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60

2018.10.19

원포인트 시사 레슨

‘무희의 화가’ 드가의 파스텔화에 숨겨진 진실

어린 무희들의 비참한 삶을 포착한 냉정한 리얼리스트

  • 입력2018-10-19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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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가 드가의 ‘별’(L’Etoile·1877·오른쪽). 무대 뒤로 검은 턱시도의 남성이 어른거린다. 왼쪽은 드가의 ‘자화상’(1863). [www.edgar-degas.net, 위키피디아]

    에드가 드가의 ‘별’(L’Etoile·1877·오른쪽). 무대 뒤로 검은 턱시도의 남성이 어른거린다. 왼쪽은 드가의 ‘자화상’(1863). [www.edgar-degas.net, 위키피디아]

    올해 개관 40주년을 맞은 세종문화회관은 8월 프랑스 화가 에드가 드가(1834~1917)의 특별전을 기획했다 취소했다.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등 세계적 미술관의 소장 작품 100점을 모은 특별전이었다. 하지만 한때 북·미 정상회담 개최 여부가 불투명해지면서 작품 대여 절차가 늦춰졌고 결국 개막 이틀 전 취소 소동이 벌어졌다. 

    미술사에 어느 정도 상식이 있는 사람은 드가를 마네, 모네, 세잔, 피사로와 함께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로 기억한다. 그가 동년배인 그들과 함께 1874년 공동 전시회(마네는 불참)를 열었고, 이를 본 평론가가 조롱기 가득한 용어로 쓴 ‘인상주의(impressionism)’ 운동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 화가가 아니다

    하지만 드가의 그림은 인상파로 분류하기 어렵다. 인상파 화가는 대부분 햇빛에 의해 매시간 변화하는 순간을 영원으로 포착하는 데 집중한 풍경화가였다. 반면, 드가는 인체의 역동적 움직임을 포착하는 데 주력했고 인상파 화가들이 상상화라고 멸시하던 역사화에 심취했다. 드가가 인상파 화가들과 공유한 것은 선을 중시한 앵그르의 고전주의와 색채를 중시한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에 맞서 자신들만의 독창적 화풍을 개척하려 한 데 있었다. 실제 드가 자신은 스스로를 쿠르베의 전통을 계승한 ‘사실주의(realism)’ 화가로 규정했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비극적으로 요절한 반 고흐와 가장 오래 생존해 온갖 영광을 누린 모네에 가려 다른 인상파 화가의 삶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인상주의 화가에 대한 대중의 통념과 달리 드가는 은행가 집안의 맏아들이었고, 당시 최고 명문고인 루이 르 그랑 출신으로 법률가가 될 뻔한 엘리트 출신이었다. 인상파 화가 가운데 공부로는 일등이었다. 그가 역사화에 심취한 것도 역사에 대한 식견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부친은 맏아들의 예술적 재능을 간파하고 후원했다. 그래서 드가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유명 화가들의 원작을 맘껏 감상할 수 있었다. 화가로서 성공하기에 당대 최고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비록 말년에 시력 악화로 붓을 잡기 어려웠지만 그 덕에 드가는 서양미술사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벨라스케스, 렘브란트와 같은 반열에 오르는 화공(기술적으로 완숙한 화가)으로 추앙받는다. 



    그런 드가가 가장 많이 그린 소재가 발레리나였다. 유화와 스케치, 모노타이프(판화의 일종)까지 합쳐 드가의 발레리나 그림은 1500여 점이나 된다. 그래서 ‘무희의 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심지어 그의 그림을 토대로 발레리나를 꿈꾸는 소녀들을 위한 입문서의 하나로 ‘에드가 드가의 발레리나의 비밀’이란 아동용 미술책도 출간됐다. 

    그런데 이런 통념이 무참히 깨지고 있다. 미국 최대 미술정보사이트 아트티(Artsy)의 미술사 편집자 줄리아 월코프는 10월 1일 ‘드가의 발레댄서 이면에 숨은 추악한 진실’이란 충격적인 칼럼을 발표했다. 월코프는 여기서 어린 발레리나를 파스텔화로 포착한 드가의 그림은 발레리나에 대한 애정과 전혀 무관하며 인체의 동선을 포착하려는 예술가적 야망의 산물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드가가 파스텔화를 택한 것 역시 발레리나들의 동작을 빠르게 포착하고 수정할 수 있어서였으며, 모델이 된 어린 발레리나들에게 몇 시간씩 뒤틀린 발레 포즈를 취하게 하는 학대를 일삼았다는 주장이다.

