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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엔 전문의가 없다

대부분 인턴·레지던트가 ‘말뚝’ 근무… 정부 무관심 속 ‘응급실 적자구조’가 주요인

  • < 최영철 기자 > ftdog@donga.com

응급실엔 전문의가 없다

응급실엔 전문의가 없다
지난 8월23일 새벽 2시, 서울 강북지역 A대학병원 응급실. 오른쪽 팔과 다리의 갑작스런 마비증상을 호소하며 응급실을 찾은 환자의 가족이 수간호사로 보이는 여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전문의를 데리고 와요. 주사도 제대로 못 놓는 인턴들이 뭘 안다고 그래요” (보호자). “아주머니, 인턴 선생님도 엄연한 의사입니다. 이 환자는 인턴 선생님이 봐도 충분한 환자입니다” (간호사).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인턴이 화가 난 듯 “그럼, 마음대로 하시죠” 하며 휑하니 응급실을 나가 버린다. 그러자 난처해진 가족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간호사에게 선처를 호소한다. “아픈 게 죄지, 같은 돈 내고 누구는 전문의에게 치료 받고 누구는 인턴에게 치료 받고….” 간호사가 인턴을 데리러 간 후 가족은 이 병원에 온 걸 후회한다.

그런데 다시 환자에 대한 문진과 검사를 벌이던 인턴이 어디론가 급하게 전화를 건다. 상황이 생각보다 위험했는지 퇴근한 신경외과 전문의를 찾고 있다. 화가 난 환자 가족이 “만약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지냐”며 항의하자 인턴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환자 가족의 소란이 계속되자 한 간호사가 다가와 따끔하게 쏘아붙인다. “지금 이 시간에 전문의가 있는 응급실이 어디 있어요. 무리한 요구를 할수록 환자에게 손해입니다.” 이날 환자와 환자 가족은 응급실에 와서는 절대 불만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새롭게 배웠다.

밤이나 새벽 시간에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 응급실을 찾아본 사람이라면 이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직접 이런 경우를 당해봤을지도 모른다. 응급실에서 일어나는 의료분쟁의 대부분은 응급진료의 적절성, 특히 그 중에서도 해당 전문의가 얼마나 빨리 응급실에 모습을 보였나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응급실에서는 몇 분 안에 행해지는 의사의 판단이 사람의 생명을 좌우하는 관건이 되기 때문에 판단의 주체인 의사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환자측의 병원에 대한 반응은 극명하게 달라진다.

사람들이 응급실에 상주하는 전문의가 없다는 사실에 화를 내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간혹 예외는 있지만, 흔히 접하는 동네의원 의사들의 대부분이 인턴(수련의)과 레지던트(전공의) 과정을 거친 전문의들인 현실에서, 사경을 헤매는 응급 환자와 그 가족이 응급실에서 전문의에게 진료 받기를 원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응급의학 전문의까지 있는 대형 병원들이 밤 시간이 되면 ‘의사 초년병’인 인턴들에게 응급환자의 목숨을 내맡기는 것은 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특히 관련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이런 대형 병원들은 전문의나 3년차 이상 응급의학 관련 전공의를 24시간 배치해야 하는 지역 응급의료센터라는 점에서 환자의 항변은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지난해 7월 개정된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은 응급실의 의료인력 배치와 관련해서는 한없이 관용적이다. 현행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은 기존의 응급실을 △중앙 응급의료센터(국립의료원) △전문 응급의료센터(영동 세브란스 병원) △권역 응급의료센터(권역센터) △지역 응급의료센터(지역센터) △지역 응급의료기관(지역기관) 등 5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모두 337개소에 이르는 정부 지정 응급의료기관 중 법으로 전문의를 24시간 반드시 두게 한 기관은 서울대 병원과 경북대 병원 등 전국 18개 권역센터뿐. 나머지 105개 지역센터는 3년차 이상 레지던트를, 212개 지역기관은 인턴·레지던트에 관계없이 병원 당직의사인 전담의사만 한 명 근무하면 되도록 되어 있다. 결국 법적으로 응급실에 전문의를 24시간 배치해야 하는 병원이 중앙센터와 전문센터를 합해 전국적으로 20여 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권역센터 병원들 중에도 현재 전문의가 24시간 응급실에 상주하는 병원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현대아산 중앙병원과 인천 길병원을 제외하면 전문의가 24시간 응급실에 상주하는 대학병원은 없습니다.” 김홍용 대한응급의학회 이사장(인제대 상계 백병원 응급의학과)은 “각별한 애정이 있는 병원이 아니고는 응급실에 전문의를 상주시키는 병원은 거의 없다”고 증언한다. 사실 중앙병원과 길병원은 전문의를 갖추지 않아도 되는 지역 센터지만 병원 이미지 제고와 환자 유치를 위해 이를 시행하고 있다. 김이사장은 “두 병원은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24시간 상주시키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담당의사는 죽을 지경이다”고 말한다. 그만큼 충분한 응급의학 전문의를 확보하기에 아직 힘든 점이 많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래도 권역센터든 지역센터든 대형 병원 응급실은 인턴이나 레지던트 초년차들이 늘 4명 이상 대기하고 있고, 전문의 콜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어 형편이 조금 나은 편이다. 문제는 인턴 한 명이 응급실을 지키는 중·소병원급의 지역 응급기관들. 이들 중 대부분이 응급기관으로 지정만 받았을 뿐 실제 응급실 기능을 하지 못하는 곳이 더 많다.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 가장 가까운 곳에 이송한다는 응급구조의 원칙은 이런 병원의 인근이라면 오히려 환자의 목숨을 위협하는 원칙이 되기 쉽다. 응급환자의 목숨을 건질 수 있는 마지막 30분(응급 골든타임)을 이 병원, 저 병원 옮겨다니는 데 허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지난 8월23일 새벽 3시 서울 강남지역 B병원 응급실. 병원 인근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은 환자가 긴급히 호송되었다. 사고 가해자는 사고 지점 100m 앞에 응급실을 갖춘 병원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곧바로 이 병원 응급실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이 병원에는 인턴 한 명만이 응급실을 지키고 있었다.

