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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에서

우리 동네 작은 논

우리 동네 작은 논

우리 동네 작은 논
밤새 목이 아파 뒤척이다 일어난 아침. 창문을 연 순간 너무 반가웠다. 7층 우리집에서 내다본 학교 앞 작은 논에는 밤새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벌써 두달째 계속되는 목타는 봄. 강원도에서는 산불이 크게 번져 주민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대피하는 소동이 있었고, 1층 집 화단의 꽃들은 황사를 뒤집어쓴 채 힘겹게 고개를 가누고 있다.

나 역시 호흡기가 약해 잔기침을 계속하고, 눈이 침침해 책 읽기도 쉽지 않은 메마른 봄날. 저 손바닥만한 논에 채워진 물을 보고 허기를 채우듯 눈으로 물을 모두 마셔 버렸다. 몸과 마음까지 시원해지고, 가슴에 봄을 싹트게 하는 생명수였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서울과 경기도 도계에 있는 우리 아파트에서 바라본 들녘은 참 아름다웠다.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산성까지 제법 넓은 들판이 이어져 있고, 계절의 변화 또한 아름다웠다.

봄비가 내리면 갈아엎은 흙의 풋풋한 냄새가 창문까지 바람에 실려오고, 한여름의 개구리 소리, 금빛 가을, 눈 내리는 들판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아, 우리 가족이 살기에 주변환경이 참 좋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그림은 많이 훼손됐다. 푸르른 논이 하나 둘 메워지고, 그 자리에는 비닐하우스가 들어섰다. 원색의 지붕을 인 물류 창고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서면서 좁은 농로는 화물차들의 바퀴에 으깨어지고 끊어져 마른 바람에 먼지만 일으키고 있다.

저렇게 모든 논밭이 사라지면 농부는 어디로 가고, 우리의 먹거리는 누가 재배할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특히 벼농사는 봄부터 가을까지 논에 가두어 둔 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다시 비로 내리는 순환이 거듭되기 때문인지 그전에는 요즘처럼 메마른 봄은 없었던 것 같다. 하도 가뭄이 계속되다 보니 논들이 다 사라져서 이렇게 비가 오지 않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창 밖을 내다보다 논 자락에 사람 그림자가 비치면 얼른 망원경을 꺼내 자세히 들여다본다. 두세 명의 노인들이 나와서 경운기를 몰기도 하고, 논두렁을 바쁘게 오가며 농사 준비를 한다. 모두가 급하게 변해가고 아무도 논을 지키려 하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나마 저 노인들의 정성은 이 시대에 겨우 이름만 유지하는 마지막 농사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어수선하고 삭막한 주변 한가운데 네모 반듯하게 자리잡은 논 자락은 파릇한 수양버들을 수면에 거꾸로 끌어안고 메마른 가슴을 촉촉히 적셔준다.

내일은 비가 오겠지. 모레는 더 큰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주간동아 2000.05.04 232호 (p1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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