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0

1999.11.25

비틀고… 꼬집고… 세기말에 던지는 ‘촌철살인’

인터넷 출판 연극 영화 TV 등 온통 풍자열풍

  • 김정희 기자 yhong@donga.com

    입력2007-03-09 12: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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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틀고… 꼬집고… 세기말에 던지는 ‘촌철살인’
    우리 시대에 ‘풍자 문화’의 꽃이 활짝 피고 있다. ‘무엇인가 빗대 재치있게 비판한다’는 ‘풍자’의 속뜻 그대로 인터넷이나 TV, 연극, 영화 할 것 없이 비틀고, 꼬집고, 흉내내고, 야유를 보냄으로써 빚어내는 웃음이 넘쳐나고 있다.

    최근 서점가에서 화제를 모으는 책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기’(열린책들 펴냄). 세상을 살짝 비틀어 봄으로써 촌철살인적인 풍자를 통해 웃음을 자아내는 움베르토 에코의 책이다. 400쪽이 넘는 볼륨에 ‘에코=어려운 책’이라는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베스트셀러 순위 10위권에 성큼 올라섰다. 이 책은 94년 이미 ‘연어와 여행하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지만 첫 출간 당시와 비교해 볼 때 이번에 독자들이 보인 반응은 가위 ‘폭발적’이다. “내용도 보완됐지만 제목이나 부제 자체에서 듬뿍 배어나는 풍자적 이미지가 폭넓은 독자층의 관심을 끌어모은 것 같다”는 게 출판사측의 분석이다.

    우리 문단에서 ‘풍자와 해학의 달인’으로 꼽히는 성석제씨의 ‘홀림’(문학과지성사 펴냄) 역시 발간 직후부터 주목받았다. 이 작품에서는 노름꾼, 술꾼, 제비족 등 ‘사회 주변부적’ 인물들이 진지하게 세상의 ‘이치’를 논하며 사회를 풍자한다. 지난 7월 발간된 시인 백주은씨의 시집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민음사 펴냄)도 만만찮은 풍자적 독설로 눈길을 끈 바 있다.

    연극계의 영원한 풍자 대상, 셰익스피어 ‘비틀어 보기’ 현상은 세기말 한국에서 역시 여전히 성행했다. 올 가을 무대에 오른 작품만 해도 ‘미친 햄릿’ ‘레이디 맥베스’ ‘햄릿 프로젝트’ 등 수편. 이들은 모두 원작을 ‘정공법’으로 표현하는 대신 ‘지금 여기’를 표현하기 위한 풍자의 도구로 셰익스피어를 선택한다.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며 연이은 성공을 거둔 히트제조기 장진 감독. 그를 ‘단순한 스타일리스트’나 발랄한 ‘재주꾼’에서 한발짝 넘어서게 하는 것 역시 그의 풍자 정신이다. 그는 ‘간첩 리철진’ ‘허탕’ ‘아름다운 사인’ 등을 통해 간첩, 죄수, 시체라는 ‘이상한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입을 빌려 현실의 부조리를 조롱하고 비판한다.



    ‘가운데일보’? 푸하하…

    ‘풍자’는 슬랩스틱과 더불어 코미디 프로그램이 가장 많이 채용해온 형식. 개그맨 김형곤에 의해 80년대부터 시작된 시사 풍자 코미디는 현재 KBS의 ‘시사터치 코미디 파일’, iTV의 ‘김형곤 쇼’ 등을 통해 면면이 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주 이들 프로에서는 ‘가운데일보’ ‘문이현 기자’를 잘근잘근 씹는가 하면, ‘부자유친’(夫子有親)을 ‘부자유친’(富者有親)으로 패러디, “평소에 부자와 친해둬야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신(新) 삼강오륜’ 등이 등장했다.

    그 외에도 SBS TV에서는 매일 저녁 8시40분마다 컴퓨터 애니메이션 캐릭터 ‘나잘난 박사’를 등장시켜 그날의 시사적 이슈를 꼬집는다. ‘진짜 같은 가짜’들이 득세하는 세상을 슬쩍 비꼰 프로그램 ‘진실게임’도 인기.

    그러나 TV에 방송되는 코미디나 시트콤 대부분이 한번씩은 채용하는 양식 ‘패러디’는, 엄밀한 의미에서 ‘풍자’와는 성격이 다르다. 풍자(satire)가 기존에 있던 것을 살짝 비틀고 변형시킴으로써 웃음과 함께 ‘비판’의 기능을 한다면, 패러디(parody)는 기존 형식을 우스꽝스럽게 흉내내거나 ‘ 빌려쓰는 데’ 머문 채 진전한 비판의식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패러디’는 그래서, ‘한바탕 웃고 나면 뒤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허탈감을 주게 마련이다.

