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5

2001.08.02

탈리반 극단행동, 벼랑끝 몸부림

오랜 내전, 유엔 경제제재로 국토 폐허 … ‘바미얀 석불’ 파괴는 국제사회 항의 표시

  • < 강경란/ 분쟁지역 전문방송 제작사 FNS PD > fnskorea@yahoo.com

    입력2005-01-13 14: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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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리반 극단행동, 벼랑끝 몸부림
    지난 2월 아프가니스탄 탈리반 정권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불리는 바미얀 석불을 파괴함으로써 전 세계인에게서 반(反)문화적 ‘야만 집단’으로 낙인찍혔다. 서구 언론은 그들이 유엔과 서방 제국(諸國)의 만류에도 석불 폭파를 감행했다는 사실과 초강경 자세로 일관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경직성’과 ‘호전성’을 부각했다.

    하지만 분쟁지역 전문가들은 이런 시각의 보도가 이해 관계국의 이익만을 반영한 것으로 탈리반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앴다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그들은 보도할 때 탈리반의 ‘반론’은 전혀 담지 않은데다 그들의 행위에 대한 설명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탈리반이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까닭과 석불 파괴의 진정한 배경은 무엇인가. 필자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지난 5월18일부터 한 달 동안 수도 카불과 탈리반 정권의 본거지인 칸다하르 등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돌며 정권 수뇌부와 현지 주민의 이야기를 필름과 육성으로 담았다. 그들은 석불 파괴를 비롯한 각종 강경책을 택할 수밖에 없는 책임을 자국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서구 제국과 자신들의 문화방식을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손가락질만 해대는 국제사회로 돌렸다.

    “바미얀 석불 파괴는 아프가니스탄 내부 문제다. 석불은 아프가니스탄의 문화유산이고, 우리가 어떻게 하든 국제사회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 지난 5월25일 탈리반 운동의 탄생지인 ‘칸다하르’에서 만난 탈리반 정권의 외무장관 와킬 아흐마드 무타와킬의 얼굴에는 국제 사회에 대한 원망의 빛이 가득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사진촬영을 금하는 탈리반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외부 세계에 얼굴을 알린 그는 석불 파괴의 근본적인 책임이 서방 선진국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각료들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우리가 바미얀 석불을 파괴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가자 한 서방 외교관이 전화를 해 그럴 경우 세계에 있는 모든 친구를 잃을 것이라 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했고, 우리를 믿어주고 지지하는 진정한 친구가 있는가를 생각해 봤다. 대답은 회의적이었다. 잃을 친구가 없는데 우리가 석불을 파괴하지 못할 까닭도 없지 않은가?”



    2~5세기에 만든 것으로 알려진 바미얀 불교유적지는 55m와 38m 석불상 2개를 중심으로 수많은 동굴사원이 펼쳐진 세계적 유적지. 석불들은 칭기스칸이 얼굴과 팔 부분을 파괴했고,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 대왕이 대포로 다리 부분을 심하게 손상시켰지만 1500년 긴 세월을 살아남은 인류의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지난 96년 카불 점령 후 줄기차게 석불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해 온 탈리반은 지난 2월 결국 이 석불을 폭파했다.

    그들이 말하는 석불 파괴의 이유는 간단하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석불상은 단지 ‘우상숭배’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석불 폭파라는 초강경책을 택할 수밖에 없던 이면에는 탈리반과 갈등을 지속하는 국제관계가 도사리고 있다.

    탈리반 극단행동, 벼랑끝 몸부림
    “국제사회는 바미얀 석불에 깊은 관심을 보였지만 고통 받는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삶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2500만 명 사람의 목숨이 석불보다 못한 존재인가?” 주 칸다하르 파키스탄 영사 알리세르자이씨의 말이다. ‘사람’보다 ‘석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방세계에 대한 분노가 섞여 있다. 그가 말하는 ‘눈길’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탈리반의 주장은 세계 최대의 난민 발생 사태를 빚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미국으로 대변되는 강대국들과 유엔이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22년 간 지속한 아프가니스탄 내전이 국제 대리전의 전형이라는 사실은 국제사회도 부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내전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이미 약 500만 명의 전쟁 난민과 통계 불능의 사상자를 냈다. 현재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년 전부터 가뭄까지 이어진다. 농토는 말라붙었고 우물도 바닥을 드러냈다. 유엔세계식량계획(WFP) 통계에 따르면 현재 100만 t 이상의 식량이 부족하고, 500만 명 이상이 식량 원조를 필요로 한다. 8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살 길을 찾아 대도시 주변으로 몰려들고 40만 명 이상이 파키스탄과 이란 국경을 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주요 당사자인 러시아와 배후 지원세력인 미국의 주장으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지난해 말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경제제재를 결의하자 탈리반의 분노가 폭발한 것. 러시아로서는 회교근본주의 세력이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는 것을 막아야 했고, 미국은 국제적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의 망명처를 제공하는 아프가니스탄에 압력을 가할 필요성이 절실했다.

    아프가니스탄 국민의 고통을 담보로 한 유엔의 경제제재는 빈사상태에 빠진 아프가니스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극약 처방’이었다. 결국 탈리반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극단’밖에 없는 것이었다.

    CNN 아프가니스탄 특파원 카말 하이더씨는 이렇게 털어놓는다. “탈리반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이 시점에서 어떤 반응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바미얀 석불 파괴는 탈리반이 불교도들을 증오해 저지른 일이 아니다. 국제사회의 압력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라 봐야 한다.”

