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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옌볜 조선족들 “잘 살아보세”

속초~자루비노~훈춘 연결 1년 … 무역·관광 등 활성화 경제도약 ‘부푼 꿈’

  • < 옌볜=허만섭 기자 > mshue@donga.com

중국 옌볜 조선족들 “잘 살아보세”

중국 옌볜 조선족들 “잘 살아보세”
중국 지린성 두만강 연안의 조선족 자치주. 흔히 ‘옌볜’으로 알려진 이곳은 훈춘시, 옌지시, 투먼시, 룽징시, 둔화시, 허룽시, 안도현, 왕청현 등 8개 시·현으로 이뤄졌다. 조선족 자치주는 면적(4만3000km2)이 남한의 절반에 이르며 100만~200만 명(전체 자치주 인구의 절반)의 조선족이 거주한다. 자치주장·시장 등 최고 공직은 반드시 조선족이 차지하는 등 해외 거주 500만 한민족 중 유일하게 정치·경제·언어적 자치권을 보장 받으며 공동체를 구성한 곳이다.

중국 두만강 유역과 한국 속초를 잇는 항로가 개통된 지 1년여가 넘은 지금 조선족 자치주의 한민족들은 이 항로에 경제개발의 꿈을 실으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7월19일 러시아-북한과 맞닿은 국경도시 훈춘. 공사를 하다 중단한 호텔·별장·산업공단이 몇년째 방치되어 있었다. 1990년대 초 UN의 지원을 받아 이 도시를 국제 산업단지로 탈바꿈하려는 거창한 경제개발계획을 진행하다 돌연 중단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조선족에게 큰 좌절감을 안겼다. 훈춘시 한 공무원은 “문제는 역시 바다였다”고 말했다. 중국의 동쪽 국경에 닿아 있는 조선족 자치주는 러시아-북한에 막혀 바다로 나가는 길이 차단되었는데 이 공무원은 이런 지리적 여건을 자치주의 발전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로 본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국과 중국은 황해를 사이에 두고 교역해 왔다. 지금도 한국 수도권과 중국을 잇는 뱃길은 단둥·다롄·톈진·웨이하이·칭다오·상하이 등 중국 황해 연안 도시에 치우쳐 있다. 조선족 자치주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압록강 하구 단둥도 육로로 무려 1000km 이상 떨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조선족 개개인의 한국 진출은 가능했지만 도시 대 도시간 국제무역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인접한 연해주의 러시아 도시들은 너무 가난해 교역에 뚜렷한 한계를 드러냈다. 조선족 자치주는 중국의 현대화 과정에서 외부세계에 고립한 ‘대륙의 섬’으로 존재해 온 셈이었다. 조선족 최하송씨는 “젊은 조선족들이 베이징으로, 상하이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면서 자치주에서 노령화 현상이 진행하는 것도 이런 지리적 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중국 옌볜 조선족들 “잘 살아보세”
지난해 5월 동해를 가로질러 한국 속초와 러시아 연해주 자루비노항을 뱃길로 잇고 자루비노에서 국경을 지나 훈춘까지 버스로 연결하는 ‘백두산항로’가 개통된 것은 조선족 자치주로선 ‘희망의 빛’으로 받아들일 만한 사건이었다. 항로가 열리던 날 훈춘시에선 20만 시민이 모두 거리로 뛰쳐 나와 밤늦게까지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1년여가 지난 지금 이 항로는 조선족 공동체를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항로 개통 후 조선족들은 또 한번 장밋빛 기대를 접어야 했다. 가장 큰 원인은 러시아 쪽에 있었다. 러시아가 러시아 영토를 버스로 통과하는 한국인에겐 4만 원의 비자 발급료를 받는 대신 중국인에게는 뱃삯과 비슷한 20여 만 원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 때문에 대다수 조선족은 항로 이용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과의 교역을 위한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냈다.

지난 7월20일 오전 러시아-중국 국경선에 있는 훈춘시 장령자세관. 그곳은 ‘찌이익~찍’ 소리를 내며 접착 테이프로 한국에 보낼 물건을 꽁꽁 동여매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인 또는 한국 국적을 취득한 조선족이었다. 조선족 자치주 내 8개 시·현의 상인과 농부들은 자신의 생산물을 세관에서 한국 국적자에게 맡겨 한국으로 보내고 다시 이들이 들고 오는 상품을 받아 중국에 되팔았다. 승객 한 사람당 60kg의 물품을 한국에 반입할 수 있다. 이곳에서 만난 한국의 한 대학생은 “배를 타고 속초와 훈춘을 오가면서 전문적으로 짐을 나르고 운송비를 받는 사람이 있다. 나도 아르바이트로 이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이 운반하는 상품은 대부분 농산물이다. 자치주의 주산물인 고추의 경우 한-중간 가격차로 인해 상인들은 구입가의 몇 배에 이르는 이익을 보고 있다. 옌지시에 위치한 조선족 자치주 김석인 부주장은 “러시아측 비자 발급료를 낮추는 것이 자치주의 최대 현안 중 하나가 되었다”고 말했다.

