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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의 심중일언

“헤겔이 열린사회의 적이라는 상식은 틀렸다”

‘헤겔과 그 적들’ 펴낸 남기호 교수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헤겔이 열린사회의 적이라는 상식은 틀렸다”

[지호영 기자]

[지호영 기자]

‘헤겔은 일반 교육을 받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안다고 믿는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철학은 마르크스 역사 이론의 선조이지만, 유물론자인 마르크스와는 달리, 실재는 궁극적으로 정신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정립/반정립/종합의 과정에 따라 실재가 발전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그는 관념론자였다. 또한 그는 프로이센 국가 체제를 찬양하여, 그것이 신의 작품이며 완벽하고 인류 역사 전체의 절정이라고 주장했다. 프로이센의 모든 국민은 무조건 국가에 충성할 의무가 있으며, 국가는 국민을 원하는 대로 취급할 수 있다. 절대자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린 무언가를 찬양함으로써 헤겔은 독일 민족주의, 권위주의, 군국주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2006년 국내 번역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을 쓴 미국 철학자 테리 핀카드가 서문 제일 앞머리에 쓴 글이다. 그리고 줄바꾸기가 된 뒤 이렇게 쓰여 있다. ‘위의 단락은 첫 문장만 제외하고 모두 옳지 않다.’ 

고등학교에서 국민윤리가 필수과목이던 시절 헤겔(1770~1831)이 칸트로부터 출발한 독일관념론의 완성자이자 최고봉이라고 딸딸 외운 사람들, 그리고 대학에서 마르크스사상을 통해 헤겔을 접한 운동권 출신에게는 깜짝 놀랄 내용이다. 하지만 무려 1087쪽이나 되는 이 방대한 책이 번역되고 13년이 지났건만 헤겔에 대한 국내 인식은 별반 바뀌지 않았다. 대다수 사람은 여전히 헤겔을 관념론자이자 프로이센 국가철학자, 그래서 20세기 독일 나치의 탄생을 초래한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사상가로 알고 있다. 

하지만 올해 들어 우리 출판계에서도 이런 헤겔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고 ‘헤겔 르네상스’의 도래를 예고하는 책이 쏟아지고 있다. 1월 곤자 다케시의 ‘헤겔의 이성·국가·역사’, 2월 피터 싱어의 ‘헤겔’, 3월 이광모의 ‘다시, 헤겔을 읽다’, 4월 전대호의 ‘정신현상학 강독 1’, 그리고 5월 출간된 남기호의 ‘헤겔과 그 적들’까지 거의 한 달에 한 권씩 헤겔 관련 책이 출간되고 있다. 6월에는 독일 헤겔 연구가 클라우스 피베크가 헤겔 법철학을 자유 관점에서 분석한 ‘자유란 무엇인가 : 헤겔 법철학과 현대’가 출간될 예정이다. 

헤겔 철학 입문자에게는 헤겔의 방대하면서 심오한 사상을 200쪽 분량으로 명쾌하게 설파한 호주 출신의 미국 철학자 피터 싱어의 ‘헤겔’을 권한다. 이 책을 읽노라면 헤겔이 영미권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자유의 철학자임을 깨닫게 된다. 헤겔은 ‘역사철학강의’(1837)에서 “세계사란 바로 자유 개념의 발전이다”라고 천명했고, ‘법철학 개요’(1820)에선 “법은 자유의지의 현존”이라고 규정했다. 그의 대표작인 ‘정신현상학’(1807)에서도 정신이 실재를 직접 알고 실재와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는 절대지에 도달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정신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처럼 자유의 가치를 누구보다 옹호한 사상가가 왜 국가주의자 내지 전체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걸까. 이를 이해하려면 헤겔이 어떤 시대를 살았고 그의 주요 논적이 누구였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다. 이에 대해 가장 정치한 주장을 담은 책이 ‘헤겔과 그 적들’이다. 헤겔이 왜, 그리고 어떻게 곡해됐는지에 대해 듣고자 저자인 남기호(49·사진)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전담)교수를 만났다. 5월 21일 짙푸른 녹음에 둘러싸인 연세대 위당관 1층 그의 연구실에서였다.


자유의 철학자

“헤겔이 열린사회의 적이라는 상식은 틀렸다”
남 교수는 연세대 철학과 출신으로 2000년 독일 보훔대로 유학을 떠나 헤겔의 법철학 개요 인륜성(Sittlichkeit·지틀리히카이트) 개념에 대한 논문으로 200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헤겔이 독창적인 의미 부여를 한 인륜성이란 과연 어떤 개념일까. 

