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5

2000.10.19

어디에 얼마나 썼나?… 안기부 예비비

기조실장-부장-대통령만 파악…배보다 배꼽이 더 큰 씀씀이로 의혹 증폭

  • 입력2005-06-27 1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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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에 얼마나 썼나?… 안기부 예비비
    최근 ‘동아일보’가 96년 15대 총선 전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자금의 신한국당 유입 의혹을 제기한 것을 계기로 국정원 예산에 세인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도대체 예비비를 포함한 국정원 예산 총액은 얼마인지, 국회는 국정원 예산을 어떻게 심의하기에 총액 규모마저 모르는지, 과연 수백억원이나 되는 거액을 선거자금으로 전용할 수 있는 것인지 등이다.

    실제로 국정원 예산은 그 전신인 안기부와 중앙정보부 시절에도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 비근한 예로 지난 98년 1월 대통령직인수위(이종찬 위원장)에 대한 안기부의 업무보고에서도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은 “안기부의 조직`-`인력`-`예산은 보안사항이므로 보고할 수 없다”고 거부하는 바람에 파란을 겪었을 정도다. 당시 안기부는 서울시 내곡동 청사에서 진행된 업무보고에서 지난 5년간의 활동 실적과 대공 첩보수집 활동 실적, 고정간첩 검거 실적, 북한정보 수집활동 등을 보고했으나, 조직-인력-예산을 보고하라는 인수위 통일-외교-안보 분과위원회 요구는 ‘국가 보안사항’이란 이유로 거부했다. 그러자 분과위원들이 인수위 활동 중단으로 맞섬으로써 진통을 겪자 김대중 대통령당선자가 업무보고 창구를 이종찬 인수위원장으로 일원화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결국 안기부는 조직-인력-예산에 대해서는 이종찬 인수위원장을 통해 김대중당선자에게만 보고하는 원칙을 지켜냈다. 이처럼 50년 만의 여야 정권교체라는 ‘혁명적 상황’에서도 안기부가 ‘꿀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조직`-`인력`-`예산을 공개하지 않는 엄격한 내부규정 때문이다. 따라서 적어도 문서로 안기부의 조직`-`인력`-`예산을 파악하고 있는 인사는 기조실장과 안기부장, 대통령뿐이다. 물론 이런 보안원칙은 현 국정원 체제에서도 동일하다.

    이처럼 조직-인력-예산을 한 묶음으로 묶어 비밀로 하는 것은 그중 ‘하나’라도 공개되면 다른 ‘둘’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기부 조직-인력-예산이 딱 한번 공개된 적이 있다. 안기부가 인수위원들에 대한 보고를 거부한 지 한 달쯤 지난 후 기자는 ‘시사저널’(98년 2월26일자)을 통해 안기부 조직-인력-예산을 처음으로 공개했고 안기부는 판매금지 가처분신청으로 맞섰다. 당시 ‘시사저널’은 안기부가 12개 지부를 포함한 39개 부서와 7000명의 인력, 그리고 7000억원의 예산을 가진‘작은 정부’라고 보도했다.

    그 뒤 안기부는 조직과 인력 그리고 예산의 ‘대수술’을 겪으면서 현재의 국정원으로 바뀌었다. 국정원은 인력에 대해서는 11%를 감축했다고 발표했으나 예산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따라서 인력 감축에 따른 예산(인건비) 절감을 감안하더라도 2년 간의 자연 증가분을 보태면 국정원 예산 총액은 8000억원 안팎으로 추정된다.



    이 예산 총액은 본예산과 예비비 형태로 숨어 있다. 그 근거는 지난 63년 중앙정보부 창설과 함께 제정된 ‘중앙정보부법’과‘예산회계에 관한 특례법’이다. 중앙정보부법은 그 뒤로 안기부법`-`국정원법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부(원) 예산 중 미리 기획하거나 예견할 수 없는 비밀활동비를 총액으로 다른 기관의 예산에 계상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은 불변이다. 또 예산회계에 관한 특례법도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한 활동에 소요되는 예산’을 정부 예비비에서 배정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 항목들은 예산심의 때는 공개되지 않고, 다음해 결산 때만 공개된다.

    정부는 이 법에 의거해 그동안 안기부 예산을 재경부 예비비 명목 등으로 상당부분 편성하고 나머지는 안기부 본예산으로 편성해 국회 심의를 받아왔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정보기관의 특수성을 감안해 안기부 예산 총액 자체를 비밀로 해왔다. 다만 김영삼 정부 들어 94년 안기부법 개정 이후에 안기부를 통제하는 정보위가 국회에 설치된 뒤로는 정보위에서 예산을 세부 항목까지 심의해 오고 있다. 그러나 안기부(국정원) 예산 자체가 2급 비밀이기 때문에 심의는 정보위 회의장 안에서만 가능하고 이를 외부에 말할 수도 없다. 따라서 실질적인 심의는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국정원도 ‘할 말’이 있다. 국정원의 한 고위 관계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국회에 국가 정보기관을 통제하는 정보위가 설치된 국가는 미국과 독일 그리고 한국뿐이다. 그런데 미국과 독일 정보위는 ‘지하벙커’에 설치돼 있다. 그 안에는 전화도 없으며 외부와 통화하려면 공중전화를 이용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보위 회의실은 국회본관 5층에 있다. 외국 정보기관원들이 마음먹고 (도청레이더) 쏘면 다 도청할 수 있다. 그만큼 보안성이 취약하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미국의 경우 실-국 단위의 조직표까지는 공개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미 중앙정보국(CIA)은 CIA 조직에 대해 알고 싶다고 요청하면 일반인에게도 몇십 장짜리 브로슈어를 나눠준다. 그러나 예산에 대해서만은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공식 예산은 ‘제로’다. 각 부처 예산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의회의 심의를 받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이는지는 비공개이기 때문에 미 의회에서도 국가 정보기관 예산은 늘 쟁점이 된다.

