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4

2000.10.12

거나하게 차린 ‘색의 잔치’

  • 입력2005-06-27 10: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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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나하게 차린 ‘색의 잔치’
    인상주의는 사물이 반사하는 빛을 기록한다는 것, 그것도 내 눈에 보이는 대로, 즉 내 눈의 망막에 각인된 빛의 인상을 캔버스에 그대로 옮긴다는 점에서 세상에 대해 지극히 객관적이고 사실적이면서 과학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다.

    때문에 인상주의자들은 사물을 윤곽선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 사물이 반사하는 빛면(색면)으로 파악한다. 그들은 사물이 반사하는 빛 조각들을 점으로, 면으로, 선으로 짧게 기록한다. 그림 위에 남아 있는 선들은 단지 색면과 색면의 경계일 뿐 커다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회화적 요소가 된다. 이때부터 그림 속의 사물들은 형체가 와해되기 시작하고, 더 극단적으로 발전되면서 결국 아무런 구체적 형상을 지니지 않은 색들의 집합으로 남게 되었다. 윤곽선을 지우는 색채의 약동. 그것이 추상회화의 시작이고 이런 이유로 흔히 인상주의는 현대미술의 기원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우리나라 화가의 작품 중에서 인상주의의 색채적 감각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이대원의 작품을 들 것이다.

    그의 화면에 화사하게 빛나는 색채의 향연, 빗발처럼 쏟아지는 색채의 비수들. 색점과 색면, 그리고 색선의 조화로 인한 밝은 음율. 자연을 작품의 주요 모티프로 삼는 무욕의 자세. 이 모든 것들은 서구 인상주의자들의 색채적 특성과 추상적 조형성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대원 회화의 이런 색채를 서구의 인상주의적 문맥에서 찾는다면 오류가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감각적이고 광학적인 세상보기를 지나치게 시도했던 점묘파 화가 한 사람을 21세기에까지 품고 있는 이상한 꼴이 되고 만다.



    맨 처음 그의 그림 앞에 서게 되면 다성악적 화음의 화려한 색채에 눈이 멀게 되지만 사실 우리가 황홀해하는 그 색채미의 진원은 우리 고유의 오방색(음양오행을 표현하는 색상)과 오방간색에 있으며, 그리고 더 나아가 그의 필선이 동양화의 준법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조선시대의 수묵법과 중국의 묘화법을 모델로 붓놀림을 연습하면서 생각해 낸 것은 칸딘스키의 점 선 면 개념이 한국화와 기본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고 스스로 밝혔듯이, 색채도 색채지만 그는 자유롭고 힘찬 선들의 친밀한 스며듦과 역동적 충돌을 통해 동양화의 기운생동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유화물감으로 그린 동양화라고나 할까.

    따라서 우리는 그 하나의 색점과 단속적인 붓터치들이 자아내는 화면의 일렁임 속에서 그 각각의 필선들에 담겨 있는 작가와 대상과 우주의 교감을 발견해야 한다.

    ‘화단의 귀족’이라는 그의 별명과는 다르게 이대원은 한국미의 본령을 허약한 귀족미학에서 찾지 않고 민주적이고 자생적인 서민철학에서 발견했다. 일찍부터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론에 관심을 갖고 ‘한국과 그 예술’을 번역했다든지, 서민화가 박수근에게서 진정한 한국성을 발견했다든지 하는 일들은 그의 소박하고 건강한 세계관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 이대원은 팔순의 노화가답지 않은 활달함, 생에 대한 긍정적 시선, 굳어짐 없는 부드러움으로 우리에게 또 한번의 잔치를 열어주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서 자유롭고 신명나는 재즈를, 사물놀이의 꽹과리 소리를, 비나리를, 판소리를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10월10일까지 사간동 갤러리현대. 문의:02-734-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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