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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의 미식세계

한국 사과, 프랑스인 손길을 거쳐 상큼한 술로 태어나다

사과 와인 ‘시드르’

한국 사과, 프랑스인 손길을 거쳐 상큼한 술로 태어나다

충북 충주 ‘작은 알자스’에서 생산하는 사과 와인 ‘레돔 시드르’. [사진 제공·작은 알자스]

충북 충주 ‘작은 알자스’에서 생산하는 사과 와인 ‘레돔 시드르’. [사진 제공·작은 알자스]

분주한 5월이 저물고 있다. 근로자의 날을 시작으로 어린이, 어버이, 스승, 성년, 부부, 발명, 세계인, 바다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진 날과 부처님오신날, 그리고 화창함에 더 사무치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일도 있었다. 달력에 적힌 글자만 읽어도 숨이 차다. 

5월이 이토록 여러 이름표를 가진 이유는 봄과 여름 사이, 춥지도 덥지도 않은 좋은 기후 때문이리라. 5월이 끝나면 여름 문턱에 서게 된다. 요 며칠 찾아온 때 이른 더위의 매운맛을 보고 나니 지레 겁부터 난다. 무시무시한 더위가 오기 전 잠시 숨 고르는 시간을 갖고 싶다.


충주 땅에서 키운 사과로 직접 와인 담가

충북 충주 ‘작은 알자스’의 사과를 가는 강판. 작은 발효 탱크들. 2차 발효 시 생기는 찌꺼기를 병 입구로 모으는 기계. 완성된 시드르(왼쪽부터).  [사진 제공·김민경]

충북 충주 ‘작은 알자스’의 사과를 가는 강판. 작은 발효 탱크들. 2차 발효 시 생기는 찌꺼기를 병 입구로 모으는 기계. 완성된 시드르(왼쪽부터). [사진 제공·김민경]

이대로 흘려보내기 아까운 계절의 간극에 무엇을 하면 좋을까. 나는 어스름한 시간부터 자리 잡고 앉아, 잘 빚은 술 한 모금 마시며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싶다. 요즘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술 1순위는 ‘시드르(cidre)’다. 시드르는 사과로 빚은 술 가운데 와인과 만드는 방식이 같아 ‘애플 와인’이라고도 부른다. 과일에 증류주를 부어 두거나, 과일을 설탕에 재워 발효시키는 과일주와는 만드는 방식이 다르다. 

시드르의 고향인 프랑스에서는 100여 종의 사과로 시드르를 만든다. 개성 있고 맛 좋은 시드르가 지역마다 생산된다. 시드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당도, 산도, 기포의 느낌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며, 품질도 가지각색이다. 입맛에 맞는 시드르 한 잔이면 열 와인 부럽지 않은 매력이 있다고 하니 본토 맛이 궁금할 따름이다. 안타까운 점은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시드르 품목이 매우 적다는 것이다. 반면, 다행스러운 점은 우리나라에도 시드르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충북 충주에 가면 ‘작은 알자스’가 있다. 프랑스 알자스에서 지내다 한국으로 이주해온 도미니크 에어케(Dominique Herque)와 신이현 부부가 꾸려가는 양조장이다. 작물을 가꾸고, 술을 빚고, 시드르라는 낯선 술을 여기저기 알리며 살고 있다. 



비료와 농약으로 망가진 땅심을 되돌리고자 부부는 하루하루 전쟁처럼 치열한 날들을 보냈다. 하지만 부족한 시간과 인력으로 손수 키운 작물이 맥없이 부서지고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결국 좋은 시드르를 만들기 위해 건강하고 깨끗한 사과를 수소문하며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렇게 시드르를 빚었고 올해로 세 번째 시드르를 세상에 내놓았다. 