현재 옌볜 지역엔 쌍방울 등 일부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다. 인구 39만 명인 옌지시의 중심가는 서울 동대문 시장을 연상시킨다. 한국 상품만 전문적으로 파는 거대한 쇼핑센터들이 들어섰고, 한국 브랜드를 알리는 간판이 즐비하다. 한국 위성TV 방송을 시청하는 가정도 크게 늘었다. 한 상인은 “동대문 시장에서 옷을 공급 받는 상점도 있다. 의류·가요 등 유행에서 서울과의 시차를 거의 느낄 수 없다”고 말했다. 항로를 운영하는 ㈜동춘항운 서병구 부장은 “이 도시에 넘치는 한국 상품도 거의 대부분 배가 실어 나른 것이다”고 말했다. 1주일에 2~3회 동춘항운 배가 들어올 때마다 한국제 상품을 40t 컨테이너 박스에 가득 담아 옌볜 지역에 뿌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측은 중국의 높은 무역장벽에 여전히 불만을 나타냈다. 한 한국 무역상은 “한국에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일부 공산품에 대해 중국측이 통관을 불허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난해 마늘파동 이후 이러한 현상이 심해진 듯하다”고 말했다.

백두산항로의 또 다른 수혜자는 연해주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다. 미국의 쿼터 제한조치를 피하고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20여 개 한국 봉제 기업들이 연해주에서 상품을 만든 뒤 그것을 한국의 항구로 옮겼다가 미국에 수출하고 있다. 이곳 기업들을 대표하는 이용문씨는 “한국 동·남해안과 연해주를 잇는 항로가 상품수송에 결정적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중국 옌볜 조선족들 “잘 살아보세”
그러나 최근 조사에 따르면 고추는 중국산에서 한국산으로 둔갑하는 상품 중 세 번째로 양이 많은 품목으로 나타났다. 속초시와 한국 내 소비·생산의 중심지인 수도권 사이에 미시령 산맥이 가로막아 대형 화물 수송차량의 통행도 제약 받는다. 동춘항운측은 여객터미널 건설에 54억 원을 투입하면서 자금난을 맞아 현재 서울지법의 법정관리에 들어간 상태다. 여기에 관련 3국이 내건 각종 제약으로 무역상과 관광객은 개항 초기보다 오히려 줄었다. 이런 것들은 백두산항로가 현재 안고 있는 부정적 측면들이다. 그러나 김창준 훈춘 시장은 “궁극적으로 백두산항로는 조선족 자치주와 한국 모두에 이익이 되므로 반드시 계속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항로를 좀더 활성화한다면 특히 조선족 자치주의 경제발전에 매우 유리하다는 것을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

조선족들은 지금 동해 바다로 달려 나가고 싶어 몸이 달았다. 훈춘시의 대외교류를 총괄하는 박현기 비서장은 이를 “조선족들이 만주 이주사의 오랜 불행에서 깨어나는 순간이다”고 표현했다. 그는 결국 북한 나진 경제특구에 배가 취항할 것이라는 예상도 했다. 속초시 역시 지린성과 결연하는 한편 백두산항로를 지원하는 전담부서를 두는 등 열의를 보이고 있다. 속초시 관계자는 “환경문제를 해결하면서 미시령을 직선구간으로 통과하는 터널공사를 수년 내 완료하면 한국 수도권과 조선족 자치주를 오가는 물동량이 비약적으로 늘 것이다”고 내다봤다. 백두산항로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와 연계해 있다. 동춘항운 윤병헌 이사는 국내 기업들에게 “백두산항로를 이용한 수익사업을 발굴하는 데 적극성을 보여 달라”고 주문했다.

전문가들은 백두산항로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개발이 더딘 만주 두만강 유역, 연해주, 북한 최북단, 한국 강원도를 ‘환동해 신경제권’으로 묶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 지역에 폭 넓게 분포하면서 정치·경제 세력권을 형성한 한민족이 매개수단이 될 수 있다. 개항 1년이 지난 지금 이미 이러한 조짐은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석인 조선자치주 부주장은 “이 항로는 특정국가가 상대국가에 시혜적으로 베푸는 ‘퍼주기 사업’이 아닌 윈-윈 교류의 성격이 강하다”고 말했다. 항로 활성화의 여건은 성숙했다. 남은 것은 중국·러시아·한국 정부와 기업들이 얼마나 의지를 보이는지에 달린 셈이다.

훈춘의 호텔 기업가인 조선족 주룡길씨는 “조선족 자치주는 간신히 한국과 연결하는 뱃길을 텄다. 조선족들이 그 길을 통해 내미는 손을 한국이 마다할 이유가 있는가”고 반문했다.







주간동아 2001.08.02 295호 (p30~32)

< 옌볜=허만섭 기자 > mshu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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