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04

2019.08.30

정민아의 시네똑똑

가장 무더웠던 그해, 이카로스의 날개는 왜 녹아내렸을까

김보라 감독의 ‘벌새’

  • 영화평론가·성결대 교수

    yedam98@hanmail.net

    입력2019-08-30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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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 ㈜엣나인필름]

    [사진 제공 · ㈜엣나인필름]

    데뷔작으로 세계 예술영화계를 깜짝 놀라게 한 여성감독이 등장했다. 베를린국제영화제, 트라이베카필름페스티벌, 시애틀국제영화제,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 등에서 25개 상을 들어 올린 김보라다. 굳이 화려한 수상 경력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의 데뷔작 ‘벌새’는 분명 시대를 풍미할 작품성을 갖췄다. 

    1994년, 88 서울올림픽을 치르고 선진국 대열에 들어설 것이라는 희망과 인정 욕구로 한국 사회는 한창 들떠 있었다. 전 국민이 서울 강남을 열망하며 대단지 아파트로 이사 가고 싶어 했다. 북한 김일성이 사망했고, 전쟁이 날까 불안했다. 사상 최악의 더위를 시원한 레게음악으로 이겨보려고도 했다. 그해를 살아간 중2, 14세 은희는 지독한 성장통을 겪는다.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 슬하에서 강남의 제법 괜찮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은희네는 보편적인 중산층 그 자체다. 특출한 것도, 내세울 것도 없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꽤 많은 현금을 만지는 부모는 세 자녀의 교육에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고교생 언니(박수연 분)는 대치동 학원을 빼먹으며 연애를 하고 있고, 중학교 3학년 오빠(손상연 분)는 벌써부터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하느라 신경이 날카롭다. 춤을 연마하는 아빠(정인기 분)는 아마도 누군가를 만나는 모양이고, 엄마(이승연 분)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곤 한다. 


    [사진 제공 · ㈜엣나인필름]

    [사진 제공 · ㈜엣나인필름]

    가끔 노래방이나 콜라텍에도 가면서 마지못해 공부하는 은희(박지후 분)는 학교에서 날라리로 찍혀버렸다. 은희에게는 가슴 설레게 하는 남자친구가 있고, 마음이 딱딱 맞는 죽마고우가 있으며, 자기를 좋아해주는 학교 후배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대로일 리 없다. 실연, 절교, 변심, 무관심, 그리고 폭력은 은희의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때론 수치스럽고, 때론 분노하며, 때론 절망적이다.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할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이런 끝없는 감정의 파고를 넘나들던 어느 날, 은희는 명문대를 휴학하고 강사로 일하는 학원 여선생님(김새벽 분)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영화는 평범한 소녀의 성장담 위로 1994년의 거대한 사건을 겹쳐놓는다. 성수대교가 붕괴했다. 우리나라도 선진국이라는 들뜬 분위기를 단숨에 잠재운 이 안타깝고도 원통했던 기억은 은희의 개인사에 촘촘히 박혀 거대한 상흔으로 남는다. 



    영화에서 개인의 특수한 경험은 보편적인 모두의 기억으로 남는다. 영화를 보면서 나의 1994년이 하나씩 떠올랐다. 우리 모두가 이상하게 들뜨다 추락하고 말았던 그때 말이다. 영화가 촘촘하게 엮어내는 사회상 속에서 은희라는 낯선 아이를 따라 나의 젊은 모습으로 들어가 서성이고 있었다. 은희와 함께 애도하며 울었다. 

    대단한 영화고, 놀라운 예술가적 재능이다. 특정 시기의 집단 기억과 상흔이 서사적 완성도 안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학원 선생님과 중학생이 만들어내는 여자 대 여자의 멘토링 관계는 영화사상 가장 이상적이고도 아름다운 여자들 간 연대일 것이다. 김보라 감독의 차기작이 벌써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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