“다른 병원으로 가시죠. 이곳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입니다.” 의식을 잃은 환자의 동공상태를 확인한 의사는 이미 가망이 없다는 듯 다른 병원으로 갈 것을 가해자에게 요구했다. 환자는 다시 앰뷸런스에 실려 인근 C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오전 4시쯤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환자는 이미 심장박동이 멈춘 상태다. 다행히 응급실 점검을 나온 응급의학 전문의가 심폐소생술을 바로 시작했고, 환자의 맥박은 몇 분 만에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 전문의는 당직 레지던트에게 신경외과와 정형외과 전문의의 콜을 지시하고, 레지던트들은 전화기를 향해 뛰었다.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어느 곳에서 사고를 당하느냐, 어느 병원 어느 의사에게 가느냐에 따라 사람 생명이 죽었다, 살았다 하니 말입니다.” 사고 가해자는 응급의학 전문의에게 연신 인사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앞서의 B병원 의사가 이 병원 소속 인턴이 아니라 서울지역 모 대학 병원의 인턴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 병원 원장의 학교 후배로, 일주일에 3일씩 이곳에 아르바이트를 나온다고 했다. 인턴 수련병원이 아닌 이 병원 원장은 야간 당직 전문의를 쓰기 힘들자 모교 대학병원의 응급실 인력을 지원 받고 있는 것이었다.

“불법은 아닙니다. 응급기관은 어쨌든 전담의사만 두면 되니까요.” 이 병원 원장 김모씨는 불법이 아니라면서도 아르바이트 의사를 쓴 사실을 비밀에 부쳐 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렇다면 각 병원들이 응급실의 이런 현실을 모르는 걸까. 사실 대부분의 병원들은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나름대로 응급 의료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각 대학병원과 일부 종합병원에는 200여 명에 가까운 응급의학 전문의들이 활동하고 있고, 응급의학회는 전문인력을 키우기 위해 전공의 정원도 해마다 늘리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응급의료에 대한 무관심과 정책 실패는 이런 병원들의 안간힘에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른 과 전문의가 아니라 미국처럼 응급의학 전문의 6명을 8시간씩 교대 시키며 응급실을 운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응급의료의 공공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환자를 치료하면 적자가 누적되는 구조를 만들어 놓고 정부는 응급실에 대한 투자를 모두 병원의 몫으로 떠넘기고 있습니다”(서길중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장).

대부분의 응급의학 전문의들은 전문의 없는 응급실 운영의 책임은 전적으로 정부에 있다고 비난한다.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병원들이 왜 응급실 인력에 투자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선 지난해와 올 초 4차례에 가까운 보험수가 인상에도 응급의료 수가는 여전히 원가의 50%선에 머무르고 있다. 이마저도 ‘가짜 응급 환자’들이 응급실에 왔을 때 내는 응급실 관리료(3만 원)를 합해야 이 정도가 되고, 수가만으로 계산하면 원가 보전율이 30%선에도 못 미친다. 곧 환자 한 명을 치료하면 치료비의 절반은 병원에서 대신 내주는 셈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 보건복지부는 지난 7월1일 보험재정 적자를 해소한다며 병원 조제료를 없애고 만든 통합진찰료 기준 책정에서 응급의학과를 내과계(가군), 외과계(나군)에 이어 지원계인 다군으로 분류함으로써 진찰료에서도 차등을 두었다. 처방일수가 짧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응급의학계는 “응급처치만 한 후 각 전공과별로 환자를 분산시키는 응급실의 특성상 처방일수가 짧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데, 날마다 수백 명의 환자를 대하는 응급의학과를 지원계로 분류해 진찰료를 깎는 것은 응급의학계를 죽이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한편 국회 보건복지위의 한 관계자는 “복지부가 응급실의 법상 인력기준이나 시설기준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병원에 대한 단속에 나서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고 말한다. 막말로 해준 것이 없는데 어떻게 단속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복지부는 지난해 개정한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상의 각 등급별 응급실 인력기준에 대한 단속을 내년 7월까지 유예해 두고 있다.

“지난해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개정 후 응급실의 상황이 엄청나게 좋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앞으로 차차 문제점을 보완해 나가겠습니다.” 응급의료 정책을 책임진 보건복지부 보건자원정책과의 한 관계자는 “기다려 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하지만 1년 사이에 50% 이상 오른 건강보험료에 ‘열 받은’ 국민에게 과연 더 이상 기다릴 인내심이 있을까. ‘기다리는’ 사이에 또 얼마나 많은 응급환자가 거리를 헤매고 다닐지 걱정된다.





주간동아 2001.09.06 300호 (p46~48)

< 최영철 기자 >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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