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에 있는 한 면세점 앞이 노동절을 맞아 방한한 중국 유커들로 북적이고 있다.
서울 시내면세점은 면세점 중에서도 알짜배기로 꼽힌다. 외국인 관광객 대부분이 서울에 몰리고, 공항면세점에 비해서도 임차료가 적게 들어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고가 입찰방식을 적용하는 공항면세점과 달리 관세청이 특허심사위원회 심사를 거쳐 직접 사업자를 선정하기에 정부에는 매출 수수료만 내면 된다. 대기업 운영 면세점은 매출액 기준 0.05%가 특허수수료로 부과되고, 중소·중견기업 운영 면세점은 0.01%가 부과된다.
서울 시내면세점 대기업군 신규 사업자 입찰 2곳에는 호텔롯데와 호텔신라 같은 기존 사업자를 비롯해 내로라하는 유통기업들이 뛰어들었다. 현대산업개발-호텔신라 합작법인인 HDC신라면세점을 비롯해 롯데면세점, 신세계DF, SK네트웍스, 이랜드면세점, 현대백화점 합작그룹 현대DF, 한화갤러리아타임월드 등 7곳이 참여했다. 후보지도 홍대 부근, 용산, 여의도, 동대문, 강남 등으로 다양하다.
중소·중견기업 몫의 신규 사업권은 한 자리라 경쟁이 더욱 치열하다. 세종면세점(세종호텔), 유진DF·C(유진기업), 청하고려인삼, 신홍선건설(제일평화컨소시엄), 파라다이스, 그랜드동대문DF(그랜드관광호텔), 서울면세점(키이스트와 시티플러스 합작법인), 중원산업(중원면세점), 동대문듀티프리(한국패션협회), SM면세점(하나투어컨소시엄), 하이브랜드듀티프리, 심팩(SIMPAC), 듀티프리아시아(삼우와 씨그널엔터테인먼트 합작법인), 동대문24면세점(동대문 굿모닝시티) 등 14곳이 참여했다.
관세청 관계자는 “고용과 투자를 촉진하고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신규 특허를 하는 것”이라며 “이러한 취지에 적합한 사업자를 선정하고자 면세점 운영인의 경영능력과 투자능력에 중점을 둔 투자촉진안을 활용해 평가한다”고 밝혔다.
신설·신규 업체는 사업계획서나 기존 사업 분야 실적으로 평가가 이뤄진다. 관세청이 공개한 평가 기준에서 가장 배점이 높은 항목은 경영 능력(300점)이고, 그다음으로 배점이 높은 건 특허보세 구역 관리 역량(250점)이다. 유통시장을 장악한 대기업들이라 이 항목들에서는 큰 변별력이 없어 보인다. 따라서 △관광 인프라 등 주변 환경 요소(150점) △경제·사회 발전을 위한 공헌도(150점) △기업이익의 사회 환원 및 상생협력 노력 정도(150점) 등에서 승패가 갈릴 확률이 높다.
적과의 동침도 불사
기존 면세사업자인 호텔신라는 5월 25일 현대산업개발과 합작법인 ‘HDC신라면세점’을 출범하면서 한류·관광·쇼핑을 결합한 세계 최대 도심형 면세점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의 전략적 선택에 대해 ‘적과의 동침’ ‘신의 한 수’라는 평가가 나온다. HDC신라면세점은 용산 아이파크몰 내 지상 3~7층 2만7400㎡에 들어설 계획이다. 사업권을 따내면 국내 최대 규모인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1만800㎡)보다 넓은 면세점이 탄생하게 된다.