시드르는 일 년에 한 번 생산된다. ‘작은 알자스’의 시드르는 부사가 주요 재료이며 홍옥이나 홍로를 쓰기도 한다. 수확한 사과를 잘 세척해 물기를 뺀 다음 통째로 간다. ‘분쇄한다’고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강판으로 사과를 갈기 때문이다. 대형 강판이 빙빙 돌며 사과를 간다. 사과를 분쇄하는 것에 비해 시간은 걸리지만 즙이 훨씬 맑고 과육 크기가 균일하며 특유의 질감도 살아 있다. 

곱게 간 사과는 압착기로 옮겨 즙을 짠다. 압착기는 수많은 구멍이 뚫린 원통형의 기계인데 내부 가운데에 고무 심이 있다. 고무 심이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며 과육을 천천히 주무르는 역할을 한다. 압착기에 500kg 정도의 간 사과를 넣어 하루 종일 작업하면 400ℓ의 즙을 얻는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지만 과도한 힘이나 속도를 가해 즙을 얻는 것이 아니기에 풍미의 손상을 최소화한다.


일 년에 한 번 생산하는 시드르

‘시드르 로제’를 만드는 속 빨간 사과 레드 러브(왼쪽)와 발효 중 생긴 찌꺼기. [사진 제공·작은 알자스]

‘시드르 로제’를 만드는 속 빨간 사과 레드 러브(왼쪽)와 발효 중 생긴 찌꺼기. [사진 제공·작은 알자스]

사과즙은 곧바로 발효 탱크로 옮겨진다. ‘작은 알자스’에는 작은 발효 탱크가 5개 있는데, 시드르를 만들 때는 반드시 1개의 탱크를 비워둔다. 왜냐하면 여러 번 탱크갈이를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탱크에 들어간 사과즙에게는 잠시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드르를 만들기 위해 사과에 있던 천연 효모만으로 발효시키는데, 갈고 착즙되는 과정에서 효모가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해주는 시간이다. 

효모는 자그마치 3주라는 긴 휴식 시간을 가진 다음 일을 시작한다. 일정한 품질로 대량생산하는 와인 양조장에서는 인공 효모를 사용한다. 인공 효모는 과즙에 투입되자마자 격렬하게 일을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천연 효모는 죽고 만다. 또한 인공 효모는 과일 품질과 별 상관없이 과즙의 발효를 완성시킨다. 반면 천연 효모는 과일 품질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발효를 포기해버려 탱크 하나를 버려야 할 수도 있다. 인공 효모를 사용하면 실패 없이 일정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자연스러운 방식은 아니기에 ‘작은 알자스’는 오로지 천연 효모만 쓴다. 

사과즙은 섭씨 12~13도에서 겨우내 발효가 이뤄진다. 효모가 사과의 천연 당분을 먹으면서 발효를 촉진하는데, 그러다 보면 찌꺼기가 생긴다. 이 찌꺼기를 거르기 위해 탱크를 계속 갈아준다. 이 과정에서 찌꺼기와 함께 걸러지는 과즙의 양이 꽤 많다. ‘작은 알자스’는 찌꺼기와 함께 걸러낸 과즙을 따로 보관해 그대로 마시기도 하고, 식초를 만들기도 한다. 오렌지 컬러의 과즙은 꽤 먹음직스러우며 실제로 맛도 좋다. 

이듬해 4월까지 시드르의 1차 발효가 끝난다. 병에 옮겨 한두 달 동안 2차 발효를 거친다. 이때도 천연 효모는 부지런히 일하면서 찌꺼기를 만들어낸다. 이 찌꺼기를 제거한 다음 통통한 발포성(스파클링) 와인 병에 담고 뚱뚱한 코르크로 막으면 ‘작은 알자스’의 브랜드인 ‘레돔(lesdom) 시드르’가 완성된다. 병에 담고 나서도 3차 발효가 진행되므로 반드시 발포성 와인 전용 병과 코르크를 사용해야 안전하다.


