 적 없어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3-02-27 18: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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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의자 정신질환자 아니다”

    2월18일 발생한 지하철 참사 방화 용의자 김모씨. 김씨는 경북대병원 내과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

    대구 지하철 참사의 방화 용의자 김모씨(57)는 사건 발생 4일째인 2월22일 현재까지도 자신이 저지른 엄청난 비극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 있다. 만약 용의자가 그 사실을 알 경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해소동을 벌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경찰이 이를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22일 현재 대구 동인동 경북대병원 내과중환자실(집중치료실)에서 몸이 묶인 채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 오른쪽 팔과 다리에 2도화상을 입었고, 폐부종으로 기계호흡을 하고 있다. 기계호흡을 할 때의 불편함을 없애주기 위해 진정제를 계속 투여받고 있어 정신이 혼미한 상태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게 담당 주치의의 말이다. 경찰은 중환자실 앞을 지키며 김씨와 외부와의 접촉을 모두 차단하고 있다.

    대구경찰청 지하철 참사 수사본부(본부장 조두원 총경)에 따르면 김씨는 2월18일 집 주변에서 시너로 추정되는 물질을 구입한 뒤 성당못역으로 이동, 안심역 방면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가다 9시53분께 중앙로역에서 시너로 추정되는 물질에 라이터로 불을 붙여 대형 인명피해 사고를 냈다. 방화 2시간 뒤 목격자의 신고로 시내 조광병원에서 발견된 김씨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2월19일 새벽 처음 “내가 불을 냈다”고 방화 사실을 시인했다. 김씨는 “그동안 불 낸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몸도 아프고 모든 게 귀찮아서였다”며 “나 혼자 죽는 것보다 많은 사람과 함께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더욱이 10여명의 목격자도 이를 증언하고 있어 김씨가 방화범이라는 점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장애자인 데다 실어증까지 있는 김씨가 안정을 요하는 상황인데도 경찰이 사건의 중대성을 이유로 무리하게 자백을 강요한 것은 비인도적인 처사라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경찰은 1차 조사 내용이 법정 증거능력의 효력이 인정되지 않을 것을 우려, 환자가 정상을 되찾게 되면 다시 구체적인 범행동기나 당시 정황 등을 조사할 계획이지만 일단 신병 확보 차원에서 24일 오전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한 수사본부 관계자는 “김씨의 진술 가운데 진실성이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며 “김씨가 깨어나면 범행동기와 방화경위 등을 재확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씨 이웃들 “남에게 해 입힌 적 없는 사람”



    “용의자 정신질환자 아니다”

    방화 현장을 목격한 이영복씨는 방화 2시간 뒤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김씨를 발견하고 경찰에 알렸다.

    기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김씨는 이웃에게 분노를 표출하거나 해를 입힌 적이 거의 없었다. 이웃사람들은 한결같이 “김씨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김씨의 앞집에 살며 18년간 김씨와 너나들이해온 김중철씨(53·개인택시업)는 “김씨가 자기 몸을 비관한 것은 사실이지만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는 것도 본 적이 없다”며 아직도 김씨의 범행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또한 언론에 잘못 알려진 것처럼 김씨는 정신분열증 환자도 아니다. 사고 뒤 정신과 전문의로서는 처음으로 김씨를 살펴본 경북대 의대 임효덕 교수는 “현재 환자가 중환자실에서 회복중에 있기 때문에 정신과적인 면담이 불가능한 상태지만 김씨를 정신질환자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임교수는 또 “김씨가 2년 전부터 중풍을 앓아 말이 얼뜨고, 사지 일부에 마비증세가 있으며, 뇌병변(뇌경색)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충동을 조절하기 어렵고 우울증세와 판단력 손상 등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며 “직업을 잃고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좌절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김씨는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 8월 M병원 의사의 권유로 김씨의 아들이 K정신과 의원을 찾아가 자살 시도 등 아버지의 특이한 행동에 대해 상담한 것이 전부였다. K원장은 “당시 아들에게 ‘아버지를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하는 게 좋겠다’고 권유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김씨가 몸을 회복할 경우 어떤 처벌을 받게 될까. 한 변호사는 “우선 김씨가 뇌병변 장애로 인해 현실판단 능력이 어느 정도 손상돼 있느냐에 따라 형량이 달라질 것”이라며 “정상적인 판단능력이 있는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면 최고 사형까지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김씨가 사전에 범행을 수차례 예고해왔던 것으로 알려져 가족과 주변에서 김씨의 이런 행동을 주의 깊게 살폈다면 이번과 같은 대참사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경북 예천 출신인 김씨는 3년간 화물차 운전기사로 일했고, 이후 발병 이전까지 3년간은 개인택시를 몰며 2층짜리 서민주택에서 아내 지씨(48·막노동)와 장성한 아들(27·기계설비 회사원), 딸(30·학원강사)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선량했던 김씨가 이처럼 대형 참사를 빚은 방화범으로 돌변한 것은 갑작스레 다가온 병마가 그 1차 원인이었다.