“독일에는 도덕을 뜻하는 단어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흔히 모럴이라고 말하는 모랄리트(Moralit·도덕성)고 다른 하나가 지틀리히카이트입니다. 현대 독일인도 그 둘을 혼용해 씁니다. 칸트도 그러했는데, 유독 헤겔만은 이를 구별해 썼습니다. 영어로 번역할 때도 ‘ethic of life’라고 쓸 만큼 서양 사람들에게도 생소한 말입니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유가적 전통에 비춰보면 그 개념이 인륜이라는 말과 잘 들어맞습니다. 단순히 내면의 도덕적 심성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화해 객관적 사회제도가 돼 계승되는 사회적·국가적 질서까지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한국에선 이 개념이 익숙하기 때문에 서구 다른 나라보다 오히려 헤겔의 인륜성 개념을 더 잘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입니다.” 

인륜성 개념은 헤겔 철학의 중핵을 이룬다. 헤겔은 계몽주의 사상가나 독일관념론의 선구자 칸트가 이성과 그로부터 도출된 의무를 너무 절대시한 탓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동체의 전통을 질식시키는 과오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프랑스혁명이 공포정치로 귀결된 것 역시 합리성의 이념에만 충실해 이를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 속에 어떻게 접목하고 발효시킬 것인가를 숙고하지 않은 결과라고 봤다. 헤겔은 또 영미권의 자유주의 사상에 대해서도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자유만 추구한다”고 비판했다. 그에게 자유는 구속받지 않을 자유, 선택할 개별적 자유가 아니라, 그 구성원들이 자유로운 정신을 구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공동체적 자유다. 

“헤겔 사상은 영미권에서 얘기하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대립구도로 보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헤겔은 영미권의 자유주의를 원자론적 개인주의라고 비판하지만, 동시에 전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공동체주의에도 반대합니다. 헤겔의 자유주의는 사적인 영역에 제한돼 있는 자기목적을 스스로 극복해 공동체의 보편적 목적에 부응하는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조온 폴리티콘(zoon politikon)’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 정확한 뜻은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게 아니라, 인간은 폴리스와 같은 공동체를 구성해 살아가는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로서 얘기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 태어났다는 본성으로서 얘기한 것입니다. 인간은 공동체를 통해서만 자신의 본성을 잘 실현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공동체는 인간의 자기본성이 실현되는 객관적 지반인 거죠.” 

헤겔의 이런 자유사상은 애국심에 대한 독특한 시각에서도 확인된다는 것이 남 교수의 설명이다. 헤겔은 국가 위기에서 비범한 희생을 발휘하는 것은 집단적 애국심에 불과하다고 봤다. 반면 자신의 자유로운 삶의 활동이 정치공동체 내에서 일상적으로 보장되는 상태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그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싸움에 나서는 것을 보편적 애국심으로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헤겔이 ‘법은 자유의지의 현존이다’라고 말한 것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자유가 관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화한 것이 법이라는 말입니다. 법이란 게 인간의 자유의지를 외적으로 실현하면서 다른 개별자들과 공존할 수 있는 모든 체계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개인의 무분별한 욕망을 억제하기 위한 필요악이 법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욕망 통제의 관점에 서면 사회적 무질서가 만연했을 때 이를 제어하고자 법적 강제를 취하는 조치가 가능해집니다. 계엄령, 비상조치, 삼청교육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거죠. 하지만 법이 곧 자유라는 헤겔의 관점에 서면 이는 불가능해집니다. 흥미롭게도 헤겔은 칸트와 마찬가지로 범죄자의 범죄 역시 그의 자유의지의 발현으로 봤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의 자유의지를 해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범죄자의 법을 범죄자 자신에게 돌려주는 것이 형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매년 프랑스혁명을 자축하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독일 뉘른베르크 김나지움(중고교) 교장 시절의 헤겔. 베를린대 철학과 학장 시절의 헤겔. 독일 베를린에 있는 헤겔의 묘비. 독일 화가 야코프 슐레진저가 헤겔이 죽기 직전 완성한 초상화(1831). [사진 제공 · 사월의책]

왼쪽 위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독일 뉘른베르크 김나지움(중고교) 교장 시절의 헤겔. 베를린대 철학과 학장 시절의 헤겔. 독일 베를린에 있는 헤겔의 묘비. 독일 화가 야코프 슐레진저가 헤겔이 죽기 직전 완성한 초상화(1831). [사진 제공 · 사월의책]

자유의 철학자로서 헤겔의 면모는 프랑스혁명을 바라보는 그의 생각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열아홉 살 때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튀빙겐대 학생이던 헤겔은 ‘영광스러운 새벽’이라고 환호했고, 스위스 베른에서 귀족가문의 가정교사 생활을 할 때도 프랑스혁명 상황을 정리한 소식지를 꼬박꼬박 받아 봤다. 남 교수에 따르면 그 소식지 이름이 ‘미네르바’였다고 한다. 헤겔이 ‘법철학 개요’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아오른다”고 해 유명해진 그 이름이 프랑스혁명 소식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 1806년 헤겔이 강사생활을 하던 예나지역이 프랑스군에 점령된 다음 날, 그는 말을 타고 가는 나폴레옹을 보고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적어 보냈다. “세계정신이 말을 타고 도시를 통과해 군대를 사열하는 광경을 봤다네. 여기, 한 점으로 수렴한 이가 말을 타고 세계로 뻗어나가 세계를 다스리는 광경은 실로 경이롭더군.” 1814년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자신의 삶에서 ‘가장 비극적인 것’이라고 불렀던 그는 죽기 직전까지 매년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된 날 포도주를 기울이며 축하했다고 한다. 