    탈리반의 이런 극단적 행동의 이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역사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진정한 회교국가 건설을 주창하는 회교근본주의 탈리반은 1979년 소련군 침공시 전쟁을 피해 파키스탄으로 피난을 떠난 난민 출신이 대부분이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처참한 실패를 경험했듯 소련은 10년 간의 전쟁 끝에 8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굴욕적인 철수를 했다. 아프가니스탄 국민에겐 이는 ‘승리의 역사’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의 각 정파들은 정치적·민족적 차별성을 극복하지 못한 채 내전상태에 빠졌고 주변국과 강대국들이 이 내전에 개입했다. 각기 다른 나라의 지원을 받는 서로 다른 정파들이 끝없는 살상과 파괴를 계속한 끝에 아프가니스탄은 폐허가 되었다.

    탈리반 운동은 정파간 내전이 극에 달한 바로 그 시점인 지난 94년 조직했다. 이는 미국의 마스트 플랜과 파키스탄의 병참 지원, 사우디아라비아의 재원이 만든 합작품이었다. 그러나 지난 96년 카불 점령 이후 현재까지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대한 파상적인 공격으로 전 국토의 95%를 차지할 수 있는 탈리반 세력의 ‘숨은 힘’은 바로 국민의 지지다.

    필자는 취재 과정에서, 탈리반의 무장군인을 만날 때마다 같은 질문을 하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왜, 무엇을 위해 탈리반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총알이 어디서 날아올지 몰라 마음놓고 외출조차 못한 그 시절, 우리는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탈리반 극단행동, 벼랑끝 몸부림
    탈리반 운동은 시대상황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CNN 특파원의 말은 옳았다. 평범한 농부와 학교 선생으로 살아온 이들은 시대상황 때문에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파키스탄 난민촌에서 살던 이들이 서방이 제공한 총과 함께 이슬람근본주의 이념을 아프가니스탄으로 가져갔고, 이것이 탈리반 운동의 시작이었다.

    탈리반은 총은 들었지만 테러리스트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슬람의 모든 것을 근본주의라 몰아붙이는 것은 제국주의자의 시나리오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치고 근본주의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탈리반의 제1인자 물라 무함마드 오마르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도자를 배출한 ‘아코라 카탁’ 마드라사(회교기숙학교)의 교장 물라나 사미 울 하크씨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테러리즘을 가르치지 않으며 이 학교 출신의 탈리반 역시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제국주의자들이 망친 우리의 종교와 전통을 부활하려고 할 뿐이다.”

    파키스탄 북서부 국경지대에 있는 ‘아코라 카탁’ 마드라사는 ‘탈리반 생산공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곳. 현재 재학생 4000여 명에 올해 졸업 예정자만 약 600여 명에 달한다. 대강당에 모여 코란과 관련한 강의를 듣는 이들에게 필자가 물었다. “졸업 후 계획은”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참전할 것이다” “왜” “그것이 우리의 의무니까.” 그들은 ‘탈리반’이란 말도 이슬람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학생들이란 뜻이라 했다. 하지만 탈리반 정권이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배경에는 내부 민심의 이반현상도 한몫한다. 탈리반이 정권을 잡으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실시한 ‘이슬람 샤리아’법이 민심의 이탈을 가져오기 시작한 것.

    여성의 사회활동과 교육을 금지하고 영화나 음악을 보고 듣는 것도 처벌 대상으로 삼는 반인권적 법이 그것이다. 이런 반동적인 탈리반 정책은 국제 사회의 비난에 직면했고, 최근의 국제정치환경이그들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켰다. 가뭄 등 내부에서 증폭하는 사회적 위기와 강압적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민심, 그리고 국제사회의 압력이 탈리반 지도부의 ‘탈출구’를 막아버린 셈이다.

    CNN 특파원 카말 하이더씨는 “탈리반 정권 내부에도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며 “현재는 종교경찰로 대표하는 강경파들이 득세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실 탈리반 지도부를 구성하는 주류는 30대 소장파들이다. 탈리반 운동의 창시자이자 제1인자인 물라 오마르가 40대 초반으로 알려져 있고 제2인자 무타와킬 외무장관은 30대 중반, 최근 미국 대사에 임명되어 화제의 초점이 되는 하시미는 겨우 25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압력이 강해지면서 종교경찰 같은 강경파의 입김이 더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들 간에는 미묘한 갈등 양상이 벌어진다. 얼마 전 종교경찰은 시크교도들에게 노란색 표지를 달게 한 복장정책을 발표했으나 무타와킬 외무장관이 “우리는 확실한 정책을 정한 바 없다”고 반박하고 나섰다. 그러자 종교경찰은 이에 맞서 곧바로 시크교도에 대한 복장 규제를 몇 번씩 언론에 재확인하고 나서 이들 간 갈등이 표면화했다.

    “30대 소장파들이 제 주장을 펼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힘을 실어줘야 합니다. 비판과 경제제재로 몰아붙여서는 강경파가 득세할 뿐입니다.” 아프가니스탄 내부 정치에 정통한 한 파키스탄 정치가는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비교적 유연하게 대처해 온 30대 파워 엘리트들이 얼마만큼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또 국제사회가 어느 수준에서 이들과 타협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아프가니스탄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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