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0

2000.11.23

진하고 단맛 도는 자주색 와인

  • 허시명

    입력2005-05-31 10: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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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하고 단맛 도는 자주색 와인
    전국에 농민이나 농민 단체가 운영하는 술도가가 70개가 넘는다. 직접 재배한 과일, 약초, 채소, 곡물 따위를 원료로 하는데 그 중에서 포도로 술을 빚는 곳으로 경상북도 경산시에 경상포도조합이 있다. 국산 와인, 곧 국산 포도주를 맛보려고 조합에 전화했더니 결번이라는 응답만이 돌아왔다. 경산시청 농축산과에 문의했더니, ”제품은 좋았는데 값싼 수입 포도주에 밀려서” 휴업중이라고 했다. 우리 밀의 운명을 닮아 있어서, 허전하고 안쓰러웠다. 포도는 흔하지만, 우리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기가 쉽지 않은 형편인가 보다.

    포도주라면 프랑스가 떠오르지만, 포도주의 역사는 픙랑스의 역사는 물론이거니와 인류 역사보다도 훨씬 앞서 있다. 포도주는 언제 어떻게 생겼을까. 이 물음은 술은 언제 생겼을까로 대체해도 무방하다.

    저절로 술이 되는 대표적인 과일이 포도다. 포도 껍질에 미생물이 있어서, 이 미생물들이 포도당인 포도과즙을 먹고 알코올을 생성한다. 우리나라에 과수용 포도가 대량으로 들어온 것은 20세기 초 개화기였는데, 그 이전에는 포도보다는 머루가 더 흔한 품종이었다. 고로 우리나라 포도주의 전통은 머루주에서 찾아야 한다.

    고려가요 ‘청산별곡‘에서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고 노래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머루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자생하고 있는 품종이다. 현재 머루 재배 농가는 1000가구가 넘는데, 경상남도 산청과 하영, 경상북도 봉화와 영양, 전라북도 무주, 강원도 평창, 경기도 파주 등지에서 집단재배되고 있다.

    이번주 우리가 찾아갈 곳은 경기도 파주,감악산의 북쪽 산기슭에 있는 머루 재배 농가다. 자유로를 타고 임진각 방향으로 가다가 문산 나들목에서 빠져, 문산 읍내로 들어가지 않고 임진강 방향으로 새로 뚫린 길을 따라 가다보면 군데군데 머루주 농장으로 길 안내하는 팻말이 보인다. 율곡 이이의 고향 마을인 율곡리의 화석정을 지나고, 파평 윤씨의 종산인 파평산을 오른쪽에 두고 우계 성흔의 파산서원을 왼쪽에 두고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산 하나를 넘으면 적성면 소재지가 나온다. 이곳에서 전곡쪽으로 5km쯤 가다보면 적성면 객현리가 나온다. 마을 맨 안쪽으로 들어서면 산머루 농원(031-958-4558)이 있는데, 서우석씨는 그곳에서 20년 넘게 머루를 재배하고 있다.



    서씨는 경기도 장호원에 살면서 뽕나무를 심었다가 실패하고, 흑염소를 기르기 위해 70년대 말 감악산 아래로 옮겨왔다. 그러다가 뽕나무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다시 심어볼까 하고 묘목을 신청하러 농촌지도소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머루 묘목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묘목을 공급하는 이는 농민대학에서 강연을 들어 알고 있던 김홍집씨라고 했다. 남양주에 사는 김홍집씨는 보리와 콩 다수확왕을 차지한 농민이었다. 왜 소득이 낮은 보리와 콩을 재배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국가가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것이 애국이다. 식량이 부족하니 보리 콩을 연구하게 되었다. 총칼 든 사람만이 애국하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그말이 서우석씨의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틀림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고, 이웃 사람들에게도 함께 머루를 심어보자고 권하고 15000평 땅에 1500그루를 심었다. 이웃 사람들은 토박이가 아닌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혹시 묘목 장사꾼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래서 혼자서 시작했다.

