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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메야~ 후궁이 상궁 뺨을 때려?

사극 인기 영향 ‘상궁’ 재조명 바람 … 궁궐 살림살이 도맡는 정5품~종9품 ‘엄연한 관직’

  • < 오종록/ 고려대 교수·한국사 > ojrqwer@hanmail.net

메야~ 후궁이 상궁 뺨을 때려?

메야~ 후궁이 상궁 뺨을 때려?
요즘 ‘여인천하’를 비롯한 일부 사극에서 상궁들이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는 예상치 못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상궁 역을 맡은 연기자의 팬클럽이 생기고, 회원 수도 수천에 이른다고 한다. 여인천하에서 경빈 박씨가 “감히 늙은 상궁년이 뉘 앞을 막아서는 게냐”라며 따귀를 날렸을 때 엄상궁이 굴하지 않고 따귀를 치는 경빈의 손을 움켜잡고 “중전께서 계신 교태전 앞에서 이 무슨 완패막심한 짓이옵니까”라며 대든 장면 등이 팬클럽 회원들의 단골 화제인 모양이다.

그러면 과연 후궁이 상궁의 따귀를 때리는 일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을까?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후궁은 정1품 빈에서 종4품 숙원까지의 내관이고, 상궁은 정5품에서 종9품까지의 품계를 갖는 궁관의 우두머리다.

‘후궁이 손찌검’ 사실상 불가능

빈은 후궁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궁의 따귀를, 그것도 중전이 있는 건물 앞에서 올려 붙이는 것은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다. 이는 영의정이 임금이 앉아 있는 근정전 앞에서 앞을 막아서는 도승지의 뺨을 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떤 관직체계에 속하든 관원은 임금에게서 관직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는 존재므로, 임금의 명령이나 법률 절차에 따르지 않고서는 누구도 함부로 신체에 손상을 가할 수 없었다.

사극을 보면 내관 즉 임금의 후궁들은 빈, 귀인, 소의, 숙의 등 구체적 명칭이 나온다. 이에 비해 궁관의 경우는 상궁 외에 이렇다 할 구체적 명칭을 쓰지 않은 채 화면에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지만 실상은 궁관의 직책이 당연히 내관보다 다양하였고, 따라서 그 수도 많았다. 또한 세자궁인 동궁에도 내관과 궁관이 구별되어 소속되어 있었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 후궁들에 대해서도 총재, 즉 국정을 맡는 재상이 통제할 수 있어야 임금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있다는 주장이 팽배했고, 후궁은 물론 궁궐 안의 여인들에게 관직을 주는 것에 대한 반대 또한 강력하였다.

이에 따라 우여곡절 끝에 세종 때 이르러 내관과 궁관의 명칭과 직무가 정비되었다. 맡는 일이 분명한 궁관과 달리 임금의 첩인 후궁은 그것이 분명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후궁들에게 관직을 주기 위해서는 맡는 바 직무가 있다는 명분이 필요한 것이었다.

궁궐은 서울 안의 폐쇄된 공간으로 조그마한 별도의 도시와 같았다. 지존무상의 존재인 국왕을 필두로 수많은 건물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여러 가지 일을 자체적으로 처리해야 했다. 외부와의 왕래가 극도로 절제되는 가운데 궁궐 내부의 실무를 처리하는 것은 대부분 여인의 몫이었고, 일부가 남성인 환관의 몫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궁관에는 모두 27개의 직책이 있었으며, 각 직책의 정원은 1명이었다. 궁관의 우두머리인 상궁은 정5품으로, 왕비를 인도하는 일을 맡으며, 왕비의 말과 행동 및 중궁전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기록을 맡는 궁관 2명(상기와 전언)을 통솔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을 왕의 실록이라 할 때, 이에 대비되는 ‘왕비실록’을 편찬한 일도 있었음이 기록에 나타나는데, 이는 두 궁관의 활동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졌을 것이다.

