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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재출간되는 ‘명작’ 만화들

유년의 기억 속으로 ‘환상여행’

  • < 전원경 기자 > winnie@donga.com

유년의 기억 속으로 ‘환상여행’

유년의 기억 속으로 ‘환상여행’
누군가 말했지. 돈이 많거나 능력 있는 사람보다는 착하고 따스한 남자야말로 진짜 좋은 남자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대부분의 여자들은 너무 늙어 버리고 만다고.”

이 말은 영화나 소설의 대사가 아니다. 이케다 리요꼬가 그린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여주인공 오스칼이 앙드레에게 한 말이다. 만화라지만 어느 영화 못지않게 멋진 대사가 아닌가. 프랑스 대혁명을 무대로 한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통해 프랑스 역사를 배웠다고 말하는 여성은 지금도 드물지 않다.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만화에도 분명 명작이 있다. 그러나 정작 그 명작을 구해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출판물과는 다른 유통구조 때문에 만화는 한번 출간하면 2개월 미만의 짧은 시간에 시장에서 사라진다. 만화는 서점이 아니라 도서대여점과 만화가게라는, 만화만의 독특한 유통시장에서 소비되기 때문이다. 쇄를 거듭하면서 출간하는 일도 거의 없어 초판이 다 팔리는 것과 동시에 절판되고 만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만화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명작이나 고전으로 손꼽히는 작품들이 재출간되고 있는 것이다. 또 아예 출판 시장을 겨냥한 작품도 늘고 있다. 바다출판사는 ‘꺼벙이’ ‘도깨비감투’ ‘두심이 표류기’ 등 1970년대 소년 잡지를 풍미하던 작품들을 출간했고, 대원씨아이는 ‘슬램덩크’를, 디자인하우스는 ‘아기공룡 둘리’를 재출간했다. 판형을 키우고 종이질을 고급화한 이 작품들은 언뜻 보기에 만화가 아니라 소설이나 그림책처럼 보인다. ‘슬램덩크’는 초판만 3만 부를 발행했다. 보통 책의 초판은 2천~3천 부 내외다.

유년의 기억 속으로 ‘환상여행’
문학과지성사가 프랑스 만화인 ‘아스테릭스’ 시리즈를 출간하기 시작한 것도 출판계의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세계 54개 국어로 번역해 전 세계적으로 3억 부의 판매액을 올렸다는 ‘아스테릭스’ 시리즈는 프랑스인의 자국 역사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1차로 3권을 발간한 문학과지성사는 9월에 2차분 3권을 다시 발간할 예정이다.



또 앞에서 이야기한 ‘베르사이유의 장미’나 ‘올훼스의 창’ 등의 순정만화와 ‘도라에몽’ ‘드래곤 볼’ 등이 무삭제판으로 재출간된 것은 만화계의 작은 변화를 예고한다. 1970, 80년대에 이 만화들을 읽은 세대들은 당시의 추억을 더듬으며 새로 출간된 판본을 산다. 만화의 수요층이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넓어진 것이다.

청소년들이 도서대여점에서 만화를 빌려본다면 성인들은 만화를 산다. 이들에게 만화는 더 이상 한번 보고 버리는 허섭쓰레기가 아니다. CD롬으로 출간된 고우영씨의 ‘삼국지’ 무삭제판은 1700쪽이 넘는 분량에 2만4000원의 고가임에도 2만 부 가까운 판매액을 기록했다. 성인의 호응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결과다.

벤처기업의 CEO인 권대석씨(32)는 적잖은 만화를 소장한 만화애호가다. 그는 ‘이제는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레저를 즐길 만한 여유가 있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면서 “만화를 보는 것이 유치하거나 철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재미있고 즐거우면 되는 거지 남의 눈을 신경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만화평론가 박인하씨는 “만화를 보면서 성장하던 세대가 어른이 되어서도 자연히 만화를 찾고 있다”고 요즘의 세태를 진단했다. 아직 사회적 인식이나 출판만화에 대한 투자부족 등 갖가지 문제들이 쌓여 있지만 그는 최근 좋은 만화들이 속속 재출간되는 세태가 한국 만화계에 희망적 조짐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청소년뿐 아니라 여러 독자층을 대상으로 한 작품들이 출간되고 구매가 가능해지면 자연히 생명력이 긴 명작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화가 기존의 출판시장에 자연스럽게 편입할 수 있어야겠죠.” 지금까지 우리 만화는 검열과 대여점이라는 이중의 족쇄에 묶여 자유스럽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또 애니메이션이 가진 엄청난 부가가치를 탐내면서도 정작 애니메이션의 토대가 되는 출판만화를 경시하는 모순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만화출판사들은 더 이상 대본소 체제로는 생존이 어렵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고 새로운 방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명작 만화의 재출간은 이러한 방향 모색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어찌 보면 만화계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인 셈이다. 한 만화가는 “기존 만화가들이 거의 고사했기 때문에 과거 작품까지 찾아내고 있다”고 비관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은 또 다르다. “인터넷 서점에서 ‘꺼벙이’ ‘철인 캉타우’ 등을 주문했는데 재고가 없어 ‘꺼벙이’ 1권만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왠지 풍속사 자료처럼 느껴지더군요. 다른 만화는 몰라도 ‘철인 캉타우’는 꼭 보고 싶습니다. 다섯 살 때 보았지만 그 긴박감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서점에 가면 살 수 있을까요?” 이 성인 독자처럼 대부분의 만화 애호가들은 ‘기억 속에서 아직도 생생한’ 만화들이 살아온 것을 반가워하기 때문이다.



주간동아 2001.09.06 300호 (p96~97)

< 전원경 기자 > winni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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