    풍자가 ‘날카로운 비판의 대상’을 상대로 이뤄지는 것이라면 어째서 세기말, 대한민국에 풍자가 ‘뜨는’ 것일까. 문화평론가 이성욱씨의 말을 빌린다면, “풍자는 뻣뻣한(이념적-정치적으로 경직된) 사회일수록 활발히 이뤄진다”. 그런 의미에서 60년대 김수영시인이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자살이다”고 노래한 것이나, 70년대 김지하가 ‘구리 이순신’ ‘금관의 예수’ 등을 통해 ‘직설법’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풍자로 표현해낸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결코 당시만큼 ‘뻣뻣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김수영씨나 김지하씨가 ‘권위주의적 정권’이라는 단일하고 구체적인 대상을 향해 목숨을 걸 듯 비장하게 풍자했다면, 오늘날은 풍자의 대상도 덜 권위주의적이고 다양하며, 풍자의 형식 역시 훨씬 잡종적이고 해학적이다.

    사회적인 경직성은 점차 완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풍자가 대한민국 사회를 ‘풍미’하는 이유에 대해 사이버 작가 이기원씨는 이렇게 진단한다.

    “풍자란 작가(생산자)가 목에 핏대를 올리지 않고도 신랄한 자기 주장을 펼칠 수 있는 도구이자, 독자(수요자) 역시 별로 심각하지 않게 즐거워하며 취할 수 있다. 그만큼 ‘편한’ 비판 방식인 것이다. 게다가 현대사회는 갈수록 ‘완전한 의미의 창조’에 대해 비전이나 기대를 잃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자기 얘기를 하기 위해 남의 것을 적당히 흉내내거나 기존의 것을 차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작가 성석제씨 역시 “풍자의 힘은 풍자하는 대상의 권위력과 비례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의 풍자 대상은 결코 ‘강고한 권력’이 아니다. 대신 현재 예술의 풍자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 곳곳에 분산돼 고질화된 여러 가지 형태의 모순들이다. 풍자의 방식이나 대상이 다양화하고 있는 것이다” 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대, 이미 ‘풍자’는 정점을 지나쳐 ‘내리막길’에 접어든 것 같다. 요즘은 진정한 풍자보다는 오히려 패러디가 득세하는 세상이다. 풍자의 대상들은 너무 ‘시시해져’ 버리고, 굳이 풍자라는 양식을 빌리지 않아도 누구나 속을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뻔해지지 않았는가! 풍자의 대상이 ‘시시해진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는 물론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그 때문에 나도 앞으론 풍자 양식이 아닌 다른 걸 써야 할 것 같다.”‘상대가 시시해져서’ 더이상 풍자할 의욕이 안생긴다는 성씨의 말은, 풍자거리가 넘치도록 많은, 그래서 오히려 더 이상의 풍자가 불가능한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더없이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패러디의 성지’ 인터넷

    ‘망치일보’ ‘구라대학교’ 등 풍자사이트 봇물


    연극이나 서점가, TV의 풍자는 실상 그다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풍자문화가 이전 시대와 변별될 만큼 활성화된 곳은 다름아닌 인터넷. 인터넷 패러디 사이트의 원조 ‘딴지일보’(ddanji.netsgo.com)가 지난해 11월 창간돼 ‘문화적 충격’을 준 뒤 사이버 스페이스에는 수십개의 패러디 사이트가 잇따라 입성했다. 언론 매체를 패러디한 ‘망치일보’(www.hammer.co.kr), ‘디지털 수세미일보’ (www.sponge.co.kr), ‘디지털 신당일보’(www.yahak.co.kr), ‘갈도일보’(www.galdo. co.kr)를 비롯, 조계종을 패러디한 ‘데한블교조계중’(my.netian.com), 일류 명문대 중심의 교육구조를 비꼰 ‘구라대학교’(hugsvr.kaist.ac.kr), 청와대를 식당으로 패러디, ‘한나라탕’ ‘국민어회’ ‘자민전’을 요리하는 ‘청기와’(members.tripod.com/~vitaminC/index1.html) 등이 그것.

    인터넷에서 이렇게 ‘풍자’가 뜨는 이유는 인터넷이 지닌 ‘혁명적 소통양식’에 근거한다. 한 사람의 개인이 거대 언론이나 대기업 등과 똑같은 ‘발언권’을 갖고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인터넷은, 기존에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독점하던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기능을 각 개인들에게로 ‘분할 양도’ 하게끔 만들었다. 풍자가 꽃피기에는 더없이 알맞은 토양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 패러디 사이트 중 적잖은 수가 ‘딴지일보’를 흉내낸 ‘유사버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특정 명칭이나 용어 몇자를 바꿔치기한 ‘말장난’ 수준에 머물고 있어 안타깝다. ‘대안언론’ 이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무색케 하는 이같은 단순 패러디는, 평론가 이성욱씨의 표현에 따르면 “보이지 않는 속까지 뒤집어 핵심을 찌를 줄 모르는 엄한 장난”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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