이 점은 프랑스혁명을 처음부터 싫어했던 영국 철학자이자 보수주의 창시자인 에드먼드 버크와 차별된다. 헤겔과 버크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하고 정치적 자유를 중시했지만 급진적 변화보다 온건한 개혁을 지지한 점에서 닮았다. 

“헤겔은 프랑스혁명이 내세운 근대화된 이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혁명이 공포정치로 흐르는 것을 보고는 그 실현 방법에 대해선 비판적 거리를 두게 됩니다. 그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이 버크입니다. 헤겔은 1793년 독일어로 번역된 버크의 ‘프랑스혁명에 관한 고찰’(1790)을 읽고 시각을 교정합니다. 그럼에도 헤겔은 프랑스혁명의 진보적 이념만큼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순화되고 절제된 언어를 사용했다고 봐야 합니다.” 


[사진 제공 · 사월의책]

[사진 제공 · 사월의책]

그런 헤겔에게 왜 반동적 보수주의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니게 된 걸까. ‘헤겔과 그 적들’을 읽어보면 일종의 착종이 발견된다. 헤겔과 동시대인으로 자유주의자였던 파르하겐은 ‘헤겔은 철두철미하게 입헌주의적이고, 프로테스탄트적이며, 자유주의적이고, 프랑스혁명에 대한 공감으로 가득한 사람’이라고 봤다. 실제 헤겔을 독일 베를린대 철학과 학과장로 임명한 프로이센의 총리 하르덴베르크와 교육장관 알텐슈타인은 나폴레옹의 영향을 받아 프로이센을 입헌군주제로 바꾸려 한 자유주의자들이었다. 

반면 당대 헤겔의 주된 논적들은 빈체제 성립 이후 프랑스혁명으로 투입된 개혁에 반대하고 왕정복고를 주장한 보수주의자들이었다. 왕정복고(Restauration)라는 용어의 제창자였던 카를 루트비히 폰 할러(1768~1854)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자연법칙에 부응한다며 세습영주국가를 옹호한 철학자다. 헤겔이 적극 옹호한 헌법 제정에 부정적이던 법학자 프리드리히 카를 폰 사비니(1779~1861)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황태자 시절 스승이었고 빈체제 시기 법무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을 수행했다. 베를린대 교수 자리를 놓고 헤겔과 경쟁했던 야코프 프리드리히 프리스(1773~1843)의 경우는 헌법 제정을 강력히 옹호한 자유주의자였지만 독일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유대인을 철저히 배격하자는 인종차별주의자이기도 했다. 헤겔은 훗날 히틀러를 연상케 하는 인종차별주의와 민족정서에 기초한 심정윤리학이 사이비철학이라고 비판했다.


포퍼는 몰랐고, 마르크스는 틀렸다

“헤겔 시대의 독일은 2가지 흐름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침공에 맞서 20여 개가 난립하던 독일을 하나의 민족국가로 통일하자는 민족주의와 프랑스혁명의 근대적 혁신을 수용하자는 자유주의입니다. 이율배반적인 두 사조가 엉켜 민족자유주의라는 게 형성됩니다. 그 주축이 1815년 예나대에서 태동해 전국적인 대학생조직으로 발전한 부르셴샤프트입니다. 헤겔은 자유주의적 개혁은 지지했지만 배타적 민족주의에는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부르셴샤프트와 관련된 친구나 제자가 위기에 처하면 남몰래 도움을 줬습니다만, 부르셴샤프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습니다. 그러자 부르셴샤프트 가운데 헤겔을 어용학자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그중 한 명이 1857년 ‘헤겔과 그의 시대’를 펴낸 루돌프 하임입니다. 하임은 헤겔의 저서 중에서 프로이센과 국왕에 대한 찬사만 교묘하게 발췌해 그가 절대왕정의 철학자라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하임은 이후 프로이센 중심으로 통일전쟁을 수행한 비스마르크의 열혈 추종자가 됐습니다.” 

