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0

2000.04.20

휴가 연막 … 세 차례 北접촉

정상회담 준비 막전막후…임동원-박지원-박재규의 ‘007 트리플작전’

  • 입력2006-05-16 09: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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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 연막 … 세 차례 北접촉
    왜 하필이면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인가. 4월10일 남북 정상회담 성사 발표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가졌음 직한 커다란 의문 중 하나다. 역대 정권에서 주로 정보 계통의 실력자들이 이 업무를 맡았던 것에 비해 박장관은 역시 의외의 인물.

    이번 남북 정상회담 추진은 박장관과 임동원국정원장, 박재규 통일부장관의 ‘쓰리 톱 시스템’이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것이 정부 소식통의 전언이다. 임원장은 막후에서 회담 추진을 총지휘했고, 실무적인 모든 준비와 지원은 박재규장관 라인에서 담당했으며, 박지원장관은 ‘대북 밀사’ 역할을 맡았다(상자기사 참조). 박지원장관은 4월10일 기자회견에서 “통일부 장-차관이 나설 경우 비밀접촉이 노출될 것을 염려해 박재규장관으로부터 모든 지침과 말씀을 받아 접촉에 나섰다”고 말했다.

    북한이 이번 정상회담 추진에 긍정적이었던 것은 임원장과 박재규장관에 대한 북한 고위층 내부의 평가가 좋았던 것이 커다란 이유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임원장이 통일부장관이던 시절 전임자와는 달리 아무런 비난을 하지 않는 등 임원장에게 호의적이었다. 박재규장관의 경우 일찍부터 그것도 아카데미 분야에서 북한 연구를 시작한 데다가, 민간 차원의 북한통들을 많이 알고 있어 북한의 신임도가 그만큼 높았다는 것.

    박지원장관은 이같은 임원장과 박재규장관라인의 지원 속에서 지난 3월17일과 22일, 4월8일 세 차례 준비 접촉을 가졌다. 박장관은 이때 휴가를 간다고 ‘연막작전’을 폈다. 이렇게 보면 김대중대통령이 지난 개각에서 임원장을 국정원장으로 보내고 박재규 통일부장관을 발탁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여기에 또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현대 채널’의 가동 가능성. 물론 정부와 현대그룹은 막후 역할설을 부인하고 있지만 남북 비밀협상에서 북한측 특사였던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 현대가 추진해온 남북경협사업의 북한측 파트너였으며, 지난해 12월 서울에서 열린 통일농구경기대회의 북한측 대표단장을 맡았다는 점에서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특히 최근 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 정몽헌 현대회장, 이익치 현대증권회장 등이 중국과 일본 등을 돌면서 예사롭지 않은 행적을 거듭한 점도 모종의 역할설을 부추기는 부분. 정몽헌회장과 이익치회장은 지난 3월말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 직전에 베이징에서 송호경부위원장을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전문가들은 정주영명예회장의 5일 일본 방문과 관련, 남북 정상회담과 북-일수교협상의 관련성을 제기하고 있다. 정상회담과 일본의 북한 배상금 제공 사이에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것.

    이번 정상회담 추진에서 또하나 의외로 비치는 것은 북한의 태도. 3월17일부터 4월8일까지의 단기간에 일이 급성사됐다는 점과, 이의 발표시점을 정치적 오해를 부르기 쉬운 총선 직전으로 택했다는 것이 그렇다. 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것은 남북 당국간 협력을 천명한 김대통령의 3월10일 베를린선언.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이 베를린선언이 나오게 된 것은 우리 정부의 순수한 일방 의지가 아니라, 이런 종류의 선언이 나오도록 북한측이 먼저 우리 정부에 계속 모종의 사인을 보냈다는 것. 즉, 베를린선언은 이런 북한의 태도 변화에 대한 ‘화답’의 성격이 강하다는 얘기다. 박지원장관이 김대통령으로부터 대북 특사를 맡으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 3월15일인 것을 보면, 이미 이때부터 우리 정부는 정상회담 성사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북한은 북한 나름대로 노동당 창당 50주년인 올해의 4월15일 김일성 생일 이전에 뭔가 가시적인 성과물을 내놓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었던 점도 정상회담 합의를 앞당긴 커다란 이유. 특히 백남순 북한 외상이 3월20일 중국을 방문했을 때 주룽지 총리가 거의 힐난조로 ‘북한이 제대로 궤도를 찾아서 빨리 변하지 않으면 매우 힘들다’고 개방과 개혁을 요구한 것도 북한이 적극적으로 남북대화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

