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20

2018.01.03

강양구의 지식 블랙박스

시민과학센터, 너의 이름을 기억할게!

20년 이어온 시민단체의 자진 해산, 그 사연은?

  • 입력2018-01-02 18: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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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돌아보면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상당수는 시간이 지나면 그저 그런 삶의 한순간으로 잊히겠지만, 어떤 일은 그 존재감이 갈수록 또렷해질 것이다. 장담컨대 2017년 11월 10일 서울 서촌에서 지난 20년간 활동을 조용히 정리하고 접은 한 시민단체의 사연은 갈수록 아쉬움을 자아낼 것이다. 

    그 시민단체 이름은 ‘시민과학센터’. 외환위기 직전이던 1997년 11월 22일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으로 시작한 이 단체는 20년 만에 자진 해산했다.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때, 이 자리에서 시민과학센터가 걸어온 길을 여러 독자와 공유하고 싶다. 

    시민과학센터의 정체성은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과학기술 민주화.’ 거칠게 배경을 설명해보자.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해 절차적 민주화를 획득한 이후 한국 사회는 정치뿐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영역에서 민주화가 심화해가고 있다.

    왜 민주주의가 과학기술 앞에서 멈춰야 하는가

    1997년 11월 22일 시민과학센터(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 창립총회 모습. 김환석 초대 소장(국민대 교수)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왼쪽). 시민과학센터는 2004년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서울에서 ‘전력 정책의 미래에 대한 합의회의’를 열었다. 원자력 에너지의 미래를 시민이 직접 참여해 결정하는 모델을 이미 실험한 것이다. [사진 제공·강양구]

    1997년 11월 22일 시민과학센터(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 창립총회 모습. 김환석 초대 소장(국민대 교수)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왼쪽). 시민과학센터는 2004년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서울에서 ‘전력 정책의 미래에 대한 합의회의’를 열었다. 원자력 에너지의 미래를 시민이 직접 참여해 결정하는 모델을 이미 실험한 것이다. [사진 제공·강양구]

    지난 30년간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얼마나 심화했는지는 그 자체로 중요한 토론 주제다. 그 가운데 유독 외면받은 영역이 바로 과학기술이다. 과학기술은 1970년대나 현 21세기나 경제발전의 수단일 뿐이다. 오죽하면 헌법도 과학기술을 ‘국민 경제발전’의 도구로 규정했을까(제127조). 

    시민과학센터는 바로 이런 흐름에 반기를 들면서 등장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민주화가 심화해야 한다면 과학기술은 왜 예외가 돼야 하는가?’ 지난 20년간 시민과학센터가 걸어온 길은 바로 이 질문에 답하고, 또 실천해온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성취는 단체의 작은 규모를 염두에 둔다면 결코 적지 않았다. 



    시민과학센터는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해 크게 세 가지 실천에 힘을 쏟았다. 먼저 관료, 정치인, 과학기술자가 독점해온 과학기술 분야의 의사결정 과정에 일반 시민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다양한 시민 참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시민 참여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곧바로 적용 가능한 제도까지 디자인하고 실험했다. 

    알다시피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신고리원전 5, 6호기 공사 중단을 놓고 이른바 ‘공론조사’ 형태의 숙의민주주의 모델을 실험했다. 바로 이런 숙의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과학기술 영역의 시민 참여 모델을 199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 소개하고,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 같은 제도를 직접 실험한 곳이 바로 시민과학센터였다. 

    시민과학센터는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구실도 했다. 과학기술을 경제발전의 종속변수로 놓고 ‘돈만 된다면’ 정치, 사회, 문화에 미칠 부작용 따위는 아랑곳없이 육성해야 한다는 주류의 논리와도 싸워야 했다. 연장선상에서 이 단체는 1990년대 후반부터 생명 복제 연구에 정부가 올인(all-in)할 때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이런 브레이크 걸기는 결국 2004년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이어졌다. 눈치 빠른 독자는 짐작하겠지만, 이 싸움은 2005년 이른바 ‘황우석 사태’로 연결됐다. 당시 황우석 박사가 난자를 불법매매하고 또 학술지 ‘사이언스’에 조작 논문을 실었던 일을 앞장서 파헤치는 데도 시민과학센터가 중요한 구실을 했다. 

    안타깝게도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시민과학센터의 실천에 (그 자신의 처지도 열악한) 과학기술자 다수가 도끼눈을 떴다. 어떤 이는 ‘박사학위도 없는’, 심지어 ‘과학기술을 전공하지도 않은’ 보통 시민이 과학기술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사실에 분노했다. 또 어떤 이는 ‘정답’이 있는 과학기술에 ‘민주화가 가당키나 하냐’며 냉소했다. 

    시민과학센터는 이런 과학기술자를 상대로 끊임없이 과학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을 환기하고,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강조했다. 넓게 보면 이런 논쟁 속에서 2016년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같은,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역할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단체가 탄생했다.

    과학기술 민주화 실험은 계속돼야

    그렇다면 시민과학센터는 이런 성취에도 왜 자진 해산을 선택했을까. 한국 시민단체 대다수가 겪는 문제로부터 시민과학센터도 자유롭지 못했다. 작은 사무실을 유지하고 상근직원 한 명을 두기도 벅찬 열악한 재정 상황, 나이가 들어가는 기존 멤버를 대신할 다음 세대 새로운 멤버의 부재 등. 

    시민과학센터가 지난 20년간 쌓아온 성취도 되레 부담이 됐다. 시민과학센터가 논리를 개발하고 제도를 제안한 과학기술 영역의 시민 참여는 이제 정부에서 추진할 정도가 됐다. 시민과학센터의 의견과 긴장관계에 있긴 하지만, 과학기술계 곳곳에서 과학기술의 사회적 영향을 예민하게 인식하고 그에 따른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시민과학센터 처지에서는 20년간 활동을 정리하고 질적 변화를 해야 할 시점이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이 단체는 과감하게 자진 해산을 선언했다. 초기 활력을 잃은 채 지리멸렬하게 명맥만 잇기보다 아예 조직을 없애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찌 보면 20년간 그 나름대로 축적해온 상당한 발언권(권력)을 과감히 포기한 것마저 이 단체의 정체성에 어울리는 듯하다. 

    이렇게 시민과학센터는 20년간 활동을 뒤로하고 역사로 남았다. 걱정이다. 문재인 정부마저 허깨비 같은 ‘4차 산업혁명’을 운운하는 지금, 이 단체가 해야 할 역할이 더욱더 커졌으니까. 앞으로 과학기술이 일상생활 곳곳에서 예기치 않은 부작용을 일으킬 때마다 이 단체의 부재가 아쉬울 것이다. 

    더 늦기 전에 20년 전 시민과학센터가 그랬듯, 젊은 세대가 새로운 ‘시민과학센터’ 결성을 추진했으면 좋겠다. 2018년 새해에는 시민과학센터의 재탄생을 알리는 소식을 기대한다. 만약 그런 기관이 탄생한다면 20년 전 11월 22일 막내로 참여했듯, 다시 한번 기꺼이 멤버가 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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