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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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터지 소설, ‘참을 수 있는’ 가벼움인가

N세대 입맛에 맞는 환상과 스릴 … ‘문화산업’ 혹평 불구 옹호론 일기 시작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4-12-15 15: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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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터지 소설, ‘참을 수 있는’ 가벼움인가
    마녀물고기와 거미인간, 푸른고리문어, 마술에 걸린 방, 물집처럼 어느 날 갑자기 피부에 돋아나는 불가사리, 날아가는 갈매기 떼 모양의 치모를 가진 여자, 자궁 속으로 되돌아가 버린 임산부. 이평재의 첫 소설집 ‘마녀물고기’(문학동네 펴냄)는 거침 없는 상상력이 만들어 낸 그럴듯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문학평론가 서영채씨는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너절한 일상을 가로지르는 강렬한 엑스터시의 섬광들을 포착해 냈다”며 범상치 않은 이 신예 작가의 등장에 주목했다.



    대학가 도서대출 10권 중 2~3권

    팬터지 소설, ‘참을 수 있는’ 가벼움인가
    아마존 닷컴에서 지난 5년 동안 팬터지 부문 연속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그레고리 매과이어의 장편 ‘마녀’(동아일보사 펴냄)는 마녀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마녀를 주인공으로 한 성장소설이다. 엘파바는 먼치킨랜드 일치교 목사의 딸로 초록색 버터 반죽 같은 피부에 뾰족한 이빨을 가진 채 태어났다. 아이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공포’였다. 태어날 때부터 불길한 징후를 보인 초록색 피부의 엘파바는 총명하지만 냉소적인 여성으로 자라나 나중에 악명 높은 서쪽 나라의 사악한 마녀가 된다.

    매과이어는 L.프랭크 바움의 소설 ‘오즈의 위대한 마법사’에서 영감을 얻어 이 소설을 썼다. 캔자스주의 황량한 초원에 사는 어린 소녀 도로시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오즈의 먼치킨랜드에 떨어질 때 재수없게도 동쪽 나라 마녀가 도로시의 집에 깔려 죽는 게 이 소설의 시작이다. 이 마녀가 서쪽 나라 마녀 엘파바의 동생 네사로즈다. 곧 국내 완간(전 3권)을 앞둔 이 책에 대해 해외서평은 “팬터지 소설 형식을 빌려 선과 악, 신과 자유의지 등의 문제를 극명하게 명상하였다”(퍼블리셔스 위클리)고 극찬한다.



    팬터지 소설, ‘참을 수 있는’ 가벼움인가
    비슷한 시기에 출간한 ‘마녀 물고기’와 ‘마녀’는 ‘마녀’를 전면에 내세워 상식을 파괴하고,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는 점에서 내용적 유사성을 갖는다. 그러나 두 소설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간극이 있다. 한쪽은 순수문학이고, 다른 한쪽은 팬터지 소설. 순수문학이나 본격문학이 리얼리즘의 법칙을 깨고 현실세계에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묘사하면 우리는 그것을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팬터지 소설의 비현실적 세계는 그저 ‘상상’이요 ‘공상’일 뿐 평론가들은 팬터지 소설을 환상문학의 범주에 넣는 것조차 난색을 표했다.

    지난 7월 ‘교수신문’이 전국 6개 대학 상반기 도서대출 현황을 발표했을 때 대학생들의 한없이 가벼운 책 읽기가 도마에 올랐다. 고려대 대출 1위에서 10위까지를 보면 ‘상도’ ‘가즈나이트’ ‘검마전’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국화꽃 향기’ ‘흑기사’ ‘만행’ ‘텔미 유어 드림’ ‘로마인 이야기’ ‘노자와 21세기’였다. 언뜻 보아도 팬터지물이 3~4권이다(‘해리포터…’를 팬터지에 포함시킬 것인지는 아직 논란중이다). 전북대는 ‘묵향’ ‘삼국지’ ‘성검전설’ ‘드래곤 라자’ ‘다크문’ ‘퇴마록’ ‘사이케델리아’ ‘카르세아린’ ‘탐그루’ ‘데로그 앤 데블랑’으로 나관중의 ‘삼국지’만 빼면 모두 팬터지 소설이다. 나머지 대학들의 대출순위도 10권 중 적어도 2~3권은 팬터지물. 이 신문은 “지금 대학 도서관은 무협의 옷자락 대신 마법의 칼과 방패가 번뜩인다”고 촌평했다.

    이처럼 1990년대 후반 비로소 팬터지라는 이름 아래 모인 팬터지 소설들이 짧은 기간에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음에도 문학세계에서 홀대 받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황당한 상황 설정이나 엉성한 문장 등 작품성 부족, 둘째, 즐기는 문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현실도피적 내용, 셋째, 순수문학이 넘보기 어려운 상업적 대성공이다.

