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3

1999.12.16

동성애 부부와 복제 아기

  • 입력2007-05-02 11: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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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성적 일탈행위 중에서 동성애만큼 사회적 수용 기준이 시대에 따라 달라진 예는 드물다.

    인류 역사를 되돌아 보면 동성애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경멸과 금지의 대상이었으나, 성 풍습에 따라 용인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남자의 동성애가 찬미되었다. 동성애에 도덕적 권위를 부여한 인물은 소크라테스다. 남성 동성애자(게이)들은 항문 성교나 넓적다리 성교를 했다. 여성 동성애자(레즈비언)들은 나무로 만든 모조남근의 양쪽 끝을 각자의 질 안에 삽입한 다음에 끈으로 허리를 동여매고 뒹구는 방식으로 황홀경을 맛보았다.

    로마시대에는 가톨릭이 국교(國敎)로 공인되면서 동성애는 교회법에 의해 죄악으로 간주됐다. 동성애는 수음이나 피임처럼 하느님이 허용한 성교의 본래 목적인 종족보존과는 무관한 탐욕적인 성행위이기 때문에 성경의 계율을 어긴 범죄로 본 것이다.

    16세기 초에는 영국에서 동성애를 사형으로 다스리는 법률이 제정됐다. 종교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범죄로까지 낙인이 찍힌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동성애자를 화형에 처했다.



    성 과학의 여명기인 19세기에 이르러 동성애를 사악한 원죄의 산물이나 범죄적 성향의 표현으로 보는 대신에, 정신적 요인에서 비롯된 성적 일탈행위로 규정했다. 동성애가 치료 가능한 정신질환 증세로 간주됨에 따라 수많은 게이들이 정신분석, 거세, 고환이식, 호르몬 처리, 전기충격 치료, 뇌수술 따위의 실험대상이 되었다.

    20세기에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영향으로 성 풍습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나라에 따라 동성애에 대한 태도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미국의 경우 앨프리드 킨제이가 1948년과 1953년 두 차례 발표한 보고서를 계기로 동성애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이 완화된다.

    킨제이에 따르면 오로지 게이로 평생을 일관한 남자가 4%, 오르가슴을 수반한 동성애 경험을 적어도 한번 가진 적이 있는 사례가 37%였다.

    1969년 6월에는 스톤월 폭동사건이 터져 미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스톤월은 뉴욕 중심가의 동성애자 전용 술집인데, 경찰의 과잉 단속이 빌미가 되어 일반 시민들이 동성애자에 가세하여 경찰을 공격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동성애자들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스톤월 폭동을 계기로 동성애자의 존재는 일반인들의 관심사로 부각됐으며 동성애자들은 인권회복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74년 미국 정신병학회는 동성애를 공식적으로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했다.

    정신병의 굴레에서 벗어난 동성애자들은 본격적인 커밍아웃(Coming out)을 시작했다. 커밍아웃은 글자 그대로 밀실 밖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떳떳이 밝히는 행위를 뜻한다. 그들의 적극적인 행동은 취업 결혼 군복무에서 이성애자와 동등한 법률적 권한을 요구하고 나섰다.

    1975년 미국 연방정부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취업 거부를 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동성애 부부(Same-sex couple)에게 이성애 부부와 대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움직임이 잇따랐다. 1999년 10월 프랑스 의회는 동성애 부부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법률을 의결했다. 같은 달 영국 대법원은 게이에게 동거하던 게이의 유산 상속권을 부여하는 판결을 내렸다. 캐나다에서는 2001년의 인구통계에 동성애 부부 항목을 신설해 새로운 가족형태의 하나로 포함시킬 예정이다.

    의학계 일각에서는 레즈비언 부부들이 인간복제 기술로 자식을 갖게 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치고 있다.

    우리나라 동성애자들의 짝짓기 무대로 소문난 서울 탑골공원 뒤편의 낙원동에서 동성애 부부 결혼식이 성대하게 치러질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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