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07

2017.09.27

구가인의 구구절절

상처 딛고 아픈 역사를 조명하는 방식

김현석 감독의 ‘아이 캔 스피크’

  • 채널A 문화과학부 기자 comedy9@donga.com

    입력2017-09-25 17: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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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별다른 정보 없이 시사회에 갔다 눈물을 훔치고 왔다는 이가 많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감독 김현석) 얘기다. 나문희, 이제훈 주연의 코미디 정도로 수식되던 영화에는 이제 ‘묵직한 이야기를 품은 휴먼 코미디’ ‘웃음으로 끌어안은 아픈 역사’ 같은 수식어가 붙는다. 김윤석, 이병헌이 출연하는 ‘남한산성’과 할리우드 영화 ‘킹스맨 : 골든 서클’을 위협하는 추석 연휴 기대작이라는 말도 나온다. 확실한 건 ‘아이 캔 스피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의 삶을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조명한 영화라는 점이다.

    주인공 나옥분(나문희 분) 할머니는 명진구청 공무원들에게 기피 대상이다. 시장에서 수선가게를 홀로 운영하는 그가 20년 동안 신청한 민원 건수만 8000건. 시장 파수꾼을 자처하는 그는 영어공부에 남다른 열의를 보이지만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아 의기소침해 있다. 그러던 중 구청에 새로 온 9급 공무원 박민재(이제훈 분)가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에게 영어 선생이 돼달라며 조른다. 처음에 거절하던 민재는 특별한 계기로 영어 수업을 맡고, 할머니의 상처에 대해 알게 된다.



    영화는 중반까지 할머니가 간직한 상처를 내세우지 않는다. 깐깐한 옥분 할머니와 그 못잖은 원칙주의자 민재가 만나고 충돌하는 과정, 주변 공무원들의 에피소드를 코믹하게 그려낼 뿐이다. 예를 들어 ‘서면’ 위치를 묻자 이문세 노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을 대는 등의 아재개그가 난무하는 식이다. 역사와 개인이 만나는 지점을 무게 잡지 않고 웃음과 함께 버무리는 건 김현석 감독의 특기이기도 하다. 김 감독은 영화 ‘스카우트’(2007)에서 1980년 대학 야구부 직원이 당시 광주일고 괴물투수 선동열을 스카우트하려고 광주를 찾는 내용을 통해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그려냈다. 



    스크린에서 일본군 위안부 여성의 삶을 조명한 것은 1995년 변영주 감독의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 시리즈부터였고, 극영화는 최근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개봉한 ‘귀향’은 저예산 극영화로 관객 385만 명을 모았고, 최근 확장판인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재개봉했다.

    다만 이들 극영화가 위안부를 묘사하는 방식은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 속 여성들은 평면적이고, 때로 그들에게 행해진 만행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를 성적 대상으로 만들어 2차 피해가 생긴다는 비판도 나온다. ‘아이 캔 스피크’가 돋보이는 건 이 지점이다. 옥분 할머니는 단순히 피해자가 아니라, 상처를 가졌으되 상처를 딛고 일어나 성장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 영화에서 할머니의 파트너가 9급 공무원 민재라는 설정도 꽤 흥미롭다. 고교생 동생과 함께 사는 청년 가장 민재는 한때 건축가를 꿈꾸며 미국 유학을 떠났지만 집안 사정으로 꿈을 포기하고 9급 공무원이 됐다.

    김헌식 평론가는 ‘동주’ ‘암살’ ‘귀향’ ‘군함도’ 등 최근 일제강점기 영화가 흥행하는 배경에 대해 어쩔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좌절을 겪는 당시 젊은이의 모습을 현 청춘들이 공감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아이 캔 스피크’ 속 위안부 할머니 옥분과 민재의 우정 역시 그와 무관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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