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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맘이어도 괜찮아

조부모의 ‘손주 돌봄’, 사회적 가치 생각 해야 할 때

영국은 ‘손주 육아’를 연금 기여 기간에 포함시켜 노동 가치 인정

  • 전지원 서울대 국제이주와포용사회센터 선임연구원 latermotherhood@gmail.com

조부모의 ‘손주 돌봄’, 사회적 가치 생각 해야 할 때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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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의 끝자락이다. 한 해를 무사히 보낼 수 있게 도움을 준 분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오른다. 내게 가장 감사한 분을 꼽으라면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분이 있다. 시어머니다. 늦은 나이에 임신했을 때 나는 “요즘 어린이집이 잘돼 있다더라.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하면 된다. 어머니는 걱정 마시라”며 큰소리쳤다. 시어머니는 그저 별말씀 없이 빙그레 웃었다. 

출산 후 내 생각이 얼마나 순진무구한 것이었는지 매일 온몸으로 깨달았다. 육아는 그간 내가 해온 공부나 업무와는 차원이 달랐다. 24시간 풀타임으로,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내던져야 했다. 집 주변 어린이집은 단 한 곳도 빈자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대기를 걸어놨는데, 아이가 다섯 살이 된 최근에야 자리가 비었다며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시어머니가 우리 집에 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일은커녕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을 것이다. 출산 첫해 나는 일주일에 세 번, 시어머니가 오는 요일만 손꼽아 기다렸다. 아기 돌보기, 이유식 준비 같은 도움도 절실했지만, 무엇보다 그 사랑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아이가 두 돌이 지난 후 시어머니 혼자 아이를 봐주기 시작해 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는 지금도 시어머니 도움은 필수다. 남편은 ‘매일 야근’ 인생이라, 일이 늦게 끝나거나 출장을 가야 할 때 시어머니 말고는 기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손주 돌봄 증가는 세계적 현상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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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할아버지 덕분에 올 한 해도 무사히 보낸 딸, 아들,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가 한두 가정이 아닐 테다. 한 친구는 “업무량도, 경쟁도 적잖은 회사에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의 9할은 친정엄마”라고 말한다. ‘전업맘’도 예외가 아니다. 서울대 국제이주와포용사회센터가 실시한 2018년 한국 가족 돌봄 조사에서 ‘만 10세 이하 아동의 엄마들 중 본인이 아이를 돌보기 어려운 상황일 때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배우자(40.3%) 다음으로 조부모(34.5%)가 꼽혔다. 

조부모의 육아 참여 비중이 높아지는 것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영국 자선단체 ‘Age UK’에 따르면 50세 이상 조부모의 40%가 정기적으로 손주를 돌보는 것으로 나타났다(2017). 이 중 30%는 거의 매일, 38%는 주 3회가량 손주를 돌봤다. 2018년 ‘결혼과 가족 저널(Journal of Marriage and Family)’에 실린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에서도 영유아의 50%, 초등학생의 35%, 10대의 20%가 매주 정기적으로 조부모와 시간을 보낸다. 미국은퇴자협회(AART)에 따르면 1999년에는 8%, 2012년에는 15%의 조부모가 손주 돌봄을 한다고 응답했지만, 2018년에는 38%가 자신을 손주 돌봄자로 여긴다고 응답해 그 비중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관련 학계에 ‘집중 손주 돌봄(intensive grandparenting)’이라는 학술 개념이 새롭게 등장할 정도다. 독일 등 유럽 역시 국가별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조부모의 손주 돌봄 참여 비율이 50%가량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Igeland Szydlik, 2011). 



영미권 국가에서 조부모의 손주 돌봄 참여가 늘어나는 까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돌봄 공백을 메워 자녀들이 계속 일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또한 아동 돌봄 비용이 비싸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국 보험회사 로열 런던(Royal London)의 재정전문가 베키 오코너는 올해 ‘텔레그래프’의 한 칼럼에서 “조부모는 육아 참여를 통해 비싼 아동 돌봄 비용으로 일을 포기할 수도 있는 자신의 자녀(아이의 부모)가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며 “조부모의 도움이 없다면 한 달에 1000파운드(약 150만 원)나 되는 아동 돌봄 비용을 감당하면서 일하고 저축까지 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무급으로 손주를 돌봐주는 조부모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조부모의 손주 육아는 ‘심리적 웰빙’ 줘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김지영(왼쪽)과 친정어머니 김미숙. [사진 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김지영(왼쪽)과 친정어머니 김미숙. [사진 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

여러 해외 연구는 조부모의 손주 돌봄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를 조명한다. 한 예로 영국 옥스퍼드대의 한 연구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육아 참여가 손주의 정신적 어려움이나 친구 관계 문제의 발생 빈도를 낮추는 등 ‘심리적 웰빙’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밝혀냈다(Griggs 등, 2010). 조부모의 도움은 자녀 출산을 증가시키는 것으로도 나타났다(Thomese and Liefbroer, 2013). 

