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9

2003.01.23

전국 곳곳서 ‘밀렵과의 전쟁중’

밀렵감시단 일주일에 사나흘 밤샘 단속 … ‘자연지킴이’ 사명감 때론 목숨 위협도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3-01-16 1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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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 곳곳서 ‘밀렵과의 전쟁중’

    밀렵꾼에 의해 목숨을 잃은 고라니.

    2002년 12월20일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김범현씨(25·고려대 3년)는 27일 태백산에서 종주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씨가 종주를 포기한 것은 밀렵꾼이 설치해놓은 덫에 걸려 다리를 심하게 다쳤기 때문이다.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사람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야생동물’이 아니라 밀렵꾼이 설치한 ‘올무’와 ‘덫’이다. 김씨는 “10일 남짓한 기간 동안 올무에 걸린 채 썩어가고 있는 동물들을 수없이 봤다”고 말했다. 먹이사슬이 파괴되면서 보금자리조차 찾기 어려운 야생동물이 허무맹랑한 보신주의와 탐욕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목숨을 잃고 있는 것이다.

    사냥도구로 뒤덮인 곳은 비단 백두대간뿐만이 아니다. 전국의 모든 야산과 철새도래지가 밀렵꾼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다. 1월9일 오후 3시경 경기 화성시 남양면 시화호 주변. 야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이내 날이 퍼렇게 선 덫과 철제와이어로 만든 올무가 눈에 들어온다. 바다 쪽으로 이어진 물가엔 오리를 잡기 위해 설치된 조류 포획용 덫이 설치돼 있다. 마을주민들은 “올무 등에 걸려 목숨을 잃는 야생동물이 월 200~300마리는 될 것”이라고 했다. 주민 김모씨(40)는 “한밤중에 총을 들고 찾아오는 밀렵꾼은 줄어들었지만 야산에 설치된 올무와 덫의 수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귀띔했다.

    밀렵꾼들이 이처럼 창궐하는 가운데 대한수렵관리협회 산하 밀렵감시단 단원들이 밀렵꾼들의 ‘천적’을 자임하며 야생동물의 파수꾼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감시단원과 밀렵꾼 사이의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다. 서해안 일대에서 ‘밀렵과의 전쟁’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천병권 밀렵감시단 경기지역 본부장은 “밀렵꾼들이 점조직화, 지능화하고 있는 터라 단속이 점점 힘들어진다”면서 “겨울철에는 일주일에 사나흘은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밤샘 단속에 나선다”고 말했다.

    “점조직화, 지능화로 단속하기 점점 힘들어”

    전국 곳곳서 ‘밀렵과의 전쟁중’

    밀렵꾼으로부터 압수한 총기를 살펴보고 있는 밀렵감시단원. 단속차량에 설치된 도깨비불.천병권 밀렵감시단 경기지역 본부장이 망원경으로 밀렵꾼을 찾고 있다(위 부터).

    1월8일 오전 10시30분 밀렵감시단 경기도지부. 30, 40대 장정 10여명이 검정색 방한점퍼와 군화를 맞춰 입고 출동 준비에 여념이 없다. 천본부장으로 부터 낮 시간 활동 계획을 전달받은 감시단원들은 날렵한 동작으로 조를 나눠 4륜구동 지프승용차에 탑승했다. 대원들은 차량용 무전기 핸디무전기 사이렌 랜턴 방탄복 디지털캠코더 디지털카메라 노트북 등 차량에 탑재된 장비를 점검하고 감시지역으로 향했다. 이날 감시단원들이 출동한 곳은 경기 화성시 시화호 주변의 야산과 섬 일대. 시화호는 담수화 포기 이후 재두루미 흑기러기 저어새 물떼새 등 멸종 위기 조류가 터를 잡고 멧돼지 노루 오소리 너구리 등 수류가 둥지를 틀어 ‘야생동물의 천국’으로 떠오른 곳이다. 야생동물이 늘어나다 보니 밀렵꾼들이 사냥도구를 챙겨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밀렵 단속은 제보를 받고 출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수적인 우위와 안전을 위해 보통 6인 1조로 활동한다. 낮에는 공기총을 이용한 조류 밀렵이 성행해 요주의 지역에 ‘둥지를 틀고’(감시단원들이 ‘잠복’ 대신 사용하는 은어) 3~4시간씩 대기하면서 용의차량 감시에 나선다. 지프형 차량은 모두가 용의차량으로 간주되고 조수석 창문을 열어놓았거나 진흙이 묻어 있는 차량, 뒤 범퍼에 흠집이 많은 차량, 철새가 떼지어 다니는 지역을 배회하는 차량들이 감시 대상이다.

    전국 곳곳서 ‘밀렵과의 전쟁중’

    밀렵꾼들이 야생동물을 사육하기 위해 마련한 비밀사육장. 냉장고에 보관돼 있던 야생동물과 밀렵용 올무. 독극물에 오염된 볍씨를 먹고 죽은 철새. 공기총에 맞아 즉사한 고라니.(위 부터)

    현재 환경부 검찰 등의 밀렵 단속은 민간단체인 밀렵감시단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밀렵감시단은 서울 본대 30여명을 포함해 도별로 10여명씩 모두 150여명의 자원봉사자로 구성돼 있다. 2000년부터 정부에서 연간 6억원의 보조금을 지급받고 있지만, 사무실 임대료와 운영경비를 충당하기도 빠듯한 실정이다. 감시단원 원석영씨(38)는 “동물을 지키겠다는 투철한 사명감이 없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밀렵 실태를 목격하지 못한 사람들은 우리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4시간 남짓 순찰과 잠복이 계속된 오후 3시께. 밀렵꾼으로 의심되는 용의자를 발견했다는 무전이 순찰조로 황급히 전해졌다. “영철이로 의심되는 차량 발견!” ‘영철이’는 감시단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일종의 은어로 밀렵꾼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어 “농로에서 야산 쪽으로 공기총을 쏘는 것을 봤다”는 구체적인 보고가 이어졌다. “영철이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 차량을 미행하겠음.” 확신이 선 감시단원들은 조를 나눠 용의차량 미행에 나섰다. 곧바로 검문에 들어갈 수도 있지만 최근엔 포획물을 산속에 숨겨두고 이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결정적인 증거를 잡기 위해서 미행에 나선 것이다.

