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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커지는 영화계 여성 파워

“은막의 반은 우리 것”

  • < 신을진 기자 happyend@donga.com > 사진제공·도서출판 소도

“은막의 반은 우리 것”

“은막의 반은 우리 것”
박남옥은 자기는 영화와 결혼했기 때문에 절대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언성을 높이곤 했다. 어느 날은 광복동 거리에 나가 아스팔트 위에 벌렁 누워 팔을 크게 벌리고 두 발도 그렇게 했다. 나 또한 옆에 그 모양으로 누웠다. 지나는 사람마다 이 진기한 풍경에 킥킥거렸다. 오직 영화밖에 모르는, 오직 영화에 관한 얘기라면, 그리고 나처럼 영화지망생을 만나면 술 값은 항상 그녀의 몫이었다. 사내 같은 그녀는 보기 드문 술고래였다.’

원로 영화감독 유현목씨는 한 영화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 후 결혼을 한 박감독은 젖먹이 딸을 업고 현장에 나와 ‘레디 고’를 외쳤는데, 그래서 감독의 등은 아기의 콧물과 침 자국으로 언제나 번지르르했다고 유씨는 회상했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면, 이 땅에서 여자가 영화를 한다는 건 어쩌면 몇 배 더 힘든 일일 것이다. 날밤을 새는 촬영현장, 큰 소리로 배우와 스태프들을 진두지휘하면서 영화를 이끌어 가는 감독과, 영화의 성패를 책임지는 제작자의 모습을 떠올릴 때 대부분은 남성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은막의 반은 우리 것”
그러나 요즘 국내외에서 여성 감독의 영화를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그래서 지구촌 전역의 여성 감독이 제작한 영화를 상영하는 여성영화제(4월15∼22일)도 서울에서 열린다. 영화제 프로그래머 남인영씨는 “앞으론 여성영화제가 주목받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는 역설적인(?) 말을 했다. 남녀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라져 서로 평등하게 공존한다면 여성 영화제를 개최하지 않아도 되리란 뜻이다. 영화는 오랫동안 남성의 것이었고, 때문에 아직도 여성이 만들면 화제가 되고, 여성 영화제도 열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화 역사에서 여성들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 왔을까. 비록 수적으로는 미미하지만, 여성 영화인들은 그 역할에서 초창기부터 남성 못지 않은 활발한 활동을 보여왔고, 영화현장에는 언제나 수많은 여성 인력들이 존재했다. 초창기 여배우로 배우협회장을 지낸 복혜숙씨나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인 박남옥씨, 여배우이자 감독으로 활약한 최은희씨 등은 비교적 그 활약상이 잘 알려진 경우. 60, 70년대에도 홍은원 황혜미 등으로 여성 감독의 명맥은 이어졌고 , 애니메이터 고금지, 국립영화제작소에서 활약한 여성 촬영기사 김문자, 농구스타 출신으로 세경영화사를 이끌었던 영화제작자 김화식, 배우 출신 전문 스크랩터 노윤화, 영화제작자 이월금, 여성 액션배우로 인기를 끌었던 임은주 등 생소한 이름의 여성 영화인들이 전후 척박한 한국영화의 현장에서 맹렬하게 활동해 왔다.



“은막의 반은 우리 것”
1980년대 민주화 바람을 거치고 90년대 기획영화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여성 영화인력은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이때부터 여성 영화인들은 변방에서 벗어나 영화 환경을 만들어 가는 제작 주체로서 분명한 자리매김을 시작했다.

‘본명선언’ 등 다큐멘터리 영화를 지속적으로 만들고 있는 서울영상집단의 홍형숙 감독과 ‘낮은 목소리’ 연작을 발표해 온 변영주 감독이 독립영화 진영에서 값진 성과를 일궈냈다면, 상업영화의 기획과 제작에서도 여성들의 자리가 확고해졌다. 여성 촬영감독이 등장하고, 임순례 이정향 감독이 유명 영화감독 대열에 올랐으며, 흥행에 성공한 상업영화들 이면에 유능한 여성 제작자 및 프로듀서가 있게 되었다. 단편영화 쪽의 수많은 여성인력들까지 헤아려보면 가까운 미래에 여성 영화인들의 활약은 엄청난 폭발력을 가질 것으로 기대된다.

‘세친구’의 임순례 감독은 “감독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감성과 창의력을 꼽게 되고, 영화 촬영일정이나 촬영방식도 합리화하여 여성들이 활동하기에 좋아졌다”고 말한다. 권위적인 도제식 제작 시스템을 해체하고, 스태프들 하나하나가 계약해서 팀을 이루는 게 요즘 영화제작 방식이다 보니 여성들의 참여가 예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진 것이 사실.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개인의 재능이 제일 큰 요건”이라고 말한다.

아직 기획-홍보-마케팅 쪽에 인력이 쏠려 있긴 하지만 제작과 감독 쪽에 적잖은 인력이 진출해 있고, 분장과 미술 등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많은 분야뿐 아니라 조명-촬영 등 현장작업이 필수인 분야에서 활동하는 여성들도 늘고 있다. 그러나 수십억원의 돈이 왔다갔다하는 영화판에서 제작자들이 여성 감독을 회피하는 경향은 아직 여전한 듯하다.

‘미술관 옆 동물원’의 박정향 감독은 “아직도 충무로에서는 100% 능력의 여성보다 80% 능력의 남성이 더 인정받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다. 충무로에 여성 감독이 적은 이유는 능력이 떨어져서라기보다 조감독에서 감독으로 들어서는 과정에서 다수가 탈락하기 때문이라는 것. 이런 이유로 ‘남성 영화인 모임’은 없지만 ‘여성 영화인 모임’은 결성되어 있다.

작년 4월 결성한 여성 영화인 모임에는 영화 제작, 연출, 배급, 홍보, 영화제, 평론계 등 각 분야에서 활동중인 여성 영화인 300여 명이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회장을 맡고 있는 채윤희씨(올댓시네마 대표)는 “내가 처음 영화계에 입문했을 때만 해도 홍일점이라서 주목을 받았는데, 지금은 여성 영화인력이 500여 명에 이른다. 남부럽지 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발휘할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한 채 영화계를 떠나는 여성 영화인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고 말한다.

본인의 능력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야 했던 과거의 시간들을 뛰어넘어 영화현장에서 자신의 자리를 일구어가는 여성 영화인들. 이들이야말로 세계 영화계를 향해 발돋움을 시작한 한국영화의 큰 희망의 일부분이다.



주간동아 2001.04.17 280호 (p84~85)

< 신을진 기자 happyend@donga.com > 사진제공·도서출판 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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