    무희를 사랑하지 않았다

    ‘분홍과 초록 튀튀를 입은 무희들’(1890년 무렵). 역시 기둥 뒤로 검은 턱시도 차림의 남성 실루엣이 엿보인다. [www.edgar-degas.net]

    ‘분홍과 초록 튀튀를 입은 무희들’(1890년 무렵). 역시 기둥 뒤로 검은 턱시도 차림의 남성 실루엣이 엿보인다. [www.edgar-degas.net]

    또 당시 ‘작은 생쥐들(petits rats)’로 불린 발레단 소속의 어린 소녀들은 주 6일의 힘겨운 노동에 시달리면서 오페라극장 정기관람권을 소유한 부유한 남성들의 눈에 들어 팔자 한번 피는 것을 희망으로 삼은, 매춘문화의 희생자였다. 역사학자 로레인 쿤스는 ‘예술가인가 요부인가’라는 책에서 19세기 말까지 파리오페라극장발레단 소속 발레리나 가운데 어느 누구도 매춘 행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는 여성 성기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1866)의 숨겨진 모델이 은퇴한 파리오페라극장 발레리나 출신의 콩스탕스 케니오로 밝혀졌다는 9월 25일자 영국 신문 ‘가디언’의 보도와도 궤를 같이한다. 케니오는 이 그림을 의뢰한 주파리 오스만튀르크의 외교관 할릴 베이의 정부였는데, 프랑스 역사학자가 ‘춘희’의 작가로 유명한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편지에서 케니오가 문제의 그림 속 모델이라는 증언을 발견한 것이다. 

    당시 파리오페라극장이던 ‘팔레 가르니에’에는 무용수들이 공연 전 몸을 푸는 공간인 무용수대기실이 엄청나게 많이 설계됐다. 그 이유는 돈 많은 남성이 발레리나들의 몸매를 감상하면서 비즈니스를 하는 사교클럽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은 은밀히 매춘 거래가 이뤄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드가는 이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의 무희도를 자세히 보면 검은색 턱시도 차림의 얼굴 없는 남자가 그림자처럼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월코프는 이를 토대로 냉정한 사실주의자였던 드가가 세탁부와 모자판매원처럼 어린 발레리나의 비참한 현실을 화폭에 옮긴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이를 현실 고발의 일환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드가가 작은 생쥐들을 성적으로 착취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그는 당시 남성들도 기피할 만큼 여성혐오 발언을 많이 남겼다. 자신의 모델이 된 어린 무용수들을 ‘작은 원숭이 소녀들’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내가 여성을 동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고 그의 친구이자 화가인 피에르 조르주 잔니오가 증언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의 그림 속 무용수의 포즈는 아름답지만 그 얼굴을 자세히 보면 기괴하게 그려진 경우가 많다. 

    드가의 조각 ‘열네 살의 어린 무희’(1878~1881).

    드가의 조각 ‘열네 살의 어린 무희’(1878~1881).

    드가는 조각도 여러 편 남겼는데, 생전에 공개된 작품은 딱 하나뿐이다. ‘열네 살의 어린 무희’(1878~1881)라는 실물 크기의 밀랍조각상이다. 발레리나 복장을 입혀 전시된 이 조각은 당시 섹스 코드가 강했던 작은 생쥐를 너무 생생히 묘사했다는 이유로 비난 공세에 시달렸고, 그의 생전에 다신 공개되지 못했다. 작품 모델로 알려진 마리 반 괴템은 그 얼마 후 리허설을 너무 많이 빼먹었다는 이유로 파리오페라극장발레단에서 쫓겨나 자취를 감췄는데, 아마도 집으로 돌아가 세탁부이면서 매춘부였던 어머니와 언니의 길을 걸었을 공산이 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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