    그런데 3년째 되던 1983년에 영하 29도까지 내려가는 흑한이 닥쳤다. 깡그리 얼어죽고 겨우 다섯 그루가 남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 보라며 힐난했다. 그는 오기가 생겼다. 남은 다섯 그루에서 가지치기를 해서 묘목을 늘려갔다. 지금은 8000평에 8000주가 자라고 있다. 수입이 쏠쏠한 것을 보고서 주민들도 묘목을 심기 시작하여 32농가에서 재배 면적도 6만평이 되었다. 그 농가들에서 수확된 머루를 서씨의 산머루농원에서 머루즙으로 가공하고 머루주를 담고 있다.

    진하고 단맛 도는 자주색 와인
    머루는 세계적으로 재배 지역이 제한되어 있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 많이 재배되는데 그중에서 한국 품종이 우월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서우석씨는 서두르지 않는다. 머루 생산량의 30%를 술로 빚는다. 머루즙 판매로 일정한 수익을 올릴 수 있으나 제맛이 나기를 기다려 술을 내놓을 여유가 있다. 지금 나오는 술들은 97년에 담근 것이다. 3년은 채우고 시장에 내놓으려고 한다.

    그는 5년 10년 된 술, 더 나아가 50년 100년 된 술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동료 농민들이 ”당신이 몇 살인데 50년 뒤에 내놓자고 하냐”고 반문한다. 그는 ”내 대에서 소득을 보자는 게 아니다. 포도주 종주국과 경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설득한다. 물론 오래 묵혔다고 좋은 와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장인정신을 지녀야만 빛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을 서씨는 우직하게 품고 있다.

    머루주를 담그는 방법은 적포도주를 담그는 요령과 똑같다. 우선 머루를 잘 씻어서 줄기에서 머루알을 떼어내고 통에 담아 으깬다. 발효를 촉진시키는 효모를 넣고 15일 가량 발효시킨다. 압착하여 껍질과 씨를 제거하고 아황산가스를 넣어 살균한다. 모든 포도주에는 아황산가스가 들어가는데, 부패와 산화를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몸에 해로운 성분이기에 통상 1l 당 350mg 이하로 제한하고 있다. 그리고 그해 수확되는 머루의 당도에 따라 당을 첨가하기도 하는데 24브릭스(Brix·당의 농도를 나타내는 단위)는 되어야 12도 알코올을 낼 수 있다. 2차 발효시킨 뒤에 정제하여 오지 항아리에 옮겨 숙성시킨다.

    프랑스에서도 요즘은 스테인리스통에서 숙성시키는 게 흔하지만, 서우석씨는 정통 포도주처럼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장식용이 아니고서는 구하기가 어렵고, 수입하려 해도 한 컨테이너분을 들여와야 하는데 그 양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오지 항아리였다. 우리 항아리는 세계가 알아주는 발효 식품인 김치와 된장, 그리고 고추장을 숙성시키는 용기다. 그 항아리에서 술을 숙성시키면 오크통에서 발효한 것 못지않은 술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서씨는 중요 무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된, 전남 보성에서 9대째 옹기를 굽고 있는 이학수씨가 제작한 오지 항아리를 쓰고 있다.

    서씨가 만든 감악산 머루주는 자주색을 띠는데, 진하면서 단맛이 돈다.우리 와인 소비자들은 시고 텁텁한 맛보다는 단맛에 익숙한지라, 그 취향을 좇은 것이라고 한다. 술은 12도여서 노인이든 여자든 부담없이 마실 수 있다. 하지만 물량 공세를 펴는 외국산 포도주에 견주면 가격은 비쌀 수 밖에 없다. 700ml 한병에 소비자 가격이 3만 5000원 한다. 연말에는 45도 머루주 브랜디도 생산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기대가 된다.

    감악산 머루주 제조장에서는 농원을 함께 운영하고 있어서 직접 찾아가 술맛을 볼 수 있다. 돌아오는 길에는 임진강 가에 있는 신라 마지막 왕의 능인 경순왕릉을 비롯, 고려 임금과 충신들의 제사를 지내는 숭의전을 둘러보면서 늦가을 임진강의 정취에 취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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