    이처럼 국가 정보기관 예산은 비공개가 원칙이기 때문에 국정원 예산은 국회의 예산심의 때마다 야당이 단골로 들고 나오는 ‘고정 메뉴’다. 과거 노태우-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예결위 고정멤버였던 이해찬 의원(현 민주당)이 당시만 해도 ‘성역’이었던 안기부 예산을 송곳처럼 파고들었고, 김대중 정부 들어서는 이신범 전 의원과 정형근-권오을 의원(한나라당)이 국정원 예산을 정치 쟁점화했다. 그러나 현행법상 국정원 예산을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국회 예결위원들이 국정원 예산 총액을 추계하는 방식은 각 부처에 분산된 국정원 예비비 항목들이 예산심의 때는 공개되지 않지만 다음해 결산 때는 공개된다는 점에 착안한다. 즉 정보위가 심의하는 예산액(본예산)과 다음해 결산에서 드러난 다른 부처에 은닉된 비밀예산(예비비)을 합치는 방법으로 총액을 되짚어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번에 안기부 자금의 15대 총선 신한국당 유입 의혹을 사고 있는 96년의 경우, 당시 안기부 본예산은 1974억원이다(이하 ‘표’ 참조). 그런데 그 다음해 9월17일 재정경제원이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자료에 따르면 그해 6월말까지 정부 13개 부처에서 쓴 일반 예비비 총액 3148억6500만원 가운데 2789억8800만원(88.6%)이 ‘국가안전보장활동경비’라는 명목으로 안기부에서 가져다 쓴 돈이다. 게다가 안기부는 9월 추경예산(예비비)에서 1000억원 가량을 더 가져갔다. 배(본예산)보다 배꼽(예비비)이 훨씬 더 큰 것이다.

    또 대통령선거가 있던 97년의 경우 정보위가 심의한 본예산은 2332억원이었는데 반해 다음해 결산을 통해 나타난 당시 예산청 예비비 중 안기부가 사용한 돈은 4079억원이다. 따라서 97년 안기부가 실제로 사용한 예산액은 이 두 항목을 합해 적어도 6410억여원이 되는 셈이다. 이런 추계를 통해 김대중 정부 첫해 예산 심의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은 국정원(당시는 안기부) 예산 총액이 1조원이 넘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산 총액 추계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추계에 따른 예산 총액은 엄밀히 말해 국정원(안기부)이 ‘관장’하는 금액이지 ‘집행’하는 금액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가안전보장활동경비는 국정원이 주관하지만 그 돈은 국정원만 쓰는 것이 아니라 국방부 통일부 경찰청 등 국가안보와 관련된 부처에서 고루 쓰고 있다. 다만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의 국가 정보기관으로서 그 돈이 제대로 쓰이는지를 ‘조율’할 뿐이다. 이를테면 국방부장관 직할 첩보부대인 9125부대의 감청장비 도입 예산이나 경찰청 보안국의 대공수사 예산 등은 모두 국정원이 관장하는 국가안전보장활동경비에서 나갈 뿐이지 국정원이 쓰는 예산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근거를 들어 국정원 관계자들은 안기부 예비비의 신한국당 선거자금 전용 의혹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이다. 5·6공 시절이라면 모르지만 정보위가 설치되고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이후의 상황에서 안기부 예비비에서 수백억원이나 되는 돈을 아무도 모르게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국정원의 한 고위 관계자는 “안기부 예산이 비밀이기 때문에 세인들은 의혹을 가질지 모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부 감시 기능은 다른 어느 기관보다 더 철저하다”고 주장했다. 예산이 기획과 집행 그리고 심의로 3원화돼 있고 엄격한 감사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설령 그것(예비비 전용)이 사실이라면 구안기부 시절의 구여권과 관련된 범법행위이므로 국정원과 현 정부로서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데 뭣하러 숨기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그것이 예비비와 무관한 ‘통치자금’ 성격의 돈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과거 정권에서 통치자금은 안기부 기조실장이 실무를 전담하고 대통령에게 직접 재가를 얻어 집행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공 시절 야당 의원에게까지 정치자금을 주면서 ‘통치권자’를 보좌한 장세동 전 안기부장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또 6공 시절에는 주로 기조실장이 대통령과 직거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안기부 모간부가 92년 대선 전에 노태우 대통령이 탈당하고 중립 선언을 하자 자신이 관리하던 통치자금을 김영삼 후보에게 제공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따라서 김영삼 정부 집권 후 김현철 인맥으로 분류되던 권영해 부장이나 김기섭 기조실장이 선거를 위해 조성한 통치자금이 이번에 검찰이 고속철도 차량 선정과 관련된 알스톰사의 로비자금 계좌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라는 추정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검찰이 추적한 괴자금이 안기부 모계좌에서 나온 것이 사실이라면 이럴 경우 또 다른 가능성은 누군가가 직접 조성한 정치자금(총선 지원금)을 안기부 간부가 대신 관리해줬을 경우다. 그럴 경우에도 의혹의 대상은 역시 권영해 부장과 김기섭 기조실장이다. 특히 김기섭씨는 김현철씨 자금을 관리해준 전력이 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어떤 언론 매체도 김영삼 전 대통령을 배후로 지목하지 않았는데도 김 전 대통령이 ‘폭탄 선언’ 운운하며 스스로 발끈하고 나선 것이 이런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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