    “용의자 정신질환자 아니다”

    대구 서구 내당4동 용의자 김씨 소유의 2층짜리 서민주택(왼쪽).경찰은 경북대병원 내과중환자실(집중치료실) 앞을 지키며 김씨와 외부와의 접촉을 모두 차단하고 있다.

    김씨는 2001년 4월20일 오른쪽 반신마비와 실어증으로 대구 M병원에 입원해 중풍(뇌경색) 진단을 받았다. 자신의 어머니도 중풍으로 잃어야 했던 김씨는 2개월간 치료를 받은 뒤 마비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지만 예전처럼 정상적인 생활은 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통원치료를 계속했지만 김씨는 오른쪽 다리를 절뚝거려야 했고, 오른쪽 팔을 거의 사용하지 못해 항상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다녔다.

    김씨가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8월이었다. 김씨 가족은 경찰로부터 “김씨가 자살한다며 다리에서 뛰어내리려 해 데려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김씨는 경찰에게 “당신들 총이 있으니 날 좀 죽여달라”고 말했다는 것. 가족들에 따르면 이때부터 김씨는 몹시 우울해했고, 가끔 소리를 지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건 발생 열흘 전인 2월7일 김씨는 M병원을 찾아가 담당의사인 백모씨에게 “나를 좀 죽여달라”며 소란을 피웠고 이를 말리던 이 병원 원무계장 이모씨의 뺨을 때린 것으로 알려졌다. 나중에 이씨의 아내가 이번 참사에 희생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씨는 “그때 가족에게 알려 김씨를 입원치료하게 했어야 했다”며 통곡했다. 김씨의 이런 충동적인 행동에 대해 용인정신병원 하지원 과장은 “뇌손상 뒤 자기판단능력이 손상된 탓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김씨의 아들은 사고 직후 경찰에서 “아버지가 심한 우울증으로 자포자기하는 언동을 자주 보여왔고 정상적인 판단능력이 없었다”며 “남의 말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들은 또 “지난달에 아버지가 뇌졸중이 완치되지 못한 건 의사의 잘못이라며 의사를 죽이겠다고 휘발유통 2개를 사오기도 했으나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건이 발생한 18일 아침 그의 가족은 모두 그를 남겨두고 일하러 나갔다. 아들이 출근하면서 김씨를 깨우고 나간 시각이 오전 8시께. 이후 김씨와 가족은 아직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다. 김씨는 경북대병원 중환자실에서 면회객이 없는 유일한 환자다. 그의 가족들은 경찰과도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한편 김씨에 대한 언론의 왜곡보도는 장애인과 정신분열증 환자 등 소외계층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과 무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어서 씁쓸함을 남겼다.

    사건 발생 다음날 대부분의 언론들은 있지도 않은 김씨의 정신병력을 문제 삼거나 김씨를 정신질환자로 보도해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보건복지부, 대한의사협회, 신경정신의학회 등의 반발을 샀다. 대한의사협회 주수호 공보이사는 “OECD 회원국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 다시 한번 그 편견이 조장될 우려가 있다”며 “이번 참사를 계기로 안전관리, 소외계층 관리 등 사회적 문제들을 진단하고 치유할 수 있는 장·단기적인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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