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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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가 대입 논술 길잡이?

수험생 입소문에 필독서 ‘자리매김’ … 유명 작가들 너도나도 삼국지 출간 나서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4-12-10 14: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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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가 대입 논술 길잡이?
    공부하다 지루하면 ‘삼국지’ 등 동양고전을 읽거나 브람스 교향곡을 들으며 머리를 식혔다.”(91년 서울대 전체수석 이학호) “이문열의 ‘삼국지’를 열다섯 번이나 읽었다.”(94년 서울대 전체수석 최지환) “중학교 때부터 삼국지 등 역사소설을 자주 읽은 것이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삼국지연의’를 네 번 읽었다.”(94년 서울대 인문계 수석 최지석)

    1990년대 삼국지 열풍의 진원지는 대학입시였다. 해마다 수석 합격생들이 입을 맞춘 듯 삼국지 효과를 언급했던 것이다. 그 수혜를 가장 많이 누린 것은 민음사의 이문열 삼국지(전10권)였다. 88년 초판 발행 이래 지금까지 1400만부가 팔렸다.

    삼국지가 대입 논술 길잡이?
    그러나 막상 교육계에서는 삼국지 효과에 대해 회의적이다. 오송식 교사(광양제철고 국어)는 “직접 논술이나 심층면접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문명의 충돌’과 같이 현실세계를 짚어주는 책들이다. 학교에서 따로 ‘삼국지’를 읽으라고 권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재미있으니까 알아서 읽는다”고 했다. 도서평론가 이권우씨는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삼국지가 과연 청소년 교양도서로 적합한지 검토해야 한다”면서 “동양고전이 논술에 도움이 된다면 왜 사마천의 ‘사기’ 같은 정사(正史)를 권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 삼국지를 읽으면 애늙은이가 된다는 말이 있다. 세상 이치와 물정에 너무 일찍 눈뜨는 것이 비교육적이라고 해서 조선시대에는 어린 친구들이 삼국지 읽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 거꾸로 삼국지는 초등학교, 늦어도 중학교 수준에서 읽을 책이지 고등학생이 삼국지를 필독서로 삼는 현실은 그만큼 한국 학생들의 빈약한 독서실태를 반영한 것 아니겠느냐는 지적도 있다. 어쨌든 대학입시는 30~40대 남성이 주류였던 삼국지 독자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연령층이 크게 낮아진 것은 물론, 역사소설이나 무협소설을 선호하지 않는 여학생들까지 삼국지를 접할 기회가 생겼다.

    삼국지가 대입 논술 길잡이?
    그런데 삼국지는 한 번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묘한 매력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박종화의 삼국지를 읽고 삼국지 마니아가 된 표정훈씨(출판칼럼니스트)는 국내에서 출간된 삼국지를 종류별로 소장하고 있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두 종류 이상의 삼국지를 읽는다. 박종화의 삼국지를 유장한 맛으로 읽었다면, 이문열의 삼국지는 현대적인 문체 등으로 일반인에게 널리 읽혔다. 개인적으로 박종화, 김구용, 이문열 삼국지를 꼽지만 정확한 고증과 각주를 많이 단 정소문의 삼국지도 가치가 있다”고 했다.



    서로 다른 판본들을 비교해 가며 읽는 삼국지 애호가들의 독특한 독서패턴 때문에 출판시장에는 매년 새로운 종의 삼국지가 등장하고 있다. 사실 출판사 입장에서 삼국지는 놓치기 아까운 대어다. 삼국지 한 질 없는 집이 없을 만큼 많이 팔렸다지만 매년 50만~60만부의 새로운 삼국지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앞서 밝혔듯, 다 아는 이야기라 해도 ‘다른 맛’을 원하는 독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삼국지 시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이문열 삼국지가 최근 판매가 주춤한 점도 새로운 삼국지 출판에 기회가 되고 있다. 이문열 삼국지는 워낙 많은 사람이 이미 읽었거나 소장하고 읽기 때문에 신규 독자층이 형성되지 않고 있다. 이런 점을 의식해 이문열씨는 유비 이후 이야기를 대폭 보강해 2~3권을 더 늘린 삼국지를 준비중이다.

    새로운 삼국지의 등장에는 출판사의 상업적 계산뿐만 아니라 스스로 삼국지마니아인 작가들의 집필의욕도 크게 작용한다. 최근 열림원에서 삼국지를 낸 조성기씨는 “그동안 번역된 삼국지 가운데 단연코 삼국지는 없다”는 주장을 펴 화제가 되었다. 이 말의 배경에는 우리나라에서 번역된 삼국지들이 대부분 ‘삼국지연의’를 다시 각색하여 내놓은 작품들로 삼국지 원본을 정확하게 번역한 책이 거의 없다는 작가의 판단이 있었다.

    삼국지가 대입 논술 길잡이?
    이것이 새로운 삼국지가 등장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정역, 평역, 평설 논쟁이다. 삼국지는 원래 중국 진(晉)나라의 진수라는 사람이 쓴 위·촉·오의 역사서를 말하며, 우리가 흔히 읽는 소설 삼국지는 이 역사서를 토대로 원나라 말 나관중이 편집한 ‘삼국지연의’를 가리킨다. 이 역시 이탁오, 모륜, 모종강 등의 손을 거치면서 첨가와 삭제를 거듭했다.

    30대 이상의 독자들이 가장 먼저 접한 것은 박종화의 소설 삼국지일 것이다. 대현출판사는 99년 개정판을 내면서 “젊은 작가들의 삼국지가 전자밥통에 쪄낸 밥이라면 박종화의 삼국지는 무쇠솥에 장작 지펴 구워낸 밥”이라는 말로 신세대 삼국지와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역사소설의 대가답게 사건 중심으로 물 흐르듯 읽히는 것이 박종화 삼국지의 특징. 그러나 74년 김구용 삼국지가 정본완역을 들고 나오면서 정통성을 주장했고, 88년 이문열의 평역(각색) 삼국지가 나오기 전까지 삼국지를 대표했다. 그 밖에도 김동리, 정비석, 박정수, 황병국, 김홍신, 정소문, 한무희 등의 삼국지가 각축을 벌였다. 여기에 조성기에 이어 내년에는 황석영과 장정일씨까지 가세하니 삼국지 군웅할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지난해 동방미디어에서 펴낸 ‘소설 삼국지’는 완역이나 평역 수준을 떠나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삼국지를 본 책이다. 저자 이 재운씨는 “나는 단지 재미를 위해 이소설을 쓰지 않았다. 우리나라 소설가로서 삼국지가 숨기고 있는 중국인(한족)들의 음모를 벗기기 위해 쓴다”고 밝혔다. 그는 농경정착민족과 유목이동민족 간의 대결로 삼국지를 재구성했으나, 독자들은 원전에 충실한 삼국지를 더 선호했다.

    한국 작가는 삼국지를 쓴 작가와 쓰지 않은 작가, 이미 쓴 작가와 앞으로 쓸 작가로 나뉜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 ‘다르게 읽는 삼국지 이야기’나 ‘의리로 본 삼국지’ ‘만화 삼국지’ ‘삼국지 기행’ ‘나관중도 몰랐던 삼국지 이야기’ 등 파생상품까지 포함하면 작가와 독자층은 더욱 넓어진다.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군신의 의리와 충성심 등 전근대적 인간관계를 강조한 삼국지 열기가 아이러니컬하지만, 삼국지는 새로운 세기에도 살아남을 문화상품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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