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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와 임동원

DJ ‘삼고초려’에 마음 연 임동원

DJ 야당총재 시절 어렵게 ‘첫 만남’… 총선 앞두고 국정원장 중책 맡아 ‘행보’ 관심

DJ ‘삼고초려’에 마음 연 임동원

DJ ‘삼고초려’에 마음 연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통일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김대중정부 출범 이후 임동원 신임 국정원장의 상승가도에 거칠 것이 없다.

임원장은 김대통령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여러 가지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는 인물이다. 우선 그는 매우 빈틈없고 치밀하다. 게다가 합리적이고 발언에 신중하며 정치적 야욕이 없는 스타일이다. 또 김대통령에 대해 전통적으로 적대감을보여왔던 이북(평북 위원) 출신인데다 한때 김대통령의 ‘비토 세력‘ 이었던 군(육사 13기) 출신이다.

군 출신이지만 서울대 철학과에서 수학했으며, 나이지리아와 호주 대사를 역임, 외교적 식견을 길렀고, 남북고위급회담 대표, 통일부 차관을 거치면서 외교-안보-통일에 대한 ‘3박자 감각‘을 모두 갖춘 흔치 않은 인물이다. 이 정도의 출신과 배경이라면 으레 북한에 대한 극우적 시각을 가질 만도 한데 그는 묘하게도 김대통령과 같은 ‘비둘기파‘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김대통령과 임원장이 오래 전부터 서로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은 아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통령이 임원장에게 처음 손을 내민 것은 94년 말이었다. 92년 세 번째 대통령 도전 실패 후 6개월에 걸친 영국 유랑생활을 마치고 94년초 아태재단을 설립한 김대통령으로서는 정치적 재기 자체가 매우 불투명한 시절이었다.



임원장 역시 김영삼정권 출범 직후인 93년 3월 통일원 차관에서 물러난 뒤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으로 옮겨 자신의 관직생활을 조용히 마무리하던 시점이었다.

김대통령은 야당총재시절부터 눈여겨봐둔 임원장에게 사람을 보내 ”한 번 만나자”고 세차례나 연락했지만 임원장은 한사코 이를 피했다. 임원장이 김대통령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당시 김대통령의 핵심측근은 ”당신이 뭔데 우리 총재님이 그렇게 만나자는데도 이를 거부하느냐”는 항의성 메모를 전달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결국 임원장은 김대통령을 대면했고 두 사람은 통일-외교-안보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임원장은 김대통령을 다시 보기 시작했고, 자신감을 얻은 김대통령은 95년 1월 아태재단 2대 사무총장에 임원장이 내정됐다는 사실을 언론에 공표, 임원장의 퇴로를 막아버렸다.

당시 아태재단에 있었던 한 인사는 ”임원장이 언론 발표사실에 반발, 합류를 거부할수도 있었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순수학술재단임을 표방했지만 아태재단은 당시 김대중이사장이 결심할 경우 언제든지 정치적 싱크탱크로 변신해야 할 운명에 있었다. 이 때문에 아태재단 사무총장은 정치적 감각과 학문적 소양을 겸비해야 했다.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있던 임원장으로서는 아태재단사무총장직이 쉬운 자리만은 아니었다. 본인 스스로도 ”내가 관직생활도 어렵게 했지만 재단에 들어온 뒤 훨씬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단기간내 아태재단을 장악했다. 추진력과 잘 무장된 이론을 무기로 그는 연구원들을 혹독히 훈련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김이사장에게 올라갈 모든 연구논문이나 프로젝트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재검토했고 지휘계통을 밟도록 요구했다.

물론 연구원들의 반발도 많아 상당수의 연구원들이 임총장과의 불화 때문에 연구소를 떠나기도 했다. 임총장에 대해 ”너무 독선적이다” ”김이사장에 대한 독점욕이 강하다”는 얘기가 들렸지만 김이사장은 끝까지 임총장을 신뢰했다.

임총장의 당시 정치적 역할에 대해서는 두가지 시각이 엇갈린다.

하나는 임총장이 96년 ‘4·11총선‘ 직후 이종찬 이강래씨 등과 함께 ‘DJ대통령 만들기‘ 의 전위조직인 ‘ 동북아 포럼‘에 참여했으며 대선 직전에는 이북출신 및 군출신 인사들을 접촉하며 ‘반DJ 정서‘ 무마 작업에 나서는 등 나름의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반면 일부에서는 ”임총장이 ‘동북아 포럼‘에 참여는 했지만 되도록 정치 분야에서 발을 빼려는 소극적 입장이었고, 이는 김이사장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과도 함수관계에 있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뒤 김대통령은 그를 외교안보수석으로 발탁했다. 그는 당시 64세의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차관급인 외교안보수석직을 흔쾌히 수락했다. 이 대목에 대해서도 김대통령은 임원장에 대해 고마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이 차관급이었지 그는 정부의 외교-안보-통일정책을 총괄하는 실세였다. 매주 목요일 열리는 국가안전보장회의 (NSC) 상임위에서도 김대통령의 의중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임수석의 입김이 먹혀들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비서관이 미국의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의 파트너 역할을 한 것도 그의 위상을 실감케 해주는 대목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공직생활에 있어 가장 어려운 자리가 될 국정원장에 취임했다. 그의 전도가 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은 그의 비정치적 성향과 국정원장이라는 직위가 갖는 정치적 속성의 괴리에서 비롯된다.

우선 내년 총선에서 국정원이 어떤 위치를 지킬지부터 그에게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김대통령이 국정원의 정치적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임원장을 임명했겠지만 여권의 사활이 걸린 4월 총선에 대해 국정원장이 ‘강 건너 불 구경‘ 만 하기도 여려울 것이다.

자칫 정치에 개입할 경우 본인에겐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있고, ‘모르쇠‘로 일관할 경우 여권 내부의 불만과 압력이 고조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김대통령을 제외한 현 여권 실세들과도 깊숙한 관계는 아니다. 그만큼 정치권에서의 기반이 취약하다는 평가다.

또 하나의 그의 대북 온건 성향과 국정원의 조직 이념에서 빚어질 수 있는 마찰이다. 그는 통일원 차관이던 92년 훈령조작 사건 때 강경론자인 이동복 당시 안기부장특보와 큰 갈등을 빚었고, 93년 이 사건이 불거지면서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직에서 중도하차하기도 했다. 현 국정원 엄익준1차장도 당시 훈령사건에 관여돼 있었다는 설이 있어서 두사람의 관계 설정도 관심거리다.

자의든 타의든 이제 그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그가 ‘지뢰밭‘이라 고 불리는 국정원의 최고책임자로서 자신의 비정치적 성향대로 새로운 정보기관의 패러다임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전임자들의 전철을 답습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주간동아 216호 (p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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