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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칼럼

개방이냐, 종속이냐

개방이냐, 종속이냐

개방이냐, 종속이냐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는 일찍이 제3세계가 안고 있는 막대한 부채에 대해 명쾌한 해결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원조나 차관은 정치적 목적으로 제공된 것이므로 경제적 해답이 최선은 아니라는 요지다. 채무상환이 어려우면 유예하기보다 탕감해주는 채권국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는 주장에서 국제전략가다운 그의 혜안이 엿보인다.

지구 위 나라들 치고 오늘날 대외채무에 시달리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히 선진국들보다 후진국들이 심각하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개도국들은 지난 20년간 외채가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주목할 사실은 이 나라들이 지닌 대략 2조달러에 달하는 총외채가 새로운 투자와 생산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 종전의 원금과 이자를 갚기 위해 다시 꾸어오는 과정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난 결과라는 데 있다. ‘빚내어 빚갚은’꼴이었다.

우리의 사정은 어떤가. 한국은 1983년 멕시코 시티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와 함께 사상 처음으로 세계 4강이라는 신화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네 나라들은 당시 세계 ‘외채 4강’이었다. 지금도 외채가 많기로는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뺄 수 없고, 그 뒤를 러시아 중국 인도네시아 한국 등이 따르고 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한국이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데 유리했던 까닭은 대외채무에 비해 정부재정이 건실했기 때문이다. 만약 정부재정마저 부실했다면 외환위기와 재정위기가 합쳐져 그야말로 총체적 경제위기의 수렁텅이에 빠졌을지 모른다.

지난 2년 사이에 우리나라 정부 부채는 배 이상 증가했다. 총선정국을 맞이하여 야당은 부풀리고 여당은 내리깎고 있지만, 우리의 국가채무는 정부보증채까지 합쳐 약 190조원에 달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볼 때 아직 위험수준은 아니지만 앞으로 적정관리가 요구되는 것은 물론이다. 대외채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민간부채를 국가가 떠안고 있는 처지에서 재정적자의 증가는 정부의 경기조절과 복지제공 기능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실 우리의 재정적자 규모는 다수 OECD 국가들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다. 우리가 중시해야 될 과제는 재정적자가 쌓인 동안 과연 구조조정이 국민경제의 체질 강화로 이어져 왔는지를 적확히 따져보는 일이다. 개방이란 이름 아래 외국자본에 의해 알짜기업이 넘어가고 토종산업이 쓰러지고, 인수합병과 외자유치에 의해 국내은행들의 정책자율성이 침식되고, 외국투자자들에 의해 주식과 채권시장이 주도되고 있는 현실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이렇듯 발가벗겨진 우리의 산업과 경제를 ‘IMF 우등졸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땅에서 고용도 해주고, 세금도 내주고, 경영도 가르쳐 주는데 굳이 자본의 국적을 따질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시안적 이해에 빠지다 보면 한국경제는 영원히 초국적자본의 ‘소작’신세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개방이 반드시 종속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체질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개방은 국민경제의 탈(脫)국적화를 통해 대외종속을 심화시킨다. IMF식 구조조정을 통해‘선진국화’를 추구했던 멕시코가 그 좋은 보기다. 지난 10년간의 대외개방과 시장개혁의 결과는 외채의 누증, 실업과 반(半)실업의 심화, 저성장과 저임금의 악순환이다.

흔히 미국과 영국을 개방의 모범사례로 생각하면서 그들은 자국의 문화적 자긍심이라 할 록펠러센터나 국립극장마저 해외에 매각하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다국적 기업체를 갖고 있는 최대 해외투자국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벌거벗어도 감기에 면역이 있지만 우리는 조금만 벗어도 폐렴에 걸릴 수 있는 것이다.



주간동아 227호 (p9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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