사실 헤겔의 저술은 ‘정신현상학’과 ‘대논리학’(1812) 정도를 빼면 ‘철학백과요강’(1817)과 ‘법철학 개요’처럼 대부분 강의용으로 집필된 것이다. 게다가 1818년 이후엔 모든 출판물의 국가 검열을 의식해야 했다. 그래서 구체적인 강의 내용은 1970년대 이후 출판되기 시작한 제자들의 노트 필기 내용을 비교하는 과정을 통해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헤겔 유족의 허락하에 그의 육필원고까지 검토한 하임의 악의적인 책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결과가 초래됐다. 

“나치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할 사상가로서 니체와 함께 헤겔의 사상을 검토했습니다. 그러다 헤겔의 사상이 자신들과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나치의 법학자로 불리는 카를 슈미트가 계속 자유에 대한 내용을 뺀 채 헤겔 사상을 얘기하는 바람에 헤겔은 나치의 사상가라는 편견이 확산됐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냉전 상황에서 발표된 카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이런 편견과 왜곡을 검증 없이 수용하면서 헤겔이 전체주의 사상가라는 이미지를 공고화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카를 마르크스가 있다. 헤겔이 죽고 6년 뒤 베를린대 철학과에 입학한 마르크스는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역사철학’을 접하고 감화됐지만 헤겔 철학을 물구나무 세우는 방식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창안하면서 헤겔에겐 그 대척점에 선 관념론자라는 딱지를 붙였다. 하지만 주인(자본가)과 노예(프롤레타리아)의 역설, 인정투쟁, 변증법, 역사발전론, 소외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개념은 모두 헤겔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철학적으로 유물론의 반대는 유심론이죠. 관념론의 반대는 실재론이고요. 헤겔은 한 번도 자신을 관념론자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실제로도 실재론적 요소가 많습니다. 자신의 철학을 관념론이라고 규정한 사람은 칸트(비판적 관념론)가 유일하고, 피히테는 후기엔 실재론으로 기울었으며, 셸링은 처음부터 관념론과 실재론의 통합을 시도했습니다. 헤겔은 자신의 철학을 사변철학, 구체적으로는 대립적 개념을 통일성 속에서 사유하는 철학이라고 말했습니다. 변증법의 철학자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후대 철학자들이 이런 헤겔의 사상을 자기 입맛에 맞게 변형해 내놓았기 때문에 오해가 확산된 부분이 있습니다.”


헤겔의 미소

독일에서 햇수로 9년을 살며 헤겔을 연구한 남기호 교수는 “헤겔은 정이 많고 사교적인 인물로 스위스 베른에서 가정교사 시절 와인에 눈떠 당시 독일에서 나는 최고급 와인을 애음했다”고 헤겔의 인간적 면모도 함께 소개했다. [지호영 기자]

독일에서 햇수로 9년을 살며 헤겔을 연구한 남기호 교수는 “헤겔은 정이 많고 사교적인 인물로 스위스 베른에서 가정교사 시절 와인에 눈떠 당시 독일에서 나는 최고급 와인을 애음했다”고 헤겔의 인간적 면모도 함께 소개했다. [지호영 기자]

이런 헤겔 연구는 독일에서 현재 3세대를 맞고 있다는 것이 남 교수의 설명이다. 1세대가 헤겔 사후 그가 발표한 책을 엮어 전집을 편찬한 헤겔의 우인(友人)들이고, 2세대인 20세기 초 학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헤겔 텍스트의 정전화 작업을 펼쳤다. 헤겔 강의를 들은 학생들의 필기 노트까지 반영해 1990년대 20여 권 분량의 강의록이 출판되고 이를 토대로 미발간 원고까지 엮은 전집이 2014년 돼서야 완간된다. 이런 서지학적 작업을 통해 헤겔의 진면목이 재발견되면서 2000년대 이후 3세대 학자들이 헤겔의 이론을 연구하고 현대화하는 작업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헤겔에 관한 심층적인 연구는 21세기 들어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남 교수는 “지금까지 칸트에 대한 연구가 책 한 권 분량이라고 한다면 헤겔 관련 연구는 한두 쪽밖에 안 된다”고 표현했다. 독일 고전철학의 최고봉과 관련해 이제 겨우 측량만 끝난 상황으로, 다양한 등반로 개척이 이제 겨우 시작된 셈이다. 그 봉우리의 신비함에 대해선 기사 서두에 언급한 테리 핀카드의 글로 대신하겠다. 

‘매우 기이하게도, 그의 철학은 이미 여러 차례 단호한 사망 및 퇴출 선고를 받았으며, 이미 오래전에 극복된 사상이라고 선언되었다. 그러나 역시 매우 기이하게도, 죽었다는 시체는 계속해서 부활해 다시 나타나고 있다. 현대의 어느 프랑스 철학자는 모든 현대 철학자들의 가장 큰 불안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철학자들이 아무리 많은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 하더라도 그 길들은 결국 끝이 막혀 있는데, 그 끝에는 항상 헤겔이 미소 지으며 기다리고 있다.’






주간동아 2019.05.24 1190호 (p64~69)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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