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6

2000.06.01

냄비를 닦아보자

  • 입력2005-12-05 13: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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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냄비를 닦아보자
    모처럼 유리창을 닦았다. 그리고 나서 창가에 기대앉아 한가롭게 차를 마셨다. 맑은 유리창 너머에서는 여름을 재촉하듯 따가운 햇살이 사정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유리창 청소를 시작한 김에 대청소를 벌였다. 주방기구들도 윤이 나도록 닦았다. 한바탕 청소 대작전을 치른 뒤 가스레인지 위에 놓인 윤기 나는 냄비를 보니, 상가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 얘기가 생각나 혼자 웃었다.

    직장이 있는 상가, 양지 바른쪽 벽에는 얼마 전부터 눈이 부실만큼 새하얀 대걸레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바뀌고 나서다. 아주머니는 언제나 걸레를 힘차게 비벼 빨아서 가지런히 햇볕에 말린다. 열심히, 더구나 즐겁게 일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활력과 즐거움을 준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하루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물어보았다.

    “아주머니, 그 일이 그렇게 즐거우세요? 걸레가 우리 집 행주보다 더 깨끗해요” 했더니 아주머니는 쑥스러워하면서 그 내력을 말해주었다.

    시집와서 보니 시댁 식구들은 많은데 남편은 벌이도 시원찮으면서 약주라도 하는 날이면 괜한 트집에 주벽이 심하더란다. 가난한 것이야 시대가 그러하니 참아보겠지만, 주벽까지 심한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속은 것 같고, 희망조차도 보이질 않아 보따리를 여러 번 쌌단다.

    그런데 매번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가려다가 집안을 한번 둘러보면 ‘내가 살던 부엌 살림이 왜 그렇게 지저분하고 궁색한지…’ 보따리를 내려놓고는 냄비부터 닦기 시작한다. 궁색한 살림살이야 어쩔 수 없지만 부엌이라도 깨끗이 치워놓아야 누가 와서 보더라도 ‘그 여자 살림 하나는 깔끔하게 했네’ 라는 말을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그런데 그렇게 홧김에라도 냄비를 닦다보면 그릇은 어느새 반짝반짝 윤기가 나고, 반질반질해진 살림살이를 보면 언짢았던 마음까지도 절로 누그러지더란다.



    이렇게 해서 쌌던 보따리를 다시 풀고 주저앉았더니 어느새 나이 육십 줄이 되었다는 것이다. 두고 떠나려던 자녀들이 벌써 그때의 당신 나이가 돼 지금은 손주들이 서로 자기 할머니라고 시샘을 한단다. 자녀들이 모두 효자-효녀라는 것은 이미 소문으로 안다. 대가족의 가난한 살림을 맡아 하며 아버지의 주벽을 참고 견딘 어머니를 무척 고마워한단다. 남편 또한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어디서 이런 단란한 가정을…”하며 세상에 둘도 없는 아내로 아껴준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얘기 나온 김에 가족 자랑을 늘어놓았다. 자녀들은 일(청소)하는 것을 극구 말리지만, 예전부터 빡빡 쓸고 닦던 기질을 어떻게 묵히냐며 환하게 웃었다.

    한때 주부들이 ‘스트레스 해소’라는 핑계로 사치와 과소비를 일삼았던 과거를 생각해 보면 쓸고 닦음으로써 마음을 정화시켰던 이 아주머니의 미덕이야말로 경제가 어려운 이 시대에 필히 요구되는 지혜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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