    팬터지 소설, ‘참을 수 있는’ 가벼움인가
    팬터지냐 아니냐를 놓고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한국 팬터지’의 효시라는 이우혁의 ‘퇴마록’(전 19권)의 경우, 94년 1월 첫 출간 이후 7년 동안 780만 부가 팔렸다. 지난 7월 나온 말세편 5·6권(완간)은 초판만 20만 부를 찍었고 이미 3주 만에 18만 부를 돌파했다.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전 12권)는 98년 출간 이래 70만 부가 팔렸다. 그밖에도 만화책, 게임CD, 온라인 게임, 애니메이션 등으로 만들어져 팬터지 소설이 고부가가치 상품임을 입증했다. 이와 같은 상업적 성공은 오히려 팬터지 소설의 문학적 입지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팬터지 소설에 대해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은 문학평론가 하응백씨다. 그는 99년 비평집 ‘낮은 목소리의 비평’에서 “팬터지 소설은 통신망을 토대로 성장하여, 일부 출판사의 상업주의적 전략으로 기반을 공공히 하고, 나아가 컴퓨터게임·애니메이션·팬시산업으로 이어질, 문학이라기보다 활자로 된 신종 문화산업이다”고 했다. 덧붙여 “팬터지 소설의 문학적 미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팬터지 소설이 순수문학에게서 외면당하는 것은 비단 우리만의 현실은 아니다. 지난 50년 동안 전 세계 팬터지 팬들에게서 열광적 찬사를 받아온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대해 영국 비평계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과 질적으로 뛰어난 문학작품은 다르다”는 말로 문학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팬터지 소설, ‘참을 수 있는’ 가벼움인가
    그러나 지난해부터 “애당초 순수문학과 팬터지의 이분법적 구별은 적절치 않다”는 팬터지 옹호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 말은 문학평론가 권택영 교수(경희대 영문학)가 이영도의 중편 ‘오버 더 호라이즌’과 장편 ‘폴라리스랩소디’(전 8권) 완간에 즈음해 칼럼을 통해 밝힌 것이다. 서울대 장경렬 교수도 ‘팬터지 소설에 관한 명상’이라는 글에서 카프카, 보르헤스, 마르케스 의 환상문학적 요소를 받아들인 국내 작가로 최인석(‘아름다운 나의 귀신’), 정영문(‘괴저’) 등 순수문학 작가 외에 이영도, 김예리, 이경영 등 팬터지 작가(장교수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사이버 시대의 젊은 작가)를 나란히 언급함으로써 사실상 팬터지를 환상문학의 범주로 인정했다.

    팬터지 소설이 자연스럽게 문학으로 편입할 수 있던 데는 역설적으로 순수문학의 침체가 크게 기여했다. 권택영 교수는 “우리 문단은 사실주의가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내면세계에 집착하면서 자의식적 성향을 보이는 소설이 많다. 그러나 21세기 독자는 때로 훨훨 날고 싶어한다. 이영도의 팬터지는 이들이 갈증하는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준다”면서 팬터지 소설들이 좀더 다듬어진다면 “한국 문단이 스스로 가두고 안주하는 리얼리즘의 견고한 성채가 허물어지는 광경을 목도할 것이다”고 예견했다. 문학평론가 장은수씨(황금가지 편집장)는 “팬터지 소설을 읽는 독자를 탓할 게 아니라, 독자가 원하는 소설을 내지 못하는 문단을 탓해야 한다. 팬터지 소설은 프로컨슈머리즘을 실천하는 장이다. 생산자가 동시에 소비자이며 소비자는 언제라도 생산자가 된다. 사이버 공간(PC통신)을 통해 새로운 동인문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만큼 성장 가능성이 높다. 팬터지 소설이 비난 받은 것은 작품의 질 때문이었다. 90년대 팬터지는 작품성이야 어떻든 내기만 하면 팔렸고 출판사도 아마추어 작가들을 부추겨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들을 내놓기에 바빴다. 그러나 곧 그런 시대는 끝났다. 작품이 다양해지고 프로 작가들이 탄생하면서 저급한 작품들은 저절로 도태되었다”(장은수).

    장르문학 전문 웹진 ‘이매진’은 국내 팬터지 특집에서 무협지와 팬터지가 만나는 시점을 김근우의 ‘바람의 마도사’로 보았다. 이어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가 팬터지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고, 이상균의 ‘하얀 로냐프강’은 여성 독자마저 팬터지로 끌어들였다. 여기에 팬터지 시장을 확고히 다진 것은 이경영의 ‘가즈나이트’였다. 이와 같은 진화를 거치면서 팬터지 소설은 더 이상 문학이 외면할 수 없는 하나의 장르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서울대 김성곤 교수(영문학)는 “오래된 맛의 음미가 중요한 포도주의 시대(순수문학)가 가고, 산뜻한 거품을 중요시하는 ‘맥주의 시대’(팬터지 소설)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세기가 바뀌어도 계속되는 팬터지 소설의 인기를 ‘참을 수 없는 가벼움’만으로 매도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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