면세점업계 1위인 롯데면세점은 서울 시내면세점 6곳 중 3곳을 이미 갖고 있는 상황이다. 독과점 논란을 의식한 듯 중소 면세사업자인 중원면세점과 상생지원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동대문 피트인을 후보지로 정했다. 별도의 합작법인을 설립하지 않고 각각 대기업, 중소·중견기업군에 입찰한 점이 눈에 띈다. 양사 모두 사업권을 따내야만 목표로 하는 ‘복합 면세타운’을 만들 수 있다. 롯데면세점이 운영하는 소공동 본점과 잠실 월드타워점의 운영기한이 올해 만료되는 점도 이번 입찰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부산에서 시내면세점과 공항면세점을 한 곳씩 운영하는 신세계그룹은 국내 면세점 시장에서 20~30%에 불과한 개별 관광객 비중을 자사 시내면세점에서는 50%까지 끌어 올리겠다는 계획이다. 면세사업 전문법인 신세계DF를 따로 세우고 후보지로는 신세계백화점 명동 본점을 선택했다. 이베스트투자증권은 신세계그룹이 서울 시내면세점을 낙찰받을 경우 추가 발생 매출액은 영업면적 고려 시 초년도 약 6000억 원 규모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SK네트웍스는 23년간 워커힐면세점을 운영해온 경험과 역량을 바탕으로 정보통신기술(ICT)을 접목한 쇼핑 환경과 한류 문화를 접목한 콘텐츠로 다른 업체들과 차별화를 꾀한다는 방침이다. 동대문 케레스타를 사업 대지로 선정했으며 SK텔레콤, SK플래닛, 11번가 등 그룹 주요 계열사와의 협력을 통해 면세점과 동대문 주변 상권을 모바일네트워크로 연결하는 사업 운영계획을 밝혔다.
시내 혹은 공항면세점을 운영하는 다른 기업들과 달리 이랜드그룹과 현대백화점은 면세점 운영 경험이 없어 관리능력 평가에서 불리하다. 그러다 보니 면세점 순이익의 일부를 기부한다는 공약도 내세웠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중소·중견기업과 손잡고 합작법인 현대DF를 설립했다. 현대DF의 후보지인 서울 강남구 삼성동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현대백화점은 모두투어, 서한사(앰배서더호텔), 엔타스듀티프리, 현대아산, 에스제이듀코, 제이앤지코리아 등 6개 중견·중소기업과 손잡고 합작법인 현대DF로 입찰에 나섰다. 대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강남 지역인 삼성동 무역센터점을 후보지로 골랐다. 면세점 사업에서 강남과 강북의 균형 발전이 필요하다는 오너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중소·중견기업을 주주사로 참여케 해 상생 협력모델을 강조한 경우는 처음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한편, 면세점 영업이익의 20% 이상을 매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기부금 비율을 액수로 환산하면 5년간 300억 원가량이 될 거라는 게 사측 설명이다.
평가 잘 받으려 뒤늦은 기부 행진
‘자선사업 실적’과 ‘임직원 사회봉사 실적’ ‘영업이익 대비 기부금 비율’ 등도 관세청의 주요 평가 기준에 포함된다. 영업이익 대비 기부금 비율로만 보면 한화갤러리아타임월드가 가장 우세하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한화갤러리아의 지난해 기준 영업이익 대비 기부금 비율은 5.54%로 7곳 중 가장 높았던 반면, 롯데그룹은 0.64%에 그쳤다. 호텔신라는 감사보고서에 기부금 항목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기업들이 뒤늦게 기부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SK네트웍스의 1분기 기부금은 10억1900만 원으로, 전년 동기 800만 원과 비교하면 1만2737%나 증가했다. 현대산업개발의 기부금은 1분기 5억2500만 원으로, 전년 동기 900만 원에 비해 5833% 늘었다. 호텔롯데의 1분기 기부금은 3억8200만 원이었는데, 이는 전년 동기 7100만 원에 비해 538% 증가한 수치다. 현대백화점의 1분기 기부금은 9억6367만 원으로 전년 동기 2억311만 원에 비해 474%를 더 냈다. 다만 신세계그룹은 1분기 7억9500만 원으로 지난해 같은 분기 6억6800만 원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한화갤러리아도 1분기 2억1452만 원으로 전년 동기 1억9661만 원과 비슷했다. 이랜드리테일은 지난해 1분기 2400만 원에 비해 올해 1분기에는 1900만 원으로 줄었다.
‘공정거래를 위한 노력 정도’도 평가 대상인데 이에 롯데그룹과 신세계그룹이 긴장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서울지검) 첨단범죄수사2부는 3월 롯데쇼핑 본사에서 롯데마트, 롯데백화점, 롯데시네마 등 사업본부로 사용처를 알 수 없는 거액의 자금이 유입된 것을 확인하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국세청은 5월 19일 탈세, 비자금 조성 등 비리 의혹 조사를 주로 진행하는 조사4국 직원들을 신세계 계열사인 이마트로 보내 세무조사를 벌이고 있다.
면세점 사업권을 따내는 건 기업에게는 분명 호재다. 기획재정부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제출한 ‘2014년도 전국 보세판매장 매장별 매출액’에 따르면 시내면세점의 지난해 매출액은 5조3893억 원으로 2013년보다 32.2% 증가했다.