달지 않고 청량한 맛, 입안에서 기포가 춤춰

시드르는 다양한 음식과 잘 어울린다. [사진 제공·김민경]

시드르는 다양한 음식과 잘 어울린다. [사진 제공·김민경]

레돔 시드르는 개나리 꽃물처럼 곱고 투명하다. 사과 당도가 12브릭스 정도라 알코올 함량이 5~6%로 낮은 편이다. 과일로 만든 술이지만 전혀 달지 않고 드라이해 청량감과 향긋함이 더욱 살아난다. 잔에 따를 때는 꽤 강렬하던 기포가 입안에 들어가면 잔잔하고 촘촘하게 춤을 춘다. 

곁들이는 음식도 크게 가릴 것이 없다. 화이트 와인과 어울리는 여러 요리는 물론이며 마른 과일, 치즈, 샤퀴테리(육가공품), 피자, 보쌈이나 족발, 부침개, 다양한 튀김 요리와 썩 잘 맞겠다. 빈속에 짜릿하게 식전주로 마셔도 좋고, 차게 해 한낮에 청량하게 한 잔 마셔도 부담이 없다. 한국에서 만드는 시드르가 이토록 맛있다면 머나먼 나라에서 빚은 시드르와 값비싼 샴페인은 잠시 잊어도 좋다. 

‘작은 알자스’는 일 년에 약 5000병의 과일 술을 생산한다. 그중 70%는 노란 시드르다. 30%는 신맛이 강하고 속이 빨간 사과(레드 러브)로 만드는 ‘시드르 로제’. 도드라지는 맛과 향은 내추럴 와인의 개성을 잘 담고 있다. 캠벨 포도를 사용하는 로제 스파클링도 생산한다. 로제 스파클링은 핑크색 꽃처럼 좋은 향이 나고, 깨끗하면서도 드라이한 맛과 상큼한 탄산이 가득하다. 이외에 ‘작은 알자스’에서 실험적으로 빚는 술이 몇 가지 더 있으나 우리가 시중에서 맛보려면 두어 해는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슨이 논문을 통해 발표한 ‘1만 시간의 법칙’은 이미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다. ‘작은 알자스’의 부부는 매일 10시간 이상씩 3년 동안 시드르를 만드는 데 열정을 바쳤다. 1만 시간을 채우고도 넘칠 만큼 공을 들인 것이다. 전국 각지의 포도주들을 마셔본 필자로서는 레돔 시드르가 눈물겹게 반가울 따름이다. 단지 맛 좋은 술을 빚어서가 아니다. 양조에 알맞도록 과일을 키우고, 전통 방식으로 와인을 빚을 줄 아는 도미니크 부부가 어쩌면 우리나라 포도주의 앞날에 든든한 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빛을 봐서다.


‘작은 알자스’의 도미니크 에어케-신이현 부부
[사진 제공·김민경]

[사진 제공·김민경]

어떤 와인을 추구하는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와인을 만들고 있다. 내추럴 와인은 장기 보존을 위한 무수아황산을 과도하게 넣지 않고, 천연 효모에게 발효를 맡긴다. 인위적으로 당을 첨가하지 않으며 필터링이나 여과 과정도 건너뛴다. 과일 본연의 힘과 시간으로 와인을 완성하는 것이다. 또한 자연에 순응하는 방법으로 농사를 짓고 그 수확물로 와인을 빚어야 한다.” 

레돔 시드르는 어디에서 맛볼 수 있나. 

“우리가 생산하는 술은 전통주 카테고리에 속하기 때문에 온라인으로 구매할 수 있다. 서울에서는 인사동의 친환경 유기농 한식당 ‘꽃, 밥에 피다’, 연희동의 한식 주점 ‘이파리’, 홍대 앞의 서양식 주점 ‘옥탑방 부엉이’에서 판매하고 있다. 

주소 충북 충주시 엄정면 도자기길 32






주간동아 2019.05.31 1191호 (p78~80)

  •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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