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자필원고가 프루스트 사후 곧 공개되어 많은 연구가들을 흥분시킨 반면, ‘밤의 끝으로의 여행’의 원고는 1943년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가 2000년 말에야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오는 4월19일 경매를 기다리고 있는 이 원고의 드라마틱한 행적을 연대순으로 정리해 보자.
1929~31년. 파리 근교 클리시의 이름 없는 의사 루이 페르디낭 오귀스트 데투쉬(필명 루이 페르디낭 셀린)는 셰익스피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필적하는 작품을 목표로 소설 초고를 손으로 쓴다. 다시 타이핑된 이 작품은 앙드레 말로의 NRF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후 드노엘이라는 무명 출판사에 넘겨진다. 셀린의 데뷔작이 되는 이 소설은 1932년 10월 출간되어 충격적인 문체와 잔혹한 사회묘사로 인해 문학계에 격렬한 논쟁을 유발하고, 그해 12월 공쿠르상 후보에 오르지만 수상을 놓침으로써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1999년. 셀린의 두 번째 소설 ‘외상죽음’의 원고를 발견하여 1986년과 1999년에 경매에 붙인 경력이 있는 저명한 고서적상 피에르 베레스의 집. 그는 한 무명의 영국인에게 연락을 받는다. 이 신비한 영국인 수집가의 신원에 대해서는 본인의 요청으로 비밀에 붙였지만, 그가 가져온 원고는 실종됐다던 ‘밤의 끝으로의 여행’임이 틀림없었다. 감격한 베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보석’을 발굴한 것은 내 생애 최대의 사건입니다. 요즘 작가들은 디스켓에만 작업을 합니다. 이 대단한 원고는 디지털 세상에 대한 하나의 경종인 셈이죠.”
2001년 4월. 가죽상자에 담긴, 공용 종이나 보건소 종이 위에 써진 876매의 원고. 푸른 잉크와 검은 잉크로 긋고, 고치고, 퇴고한 자국이 가득하다. 뒷장에는 희미하게 의학용어도 쓰여 있다. 표지에는 셀린이 이렇게 써놓았다. “밤의 끝으로의 여행. 유일한 원고. L.F. 셀린. 르픽가 98번지.” 이 ‘유일한 원고’라는 문구 때문에 2001년 4월19일 피아자 경매회사 주최의 경매장은 불을 뿜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예상 낙찰 가격이 400만에서 500만프랑(약 9억원)이지만, 워낙 중요한 작품이라 기록이 깨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 원고를 가장 탐내는 쪽은 국립도서관을 앞세운 프랑스 정부. 현재 국립도서관이 보유한 셀린의 원고는 41년 작품인 ‘아름다운 시트’뿐이다.
파리 제7대학의 셀린 전문가 앙리 고다르 교수는 부분적으로 알려진 초고를 검토한 결과 초고에서 서술자 ‘나’는 결정판처럼 주인공 ‘바르다뮈’가 아니라 그의 대화 상대방 아르튀르로 되어 있다고 밝혔다. 무정부주의자 바르다뮈가 없는, 또는 외부적으로 관찰된 바르다뮈만 존재하는 ‘밤의 끝으로의 여행’은 과연 어떤 작품이 될 것인가? 프랑스 비평에서는 원고를 대상으로 발생기 작품의 창조과정을 연구하는 ‘생성비평’이 유행인 만큼, 셀린의 되찾은 원고는 많은 문학 애호가에게 금세기 들어 최대의 사건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주간동아 280호 (p64~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