백화점, 대형마트 등이 저성장하며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면세점은 꾸준한 성장세를 보여왔고, 중국 관광객의 유입도 지속될 것으로 예측된다. 중국 국가통계국 2014년 국민경제사회발전통계 발표에 따르면 중국 내 사회소비품 소매판매 총액은 전년 대비 12.0% 증가한 26조2394억 위안(약 4686조3000억 원)으로 가격 요소를 제외한 실제 증가폭은 10.9%였다. 중국인의 소비구조가 향유형으로 바뀌는 추세로 교통·통신 및 의료건강에 지불한 금액이 전년 대비 각각 0.6%, 0.3% 증가했고, 관광으로 인한 소비 성장세도 두드러져 해외관광객이 전년 대비 18.7%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이랜드그룹은 세계 최대 면세 기업 듀프리, 중국 최대 여행사 완다그룹과 함께 ‘이랜드 면세사업 지원을 위한 협약식’을 맺었다.
이번 입찰 전쟁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영세상인 사이에서는 면세점 사업권을 어느 기업, 어느 지역에서 따가느냐가 초미의 관심사다. 6월 2일 용산 전자상가에서 만난 한 컴퓨터·정보기술(IT)기기 판매업자는 “면세점이 들어서면 기존 매장들이 정리될 거라는 이야기가 상인들 사이에 파다하다. 이미 몇몇 매장은 아이파크몰로부터 재계약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들었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오후 동대문 피트인에서 만난 한 소매업자는 “동대문을 후보지로 삼은 업체가 많고, 중국인 관광객도 많은 편이라 아마 케레스타나 피트인에 면세점이 들어서지 않을까 싶다. 기존 상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불안하다. 업종이 겹치면 장사를 접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반면 동대문 쇼핑상가 인근에서 음식점을 하는 상인은 “지금도 개별로 여행하는 중국인들이 여행책자를 보고 식사하러 찾아오는데 면세점이 들어서 유동인구가 늘면 단체손님도 더 늘어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정철 한양대 관광학부 교수는 “중국인들은 주로 한국에 쇼핑 관광을 하러 온다. 명품 쇼핑 외에도 국내 식료품과 공산품, 의류 등이 인기가 많다. 관광객들이 면세점을 이용하면서도 줄을 오래 서야 했고 불편함이 있어 기존 면세점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인프라를 조성하는 건 여러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중국인들의 소득이 늘고 있고, 관광 수요도 증가하고 있기에 지금 대비 10배 이상 관광객이 국내로 유입될 여지가 있다. 장기적으로도 면세사업은 호황을 누릴 것”으로 전망했다.
전미영 서울대 소비자학과 연구교수는 “단순히 중국인 관광객 외에도 국내 소비자의 해외여행이 늘면서 내국인이 이용할 수 있는 면세점이라는 새로운 유통채널이 생겨나게 된 것”이라며 “백화점 마트에 이어 아웃렛, 면세점으로까지 유통채널 다변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바라봤다. 전 교수는 “이제는 단순히 쇼핑이 아니라, 쇼핑하러 간 김에 문화를 누리고 식사도 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늘었다. 면세점이 들어서는 지역은 유동인구가 늘면서 서비스업종 등의 상권이 크게 발달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해 서울 소공동 롯데면세점 매출은 1조9000억 원이었다. 그룹 설립 30여 년 만에 롯데백화점 본점(소공점) 매출인 1조8000억 원을 뛰어넘은 것이다. 이번에 시내면세점 사업권을 따내면 5년간은 안정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7월 말 신규 시내면세점 사업자가 돼 웃는 곳은 어디가 될까.
업계에서는 기존 면세점이 있는 지역보다 새로운 지역에 사업권을 줄 확률이 높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지역 상권 부흥을 위한다면 면세점이 포화상태인 중구보다 용산이나 마포, 영등포 등에 사업권을 줄 확률이 높다”고 전망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기존에 시내나 인천국제공항에 자리 잡은 호텔롯데, 호텔신라보다 신규 사업자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관세청의 평가 기준과 배점이 기존 사업자들에게는 유리하지만 신규 사업자들은 사업계획서나 그간의 사업 실적으로 평가받아야 하기에 상대적으로 불리하다. 그 때문에 합작법인이나 업무협약 형태로 변화를 도모한 기존 사업자들의 선정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