손주 돌봄이 조부모에게 미치는 긍정적 영향도 적잖다. 독일 함부르크-에펜도르프(Hamburg-Eppendorf) 대학병원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돌봄에 참여하는 조부모는 외로움이나 사회적 고립을 느끼는 비율이 낮고, 손주를 돌보지 않는 조부모에 비해 사회관계망이 넓은 것으로 나타났다. 스페인에서는 손주 돌봄이 조부모의 건강과 정신적 만족도를 높이고, 가족과의 애정 어린 관계 형성에도 기여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Triado 등, 2014). 

주의할 것은 이 같은 긍정적 영향은 조부모의 손주 돌봄이 ‘적절한’ 수준일 때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한 연구들은 예외 없이 ‘돌봄 부담이 너무 커지면 긍정적 효과는 사라지고 건강 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단서를 달고 있다. 손주를 돌보는 것이 자발적 기쁨을 넘어 강요된 부담으로 여겨질 경우 조부모의 스트레스와 피로를 높인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손주 돌봄이 적정한가. 이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아니, 적절한 수준의 돌봄이 존재하기는 할까 싶다. ‘애 보느니 밭 맨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세 살짜리 손주를 돌본다는 미국 ‘뉴욕타임스’의 한 칼럼니스트는 “손주를 돌보고 돌아온 날은 저녁으로 피자를 사 먹는다. 냉장고를 열 기운조차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돌봄은 단순히 아이와 함께 있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치우고 씻기고 옷을 입히다 보면 살림까지 하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늦맘 자녀의 조부모는 특히 더 고령이다. 칠순이 지난 시어머니는 손주를 보려고 우리 집에 오는 날이면 얼굴이 밝아진다. 집에서 쉬는 것보다 손주와 부대끼는 게 훨씬 좋다고 한다. 감기에 걸리면 안 된다며 독감예방주사를 비롯한 건강 관리에도 철저하다. 아무리 그래도 힘들지 않을 리 없다. 아이를 돌보다 내 입에서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올 때마다 ‘어머니는 오죽하실까’ 싶어 마음이 아프다. 조부모의 손주 돌봄에 의지하는 이들 가운데 이렇게 고맙고 죄송스러운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오랫동안 가슴에 남은 장면은 김지영의 엄마 ‘미숙’이 딸 지영을 위해 가게 일을 관두고 손녀를 돌보겠다고 했을 때 김지영이 자신의 외할머니에 빙의돼 엄마에게 “미숙아, 그러지 마”라고 한 장면이다. 누군가를 돌보려고 자기 인생을 더는 희생하지 말라는 매우 옳은 말. 그러나 현실에서 “어머니, 그러지 마세요”라고 옳은 말을 할 수 있는 여성이 한국뿐 아니라 미국, 영국, 독일 등에 몇이나 될까.


돌봄의 사회적 가치 제도적으로 인정해야

미국과 영국에서는 조부모가 손주를 돌보기 위해 일찍 은퇴하거나 노동시간을 줄여 연금 혜택 등 노후 소득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것이 사회 문제로 거론된다. 영국의 경우 200만 명가량의 조부모가 일찍 은퇴하거나 업무시간을 줄였다고 한다. ‘김지영의 엄마 미숙 씨’가 영국에도 꽤 많은 셈이다. 

이에 대한 영국의 ‘처방법’은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영국은 2011년부터 조부모가 12세 미만 손주를 돌보는 기간을 연금에 기여한 기간에 포함시키고 있다. 조부모의 손주 돌봄을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그 손실을 보전해주는 대안을 마련한 것이다. 또한 ‘Age UK’ ‘Grandparents Plus’ 같은 자선단체가 조부모 돌봄에 관한 연구를 지원하고,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에게 다양한 도움도 제공하고 있다. 

늦맘이 늘면서 고령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육아 참여 역시 증가하는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부모가 돼서도 불효한다’는 자식 세대의 죄송함은 각자가 짊어질 일만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조부모의 손주 돌봄을 지원하고, 이 돌봄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조부모 돌봄을 지원하면 돌봄 부담이 가족에게 고착된다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현 상황을 고려할 때 조부모가 지나친 부담에 시달리지 않고 손주를 돌볼 수 있도록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새해에도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등 육아에 참여하는 모두가 금세 지나가버리는 아이의 어린 시절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올 한 해도 사랑으로 돌봄에 힘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주간동아 2019.12.27 1220호 (p58~60)

전지원 서울대 국제이주와포용사회센터 선임연구원 latermotherhoo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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