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대학, 직장의 서열화가 심화되면서 무한경쟁에 놓인 20대 사이에서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왼쪽). 2007년 정리해고 철회와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농성하고 있는 KTX 승무원들.
20대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들은 전국 대학을 한 줄로 세워 이른바 ‘SKY’와 ‘지잡대’로 구별하고, 한 대학 안에서도 과별로 우열을 나누며,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차별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화를 요구하거나, 취업시장에서 지방대 출신이 서울지역 대학 출신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할 때 앞장서 반대하는 이 가운데 상당수가 20대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인류 역사에 서열이 없었던 적은 없다. 신분에 따른 서열은 오래전부터 인간을 괴롭혔고, 자본주의 경제가 자리 잡으면서 일상화됐다. 자본주의는 ‘성과에 따른 차등적 보상’이라는 능력주의 모델을 중요 이념으로 삼고 있다. 개인의 생산성을 순위에 따라 평가하고 이에 걸맞는 보상을 주면, 이에 호응해 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증가해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의 노동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부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
다만 능력주의를 사회에 적용할 때는 전제가 있다. 경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이 공정해야 하는 것이다. 공정성은 ‘기회, 과정, 결과’의 평등을 뜻한다. 우리가 ‘사각의 링’에서 누군가와 경쟁한다고 할 때, 동일한 훈련 기회가 주어진 상태에서 비슷한 체급의 상대와 시합하는 게 ‘기회의 평등’이다. 공정한 판정을 하는 심판이 존재하는 것이 ‘과정의 평등’이고, 누군가 크게 다치기 전 시합을 중단하는 것, 또 다쳤다면 제대로 된 치료를 해주는 것, 아울러 승패에 상관없이 약속된 그리고 현실성 있는 개런티를 지급하는 것이 바로 ‘결과의 평등’이라 할 수 있다. 이 조건을 모두 갖추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여러 나라는 보완책을 마련한다. 대표적인 것이 복지로 대변되는 사회안전망이다. 이는 ‘결과의 평등’을 사회에 안착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순위는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아래쪽의 삶=시궁창’이 돼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하든 ‘인간의 가치’가 훼손되면 안 된다는 철학이 사회에서 공유돼야 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순위에 대한 개인의 집착이 그리 크지 않다. 잘하면 주변의 박수를 받고 돈도 많이 벌지만, 잘하지 못해도 삶이 구렁텅이로 추락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부의 희생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특히 ‘결과의 평등’에 관한 오해가 엄청나다. ‘결과의 평등’은 패자가 “나도 승리수당을 달라!”고 하는 게 아니다. 누구나 인간답게 살 만한 보상을 받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경쟁에서 진 자가 최저임금 정도를 받는 노동에 종사한다 해도,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을 받지는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최저임금이 매우 적고, 전체 노동자의 11.4%가 이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다(2013년 기준). 이는 일본(2.1%), 네덜란드(0.3%)에 비해 현저히 높은 수치다. 일본은 네덜란드에 비해 힘들어하는 사람이 더 많을 수밖에 없고, 한국 상황은 그런 일본보다 5배나 더 심각한 수준인 것이다. 게다가 한국은 이런 ‘비정상’의 정상화를 요구하는 사람을 ‘노력은 하지 않고 떼만 쓰는 자’로 취급한다. ‘더 불평등한 사회’는 그렇게 탄생한다.
20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대학 서열표.
이런 한국에서 경쟁을 그저 ‘잘하면 좋은 것’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높은 순위를 확보하지 않으면 인생이 끝장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순위는 서열이 돼 개인을 지배한다. 오늘날 20대들은 이런 한국 사회를 ‘헬(Hell·지옥)조선’이라고 부른다.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를 지옥이라고 하는 건 그 사회를 지배하는 개념, 이를테면 ‘서열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풍토’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다는 뜻이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발생한다. 사회에 대한 희망이 없기에 오히려 서열에 더 집착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20대들은 한국 사회가 이상하다는 걸 알고는 있다. 그런데 이를 의심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그들의 부모부터 보자. 이들은 평생 서열에 중독된 채 살아왔다. 20평형대 아파트에 살면서 40평형대 아파트를 우러러봤고, 자녀가 명문대에 합격하면 지나치게 기뻐하고 그렇지 않으면 지나치게 의기소침해하면서 학력 서열화에 집착해왔다. 주변인이 취업하면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를 따져 사람을 평가하는 것 역시 이들 부모세대의 특징이다.
20대들이 거쳐 온 학교 교육은 또 어떠했는가. 초등학교에서는 줄넘기조차 등급화해 수치심을 준다. 일반고 학생은 특수목적고에 가지 못한 패배자 취급을 당한다. 대학에서도 자본주의의 순위경쟁을 비판할 학문은 이미 권력을 잃었다. 20대들이 대학에서 듣는 자본주의에 관한 내용은 ‘어쩔 수 없다’가 전부다. ‘멘토’라면서 20대 곁을 맴도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이를 악물고 노력해’ 높은 서열에 올라서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없는 곳에서 개인이 선택할 길은 순응뿐이다. 특히나 아직 취업 문턱을 넘지 못한 20대는 자신에게 주어진 레일을 쉽게 이탈할 수 없다. 그러니 더욱 예민해진다. 죽도록 노력은 하는데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서 폭발 직전이다.
20대의 서열 집착은 여기서 발생한다. 자신이 서열 때문에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누군가가 ‘정규직으로 전환해달라!’ ‘지방대라고 불이익을 받으면 안 된다!’고 요구하는 것이 곱게 들릴 리 없다. 20대에게 이들의 요구는 ‘노력하지 않은 자’의 무임승차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부단히 들었던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앞세워 서열 문제가 공론화되는 걸 막는다. 당연히 ‘헬조선’은 굳건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