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0

2000.09.07

시인과 기자가 복원한 역사는…

  • 입력2005-06-15 13: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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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기자가 복원한 역사는…
    역사의 흔적을 모아 생생한 현실로 복원하는 일을 역사학자 대신 시인과 기자의 손길에 맡긴다면 어떤 형상으로 빚어질까. 시인은 유물, 유적이 아니라 역사가 남긴 ‘정신’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현장에서 불뚝불뚝 떠오르는 시심(詩心)을 동원해 보이지 않는 남도 소리까지도 함께 복원해낸다.

    기자는 발굴현장을 취재하면서 천년 전 원래의 모습과 당시의 상황을 마치 눈으로 보듯 숨가쁘게 그려내는 재주를 발휘한다. 이렇게 해서 1980년대와 8세기 말 당나라라는 시공간을 거침없이 넘나들며 베일에 싸였던 법문사의 비밀을 조금씩 벗겨내는 데 성공했다. 송수권 시인이 쓴 ‘태산풍류와 섬진강’과 중국 ‘쯔광거’(紫光閣)지의 웨난-상청융 두 기자가 쓴 ‘법문사의 비밀’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송교수(60·순천대 문예창작과)는 섬진강 일대를 둘러보는 기행문 형식을 빌려 남도의 풍류문화를 복원하고자 했다. 그는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 쪽 남해를 흘러들어 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올리는’(시 ‘지리산 버꾹새’ 중에서) 것을 보며 자랐다. 이 물길을 따라가다 보면 남도풍류의 발생지인 정읍시 칠보면(신라 당시 태산군)이 나온다.

    그가 이곳을 풍류현장 1번지로 꼽는 이유는 수많은 풍류객이 거쳐간 유상대(流觴臺)가 있기 때문이다. 유상대는 경주에 있는 포석정의 또 다른 이름으로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의 현장으로 유명하다. 이곳 유상대는 태산군수 고운이 만들어 최치원이 거쳐가고, 가사문학의 효시인 정극인과 태인향약, 송순과 정철에게로 이어졌다.

    남도문화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송교수는 남도의 정신을 첫째 대나무(竹)의 정신, 둘째 황토의 정신, 셋째 뻘(개펄)의 정신으로 요약했다. 특히 갯벌을 개척한 남도인의 ‘갯땅쇠 정신’(흔히 하는 말로 뉴 프런티어 정신)은 이 땅에서 유달리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이 많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동학혁명, 광주학생사건,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모두 갯땅쇠 정신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송교수는 섬진강 일대를 샅샅이 돌아본 ‘태산풍류와 섬진강’에 이어 ‘계산풍류와 영산강’ ‘천관풍류와 탐진강’을 펴내 남도 지역의 역사탐방을 끝마칠 계획이다.

    ‘법문사의 비밀’은 시작부터 추리소설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당나라 역사상 일곱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873년 치러진 불지사리(석가모니의 손가락뼈)의 봉영식 장면이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펼쳐진다. 하지만 이 사리는 봉영식을 마치고 법문사 지하궁 돌문 안으로 들어간 뒤 1000년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1981년 법문사의 진신보탑 서쪽면이 붕괴되고 86년 남은 반쪽도 허물어지면서 탑의 기반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대발견이 이루어진다. 1987년 4월9일 1113년 동안 깊이 숨겨졌던 법문사 지하궁의 문이 굉음 속에서 열리고 눈앞에는 금화가 깔린 길이 펼쳐진다. 무장경찰에 의해 마을이 봉쇄되고 긴급하게 결성된 법문사 고고학 발굴대가 투입된다. 드디어 1000년 동안 묻혀 있던 불교계의 보물 불지사리와 당나라 왕실에서 공양물로 올린 1000여점의 진귀한 보물들이 쏟아져나오자 학계와 전세계 언론은 경탄을 금치 못한다.

    작가 웨난은 앞서 국내에 소개된 ‘진시황릉’ ‘황릉의 비밀’을 통해 고고학 발굴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뛰어난 솜씨를 입증한 바 있다. ‘법문사의 비밀’에서도 폭넓은 문화적 소양과 사학에 대한 조예, 그리고 기자로서의 관찰력 등을 발휘해 한 편의 드라마로 당나라 시대를 복원해냈다. 두툼한 책의 두께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재미있는 고고학 발굴기다. 태산풍류와 섬진강/ 송수권 지음/ 토우 펴냄/ 328쪽/ 9800원

    법문사의 비밀/ 웨난, 상청융 지음/ 유소영, 심규호 옮김/ 일빛 펴냄/ 742쪽/ 2만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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