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0

2000.09.07

인습의 늪에서 허우적댄 세 자매

  • 입력2005-06-15 13: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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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습의 늪에서 허우적댄 세 자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한 인간의 삶은 아주 어린 시절의 경험과 인간관계로부터 평생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한다. 특히 어떤 열등감이나 패배의식이 마음속 깊이 자리잡게 되면 일종의 한(恨)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되는데 심리학자들은 그것을 ‘핵심 감정’이라고 부른다. 핵심 감정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모와의 관계다.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관계,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는 평생 이성을 대하는 데 있어서, 특히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상길 작, 김순이 연출로 극단 로뎀이 공연 중인 ‘버리는 여자, 버려진 여자’(9월10일까지, 제일화재 세실극장)는 바로 부모와의 관계 때문에 불행을 겪는 세 자매의 고통스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큰 딸 지선은 결혼을 하지 않은 채 할아버지를 수발하며 살아가고 있다. 둘째 딸 지영은 오래 전 가출해 카페를 운영하고 있으며 역시 미혼이다. 셋째 딸 지문은 결혼 2년 만에 간통 혐의를 쓰고 친정으로 쫓겨왔다.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는 세 자매의 삶은 결국 머나먼 유년의 상처와 관련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그녀들이 아주 어릴 때 어머니는 마당에 서 있는 대추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다. 딸만 셋을 낳은 어머니는 아들을 낳는다는 명분으로 자행되는 아버지의 외도와 폭행을 묵묵히 견뎌야 했다. 그 배후에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인습에 사로잡힌 할아버지가 을씨년스런 대추나무처럼 위압적으로 버티고 서 있다.

    세 딸은 과거의 동일한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비슷한 ‘핵심 감정’에 속박당해 있다. 큰딸 지선은 자궁에 이상이 있다는 이유로 일찌감치 결혼을 포기하도록 종용한 할아버지의 뜻에 무기력하게 순응해 왔다. 남자란 종족 보존 본능에만 충실한 존재이기 때문에, 결혼해서 아이를 못 낳으면 결국 엄마와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리라고 예감한다. 엄마의 시신을 처음 목격한 둘째 딸 지영은 그때 이후로 집에서 밤을 견디기가 어려워 밖으로 나돌다가 결국 집을 떠나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남자친구는 그녀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남자의 집안에서도 문제 집안의 문제아란 이유로 그녀와의 결혼을 반대했다.

    명문대학 법대를 다니다가 그림에 이끌려 학교를 그만둔 셋째 딸 지문은 할아버지가 원한 남자와 마음에 없는 결혼을 했다. 그 남자는 섹스가 사랑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이며 심지어 폭력적 섹스를 즐기는 변태적 사디스트다. 지문은 고통스런 결혼생활의 출구로 다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가 미술학원 강사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세 자매는 어린 시절에 부정적으로 형성된 ‘핵심 감정’ 때문에 모두 사랑과 결혼에 실패하고 있는 셈이다. 그녀들은 남자나 결혼 자체에 대해 애초부터 매우 그릇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를 부정하면서도 결국 아버지와 같은 남자를 만나거나, 아버지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성급하고 위험한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어떤 종류의 실수는 한 개인의 삶 안에서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 세대로 이어지면서 계속 유전될 수 있다. 부모와 자신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성찰하여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는 어지간한 노력 없이는 불행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에 세 딸이 대추나무를 베어버리는 행위는 새로운 결단과 출발을 암시한다.

    젊은 단원이 습작으로 쓴 작품을 극단 대표가 손질했다는 이 연극은 여성문제를 매우 흥미로운 심리학적 기반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완성도가 다소 부족한 희곡에 경험이 부족한 연출과 연기자들이 어울려 아직 서툴고 거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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