    물론 여기에는 미-북, 일-북 협상이 미적지근한 조정기에 들어가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심화되고, 북한에 실질적인 경제 지원과 혜택을 줄 의지와 재원을 갖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계산이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북한은 곧 닥쳐올 농사철을 맞아 비료지원 등 사정이 급박하다.

    이같은 여러 이유들은 정상회담을 둘러싼 남북 당국간 합의가 급진전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김대통령은 당초 10일 영종도 신공항 공사현장을 방문하려 했으나 8일 회담합의가 이뤄지면서 계획을 급히 취소했다. 청와대도 이런 정황을 들어 남북 정상회담 합의 발표가 총선용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정상회담에 관한 한 다급한 것은 북한이었고,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DJ 그림자 보좌 ‘실세 중의 실세’

    ‘추진력’ 강해 두터운 신임 … “비서실장 자리 떼논당상”


    남북정상회담 발표가 나온 4월10일 사이버 정치증권 거래소 ‘포스닥’(www.posdaq.co.kr)에서는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 주가가 나흘 동안의 하락세를 멈추고 무려 4850원이나 오르며 상한가를 쳤다. 주가는 5만3350원으로 각료 종목 중 김대중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다. 포스닥 시장에서 박장관 주가는 2위 자리를 다른 장관에게 좀처럼 내주지 않는다. 그만큼 박장관이 김대중정부의 실세로서 인식되고 있다는 얘기다.

    박장관이 청와대를 나오고 김대통령의 ‘지근 거리’를 벗어나도 이른바 ‘실세 장관’으로서의 위상은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 2000년의 ‘문화 예산’이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 전체 정부예산의 1%를 넘어선 것이 단적인 예. 정부 전체의 예산이 99년에 비해 5%의 증가율을 보인 것에 반해 무려 40.1%가 증가한 커다란 사건이었다. 문광부 예산이 1조원을 넘어선 것도 처음 있는 일. 이에 대해서는 야당 의원들도 박장관의 정치력을 높이 평가했다.

    지난 2월 프로야구 SK팀의 창단도 비슷한 경우. 박장관은 야구에 뜻이 없는 SK그룹을 사정없이 몰아붙여 결국 ‘항복’을 끌어냈다. 요즘은 월드컵을 앞두고 프로축구단이 최소 12개는 되어야 한다고 한전 등 기업들을 집요하게 설득하는 중이다. 물론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시키면 나중에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일각의 비판론이 있기는 하지만, 스포츠계 입장에서 보자면 박장관이 시원한 ‘해결사 장관’인 셈.

    박장관의 이러한 정치력과 부지런함, 끈질긴 업무 추진력이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 이끌어낸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김대통령도 박장관의 이런 특성을 평소 잘 알고 있었기에 이례적으로 그를 ‘대북 밀사’로 발탁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박장관이 계속 순탄대로만을 달려온 것은 아니다. 지난해 10월에는 ‘중앙일보 사태’의 구설수와 언론탄압 시비로 인해 장관직 해임건의안이 발동되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도 박장관은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연결된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거절하기 어려운’ 정치권 밖의 인사들까지 총동원하는 전방위 로비로 위기 국면을 벗어났다. 언론사 고위층 인사나 프로그램 제작에 깊이 간여한다는 풍문도 끊이지 않았으나 그 때마다 ‘발로 뛰는’ 육탄 방어의 진가를 보여줬다.

    박장관은 지난 1월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나는 김대통령으로부터 9년 동안 많은 은전을 받은 사람”이라며 “대통령을 만나 ‘이번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정부든 어디든 대통령이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애기했다”고 털어놨다. 이번 남북정상회담 성사는 그같은 ‘은전의 보답’이 될 법하다. 여권 인사들 사이에서는 “박장관이 김대통령 임기 후반의 청와대 비서실장이 될 것”이라는 얘기가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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