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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삶

서산장학재단 이사장 성완종

“기부가 본업, 사업은 부업(?) … 가난 대물림 이제 그만”

  • 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

서산장학재단 이사장 성완종

서산장학재단 이사장 성완종
”쌀 한 가마니에 6000원 하던 시절입니다. 그때 고등학생들에게 등록금 3만원을 대줬으니 얼마나 큰돈이었겠습니까?”

“쌀 한 가마니에 4500원 하던 시절입니다. 그때 화주(貨主)에게 차 한 대를 불러주면 수수료로 1000원을 받았으니 얼마나 큰돈이었겠습니까?”

대아그룹 성완종 회장(52)의 말투는 늘 이런 식이다. 그가 돈과 관련한 수치를 제시할 때마다 ‘쌀 한 가마니’를 앞세우는 독특한 화법을 구사하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30년간 사업을 해오면서 익힌 후천적 숫자 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쌀밥 한 그릇도 제대로 못 먹고 살아온 어린 시절의 가난이다. ‘화주에게 차를 불러줬다’는 성회장의 설명은 25세 때 먹고 살기 위해 처음으로 자동차화물영업소를 운영하면서 수수료 수입을 챙기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 이제 가난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연매출 8000억원대의 건설업체, 40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청과유통업체를 포함해 7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그룹 회장에게서 가난의 냄새를 맡기는 어렵다. 그는 대한민국 부자들이 모여 산다는 서울 서초동 삼풍아파트에 살고, 어느 정도 재력이 뒷받침되어야만 맡을 수 있는 경영대학원 총동문회장 같은 직함도 갖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가난은 그의 스승이다.

그는 가난을 ‘스승’이 아닌 ‘적’으로 생각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가난을 벗삼으라고 충고한다. 그가 ‘주제넘게도’ 이런 충고를 할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가난을 딛고 부자의 반열에 오른 탓이기도 하다. 성회장이 1990년 30억원의 사재를 털어 운영하기 시작한 서산장학재단은 지금까지 모두 83억원의 기금을 모았다. 이중 51억원을 장학사업과 복지사업에 쏟아부었다. 이 재단의 장학금 혜택을 받은 사람만 줄잡아 3000명이 넘는다.



그는 대구 지하철 참사를 보고 또 한 가지 결심을 했다. 1년 전 심장마비로 아버지를 잃은 뒤 지하철 참사로 홀어머니마저 잃은 엄수미양 3남매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전액을 책임지기로 한 것. 성회장은 엄양 3남매의 대학 등록금을 기부하기로 하면서도 “무슨 일이 났을 때마다 보란 듯이 목돈을 던져주는 것보다는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진 다음에도 꾸준히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성회장은 얼마전 장학재단 이사장으로는 유일하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성회장은 흔히 말하는 ‘결손가정’ 출신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좋게 말해 ‘한량’이었는데 ‘술 먹고 노는 것’밖에 몰랐다. 항구도시의 술집에서 웃음을 팔던 한 여자가 어느 날 짙은 화장을 하고 시골집에 나타나 ‘내가 새엄마’라며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인 것은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성회장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그의 집안은 서산 바닥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알 만큼 괜찮은 집안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그는 부와 행복은 정비례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새엄마가 들어오면서 한순간에 부도 행복도 그에게서 멀리 달아나고 말았다.

집을 나왔다. 쫓겨나듯이. 그러나 어머니와 두 살배기 동생을 포함한 세 식구를 위해 구걸을 다니는 것은 초등학생인 그의 몫이었다. 물론 친척들이나 평소 부모와 알고 지내던 지인들을 주로 찾아다녔지만 먹고 살기 힘들었던 60년대의 세상 인심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두 살짜리 동생을 업고 해가 저물도록 꼬박 서른 집을 돌아다녔는데도 쌀 두 됫박이 안 모아집디다. 그때가 아마 제일 처음 세상 맛을 봤을 때일 겁니다.”

가난은 이때부터 평생을 쫓아다니며 스승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떼어놓으려야 떼어놓을 수 없는 이 스승이 가르쳐준 첫번째 교훈은 음지와 양지를 가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장도 손에 쥐지 못한 채 신문배달과 약국 심부름을 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가정부 노릇을 하며 자식들을 챙겼다.

“돈이 될 만한 일이라면 앞뒤 가릴 것이 없었습니다. 서툰 지게질을 해가며 밤낮없이 일하다 보니 등창이 나서 죽을 뻔한 일도 있었어요.”

서산장학재단 이사장 성완종

성완종 이사장은 지금까지 3000여명의 불우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아낌없이 주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화물영업소에서 일하면서 사업이 뭔지를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한 성회장은 운수업을 통해 모은 돈 200만원을 갖고 당시 서산토건이라는 건설업체의 지분 10%를 인수하며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든다. 사업 현장에서도 가난은 여전히 성회장을 따라다니며 훈수꾼 역할을 자임했다.

“난 직원들을 뽑을 때도 부유한 환경에서 곱게 자란 사람들은 절대 안 뽑습니다. 신입사원을 뽑을 때도 지방대 출신들을 70% 이상 뽑죠. 건설현장에서 근로자들과 함께 일하는 데는 고생하면서 살아본 사람들이 적격이에요.”

성회장이 세운 서산장학재단은 중·고등학생들에 대한 장학사업뿐만 아니라 지역문화사업에 발벗고 나서는 것으로 유명하다. 문화적으로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서산지역에 매년 가을 2000명 이상의 지역주민을 불러모으는 클래식 음악회가 열릴 수 있는 것도 장학재단의 지원에 힘입은 것이다. 성회장은 90년대 초부터 러시아의 볼쇼이 합창단이나 불가리아의 소피아 마드리갈 합창단처럼 수준 높은 외국의 공연단체들을 불러들여 서산 태안 등지에서 공연을 열고 있다. 폭넓은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유명 음악가를 ‘끌어오는’ 것도 그의 몫이다. 테너 박인수 교수(서울대)는 지난 10년 동안 50만원의 공연료만 받고 해마다 서산을 찾는 성회장의 오랜 지인이다.

성회장 같은 자수성가형 기업인일수록 만원짜리 한 장도 함부로 쓰지 않는다. 돈의 소중함을 느껴본 사람만이 돈의 가치를 알기 때문. 그러나 반대로 자수성가형 기업인일수록 필요 이상으로 돈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부자’가 그리 ‘명예로운’ 호칭으로 통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 이 경우를 성회장에 대입시켜보면 어떨까.

“난 맨바닥에서 기업을 일궜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회사를 ‘내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자식들에게 유산을 물려줄 생각도 없고요. 2010년까지는 갖고 있는 회사 주식도 모두 처분할 작정입니다.”

성회장이 회사 주식까지 몽땅 팔아버린다면 이 돈 역시 장학재단으로 넘어간다는 이야기다. 어림잡아 300억원. 현재 장학재단 규모의 4배 가까이 되는 돈이다. 그러나 성회장은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아야 우리 사회가 건강해진다는 신념을 실천하는 데 드는 돈치고는 얼마 되지 않는다”며 겸손해했다.



주간동아 374호 (p78~79)

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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