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0

2001.02.08

혁명보다 더 소중한 ‘부부 愛’

비전향 장기수 권낙기`-`노동운동가 이옥순씨, 북송 거부하고 폐암 아내 간호

  • 입력2005-03-16 14: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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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보다 더 소중한 ‘부부 愛’
    통일혁명당사건에 연루돼 1972년부터 1989년까지 18년을 복역한 비전향장기수 권낙기씨(54). 지난해 9월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송될 때 그는 서울에 남았다. ‘혁명’보다 더 소중한 아내를 두고 떠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 이옥순씨(47)는 지금 폐암 말기다. 1월18일 오후 기자가 자택을 찾았을 때 권씨는 아내의 앙상한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권씨 부부는 이날 영화 ‘박하사탕’과도 같았던 자신들의 10년 결혼생활을 조용히 정리했다.

    이옥순씨는 섬유공장 여공 출신으로, 서노련의장 권한대행을 지낸 ‘골수 노동운동가’였다. 90년 수배중이던 그녀는 비전향장기수를 위한 후원기관인 서울 구로동 ‘만남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권씨는 거기서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네번째 만난 날 권씨는 그녀에게 청혼했다. 91년 3월1일 결혼식에서 비전향장기수 신랑과 노동운동가 신부가 다짐한 약속은 참으로 소박했다. “10년 안에 아담한 집을 마련합시다. 그래서 우리도 평범한 사람처럼 행복한 가정을 꾸려봅시다.”

    한약재 도매업에 뛰어든 권씨는 98년 서울 은평구의 단독주택을 구입했다. 7.5평 쪽방에서 맨주먹으로 시작한 지 8년 만이었다. 이씨는 두 딸을 기르며 권씨를 조용히 내조해 왔다. 권씨 부부는 고령의 비전향장기수들을 돕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비전향장기수들은 이씨를 “우리 며느리”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들의 단란한 삶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네번째 만나 청혼… “행복 지켜야죠”



    혁명보다 더 소중한 ‘부부 愛’
    지난해 3월 이씨는 기침증세로 병원을 찾았다가 폐암말기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퇴원을 권하며 “6개월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9월 권씨에게 북송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는 병상의 아내에게 “북으로 가는 그들이 그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자신의 쾌유를 기원하는 사람들이 보냈다는 선물들을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나는 암과 함께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을 함께 받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 권씨 부부에게 찾아온 두번째 변화였다.

    지난해 7월8일 권씨가 아내의 회복을 바라는 뜻에서 마련한 모임엔 1000여명의 사회단체 인사들이 참석했다. 노동운동을 하며 이씨와 동고동락했던 김문수 한나라당 의원,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유시민씨, 단병호 민주노총의장 등 수많은 인사들이 이씨를 만나기 위해 달려왔다. 전국연합, 인천연합은 매일 2명의 회원을 이씨에게 보내 그녀를 간병토록 했다.

    지난해 9월9일 이씨는 북한측의 초청을 받아 방북했다. 평양에 있던 비전향장기수들이 모두 나와 그녀와 재회했다. 북송 직전 치료비에 보태라며 남한에서 모은 돈을 권씨 부부에게 주고 간 그들이었다. 북한당국은 서울로 돌아가는 그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줬다. 1년 동안 복용할 수 있는 ‘장명’ ‘경옥고’라는 약이었다. 버섯, 인삼, 꿀 등으로 만든 북한의 유명한 전통 암치료제라고 한다. 돌아오는 길, 이씨는 전국농민회 경남도연맹 간부 김모씨가 암투병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이 약을 뚝 떼 주었다.

    암 선고 후 6개월이 훨씬 지난 요즘, 아내가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에 권낙기씨는 크게 고무돼 있었다. 그는 아내의 목소리와 눈빛이 점점 더 맑아지고 있다며 아내와 함께 웃어 보였다.

    그러나 권씨가 잠시 방을 비운 사이 이씨는 3시간 동안의 인터뷰 내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어떻게 얻은 행복인데… 투옥, 고문, 도피, 지독한 가난으로 점철된 우리 두 사람의 40년 세월이 너무 한스러워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나를 지켜주는 남편, 세상이 너무 고맙습니다. 그들 곁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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