    미행을 눈치챘는지 용의차량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서로 정체를 알았으니 비로소 ‘선수’들 간의 한판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인근 지리를 잘 알고 있는 듯 용의차량은 다른 차량들을 연거푸 추월하면서 시속 130km 이상의 속도로 내달렸다. ‘삐뽀 삐뽀~~’ 사이렌을 울리며 15분 남짓 추격을 계속했다. 어느덧 속도계는 150km를 가리키고 있고 밀렵차량과의 격차가 50여m 정도로 줄어들었다. 20m 가량으로 간격이 좁혀지자 용의차량이 중앙선을 넘어 앞 차를 추월해 도주하려다 포기했다. 반대 방향에서 대형 덤프트럭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150km 넘나드는 아찔한 추격전 끝 용의자 붙잡아

    단속차량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중앙선을 넘어 용의차량의 앞을 가로막았다. 덤프트럭과 충돌할 수도 있었던 아찔한 상황이었다. “니들이 뭔데 쫓아와. 내가 누군 줄 알아?” 용의자는 내리자마자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으며 곳곳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한 감시단원이 공기총을 발견하자 “사냥 연습 하려고 장난으로 한번 쏴봤다. 한 번만 용서해달라”면서 태도를 바꿨다. 밀렵꾼의 차량 트렁크에선 불법 포획한 야생조류가 쏟아져 나왔다. 검찰에 증거로 제출할 사진을 찍고 단속장부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적는 것으로 상황은 종료됐다.

    감시단원 가운데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사람들도 많다. 밀렵감시단 창단 멤버인 이덕재 동물보호센터 소장은 “밀렵꾼 4명이 단속반 차량을 들이받고 삽탄을 한 뒤 얼굴에 총구를 겨누는 아찔한 순간을 맞은 적도 있다”고 회고했다. 창단 첫해인 1995년엔 밀렵감시단 내부의 불협화음도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단속반이 밀렵에 나서거나 단속한 밀렵꾼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를 일으킨 대원들을 내쫓고 부조리가 사라지면서 밀렵감시단은 최근 대통령 표창, 환경부장관 표창은 물론이고 연말에 시상하는 각종 환경 관련 상을 휩쓸고 있다.

    전국 곳곳서 ‘밀렵과의 전쟁중’

    밀렵감시단원들이 밀렵꾼이 설치해 놓은 올무를 수거하고 있다.

    낮 시간 감시활동이 보통 조류 밀렵 단속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반면 야간의 경우엔 고라니 노루 멧돼지 너구리 등 수류 밀렵이 성행하는 농로 인근의 야산 지역을 주로 감시한다. 이날 밀렵감시단이 야간단속에 나선 곳은 충남 서산의 한 농촌마을. 천본부장은 “한동안 순찰을 돌지 않은 터라 영철이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며 감시단원들에게 긴장을 늦추지 말 것을 요구했다. 야간단속에는 서울 본부에서 내려온 2대를 포함해 모두 6대의 차량과 감시단원 13명이 투입됐다.

    밤 10시경 긴박한 무선 교신과 함께 산개했던 차량들이 기민하게 모여들고 지휘차량의 교신을 따라 농로의 주요 길목을 차단했다. 차량 2대는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언덕에 ‘둥지를 텄고’ 나머지 차량들은 순찰에 나섰다. 순찰차량과 잠복차량은 안개등과 전조등을 끄는 것은 물론 차량 내부의 시계에도 테이프를 붙여 완전히 등화관제를 한 상태. 앞 범퍼 아래쪽에 달린 ‘도깨비 등’에 의지해 불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농로에서 감시활동을 벌이는 것이다. 야간순찰은 용의차량이 나타나면 라이트를 끈 채로 미행하다 용의점이 발견되면 라이트를 켜고 추적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둥지를 틀고’ 야산을 응시하던 한지호 밀렵감시단 상황실장의 말에 따르면 일부 밀렵꾼들은 감시단원들의 무전을 도청하면서 소음기와 조준경까지 달려 있는 ‘저격용 총기’로 야생동물을 사냥한다고 한다. 감시차량에 부착된 것과 같은 도깨비불과 야간투시경 무전기 등을 갖춘 밀렵꾼들도 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감자탄’ ‘차치기’ ‘벼락치기’ ‘굴파기’ 등 밀렵수법도 날로 교묘해지고 있는데, 최근엔 법적으로 허점이 많은 ‘개사냥’이 성행한다고 한다. 현행법상 포획물 없이 단순히 사냥개만 데리고 있으면 처벌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9일 오전 3시50분께 지휘차량으로부터 다급하게 무전이 전해졌다. “영철이 눈 떴다!” ‘눈 떴다’는 것은 밀렵꾼이 사냥감을 찾기 위해 서치라이트를 켰다는 의미다. 감시대원들은 추적 준비를 갖추고 다음 무전을 기다렸지만 사실은 밀렵꾼이 나타나지 않자 천본부장이 장난을 친 것이었다. 천본부장은 “6시간 동안 둥지를 틀고도 영철이를 잡지 못해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속된 감시 활동 덕분에 밀렵이 줄어든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철수 명령을 내린 후 감시대원들과 함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고속도로 휴게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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