상궁 외에 ‘상’자가 붙은 궁관으로 상의(정5품), 상복과 상식(종5품), 상침과 상공(정6품), 상정과 상기(종6품) 등이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각기 하급 궁관들을 지휘하여 궁궐 내 왕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일상생활에서의 예의 절차, 의식주 생활, 왕과 왕비를 뵙는 신하나 외부 손님의 접대, 잔치, 상을 주는 일과 관련된 실무 등을 맡았다.

예를 들면, 상복은 의복과 수를 놓은 문장 따위의 공급을 총괄하는 한편, 의복의 장식과 머리에 꽂는 머리장식 따위를 맡는 전의(정7품), 왕비가 세수하고 머리 감고 빗고 화장하는 일을 맡는 전식(정8품)을 지휘해 왕과 왕비의 의생활 실무를 총괄하였다. 그리고 음식과 반찬을 종류대로 올바로 준비하는 일을 맡는 상식은 음식을 삶고 졸여 간에 맞는 반찬을 만드는 전선(정7품), 처방에 따라 약을 달이는 일을 하는 전약(정8품)을 지휘하였다.

다만 궁녀들의 품행과 직무 수행을 단속하고 죄를 다스리는, 당시의 조정으로 치면 사헌부, 지금으로 치면 검찰의 일을 맡은 상정과 기록을 맡은 상기의 휘하에는 소속 궁관이 따로 없었다.

정7품에서 종8품까지의 궁관은 12명으로 모두 ‘전’자가 붙는데, 상궁 이하 상공까지 6명의 고위 궁관의 지휘를 받으면서 맡은 바 실무를 처리하였다. 또 궁관의 가장 말단에는 음악 연주를 맡는 관원 7명(정9품과 종9품)이 자리잡고 있었다. 궁중에서 창기를 뽑아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법을 가르친 것은 태종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종 때까지만 해도 이들이 궁관에 들어 있지 않았는데, 후에 남녀 구별이 더 엄격해지면서 궁궐 내 여인들의 사회에 남자 악공이 들어가 연주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여악이 생기면서 궁관의 일부가 되었다.

메야~ 후궁이 상궁 뺨을 때려?
궁궐 안에는 내관과 궁관 외에도 또 잡다한 일을 맡아 처리하는 여인들이 많이 있었다. 흔히 이들을 무수리라고 하지만 본래는 무수리, 파지, 수모, 방자, 여령 등의 구별이 있어 맡는 일도 각기 달랐던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내용은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상궁 등의 명을 받들어 궁녀 전반이 여러 잡무를 담당하는 가운데 수모는 물을 긷는 일, 방자는 전각을 청소하는 일, 여령은 노래하고 춤추는 일을 하는 따위의 구별이 있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당초에 궁녀는 관원들의 첩의 딸이나 양가의 딸들 가운데 뽑아 쓰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선 초엽까지만 해도 천첩의 딸, 즉 천민 출신은 궁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원칙은 태종 때 어린 창기 6명을 궁녀로 삼은 이후 차츰 무너졌고, 오히려 천첩의 딸이나 관가에 소속된 천민의 딸들로 채워졌다. 나라에서 양가의 딸들 가운데 궁녀를 뽑으려고 하면 딸이 있는 집마다 일찍 혼사를 서둘러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에 따라 17세기 이후로는 아예 관가 소속 천민 출신에서 궁녀를 뽑는 것이 제도로 굳어졌다.

이들은 사춘기 이전에 궁에 들어온 뒤 20세 전후 성년식인 계례를 치러 정식 ‘나인’이 되며, 다시 15년쯤 지나면 ‘상’자가 붙는 고위 궁관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사극에서 상궁이 새로이 조명을 받고 대중의 관심거리가 되는 것은 일면 반가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늘에서 생활하던 여인들의 삶 자체가 주목받으면서 관심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궁궐 여인들 사이의 갈등과 암투, 권모술수의 난무가 계기가 되어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점은 입맛을 씁쓸하게 만든다. 건강한 역사의식을 담은 사극에서 그늘 속 사람의 삶이 재조명될 날을 기대해 본다.



주간동아 2001.09.06 300호 (p74~75)

< 오종록/ 고려대 교수·한국사 > ojrqw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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