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게 살고 있어요. 세 살 된 아이, 남편, 친정엄마랑 지지고 볶으면서.”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박경희(33·사진) 씨가 말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출렁였다. 한 손을 뻗어 쓸어 올리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그 평범함에 대해, 자연스러움에 대해 듣고 싶었다.
박씨를 만난 곳은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이다. 내과 전문의인 그는 이곳에서 천식 알레르기 환자들을 진료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상황이 달랐다. 그때는 박씨가 환자였기 때문이다. 2009년 3월, 그는 바로 이 병원에서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았고, 환자복 차림으로 링거병을 끌며 병원 복도를 걸어 다녔다.
당시 내과 레지던트였던 그에게 암은 갑자기 닥친 시련이었다. 48시간 내내 깨어 있어도 끄떡없을 만큼 튼튼하고, 담배는커녕 술도 입에 대지 않은 그였다. 그러나 암은 어느 날 불쑥 찾아왔다. 발견했을 때는 이미 한쪽 가슴을 절제해야 할 만큼 중한 상태였다. 담당의사는 박씨에게 “5년 후 살아 있을 확률이 50%”라고 했다.
그도 알고 있긴 했다. 암 진단을 받은 뒤 관련 논문을 찾아본 것이다. 그의 가슴에 자리 잡은 ‘삼중음성 유방암(triple negative breast cancer)’은 예후가 좋지 않았다. 재발률과 전이율도 높았다. 그는 “다른 환자들처럼 병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라면 막연한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게 안 됐다. 침상 이름표에 적힌 ‘만 26세’라는 글씨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고 했다. ‘내게 서른 살이 올까’ ‘다시 의사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연애는 어떻게 하지, 결혼은, 아기는…’ 하는 갖가지 고민도 그를 괴롭혔다.
6년이 지난 지금, 이 모든 걱정은 옛날이야기가 됐다. 박씨는 어느새 서른을 훌쩍 넘겼고, 투병 중 사랑을 확인한 연인과 가정을 이뤘으며, 2013년 두 사람 사이에 귀여운 아들이 태어났다. 항암치료 중 속절없이 빠졌던 머리카락도 다시 길고 아름답게 자라나 바람에 나부낀다. 그의 이 ‘평범한 삶’이 얼마나 많은 젊은 암환자에게 희망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그래서 봄날, 그와 마주 앉았다. ‘당신은 얼마나 평범한가’를 묻기 위해서였다.
“암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암 치료 후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재발하는 사람을 많이 봐왔거든요. 제가 걸린 암이 아직 충분히 연구되지 않은 종류이기도 하고요. 만약 재발한다면 어떤 치료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사들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아요.”
그는 “여전히 내 상태에 대해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삶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제는 암에 대한 걱정보다 현실에 대한 생각, 아이를 잘 키우고 일과 가정을 조화롭게 꾸리는 것 같은, 그 또래 여성이 으레 하는 고민을 더 자주 한다. 잡곡밥을 챙겨 먹고,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꼭 운동하려고 노력하지만 이 역시 유난할 게 없다. 박씨는 이 평화를 찾은 배경으로 ‘정해진 치료를 열심히 받은 것’을 들었다.
투병 중 사랑 확인
그의 암은 발견 당시 이미 상당히 진행한 상태였다. 먼저 항암치료를 받고, 한쪽 가슴 전절제수술을 받은 뒤 다시 한 달에 걸쳐 방사선치료를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림프부종 등 부작용이 발생해 재활의학과를 다녔고 신경정신과, 안과, 산부인과 진료도 받았다.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초등학생 시절 ‘선수 해도 되겠다’는 말을 들을 만큼 수영을 잘했고, 중학생 때까지도 학교 계주대회가 있으면 맡아 놓고 선수로 출전했던 그였지만 체력이 곧 바닥났다. 지하철역 계단조차 오르기 힘들 만큼 지쳐버렸을 때, 그는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실은 수십 번 했어요. 치료받는 내내, 혼자 속으로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과 싸워야 했죠. 혹시라도 암이 재발하면 이 모든 과정을 다시 밟아야 할 거라는 게 상상만으로도 끔찍했어요. 모든 치료를 잘 받으면 완치될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데, 그 믿음을 이어 나가는 게 힘들었어요.”
하지만 그는 버텼다. 가장 큰 힘은 주위에서 왔다. 박씨는 레지던트 생활 중 암 진단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실이 자연스럽게 주위에 알려졌다. 함께 병원에 근무하는 친구, 선후배, 교수들까지 모두 그를 지켜봤다. 환자 사이에도 이야기가 퍼졌다. 내과 전공의로 병실 회진을 돌며 암환자를 보던 의사가 자신들과 같은 처지가 돼 항암제를 맞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들의 응원과 격려는 투병생활 내내 박씨에게 큰 힘이 됐다.
그의 초·중·고교 동창이던 남편도 친구를 통해 박씨의 투병 소식을 듣고 손을 내밀었다. 반복되는 입원과 퇴원 때면 소리 없이 찾아와 병실을 지켰고, 박씨의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회복되면 어디든 데리고 가 바람을 쐬주려 했다. 그리고 암 치료가 끝날 무렵, 슬며시 마음을 털어놓았다.
“실은 오랫동안 저를 좋아했다고 하더라고요. 대학 때도 한 번 고백하려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대요. 상상도 못한 얘기였죠. 그런데 좋았어요. 제가 아픈 것, 한쪽 가슴이 없는 것, 치료 경과가 좋지 않을 수 있는 것…. 이 모든 걸 그 친구는 다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오래 고민하지 않았어요. 그런 이유 때문에 마음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몸 때문에 마음까지 아프게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박씨는 “또 연애한다고 다 결혼하게 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래서 쉽게 생각했다”며 밝게 웃었다. 그 용기가 박씨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줬다.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 부모님’으로 알고 지내던 시부모도 한 마디 반대 없이 그를 며느리로 받아들였다. 박씨는 결혼 과정에서 힘든 일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몸에 맞는 웨딩드레스를 찾기 힘들더라”고 할 정도로 씩씩하고 유쾌했다. 그는 “돌아보면 처음 암 선고를 받았을 때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병을 숨기지 않은 게 참 잘한 일이었다. 투병 과정을 공개함으로써 정말 많은 정서적 후원과 지지를 받았다. 그것이 암환자에게는 항암치료 이상의 힘이 된다”고 했다.
또 하나 그를 버티게 한 건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는 암 치료를 마치자마자 병원에 복직했고, 전문의 과정을 밟았다. “쉼 없는 삶으로 돌아갔다 암이 재발하는 건 아닐까 두렵기도 했지만, 환자 시절 경험한 걸 바탕 삼아 더 좋은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했다.
“인턴 시절 제 꿈은 암환자를 보는 종양내과 의사가 되는 거였어요. 암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선생님들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죠. 하지만 레지던트가 돼 막상 암환자들을 만나니 두려운 마음이 들더군요. 감정적으로 의존하는 환자들이 부담스러워 ‘친절한 의사보다 실력 있는 의사가 더 좋은 의사’라고 생각하며 그분들을 냉정하게 대하기도 했습니다.”
진심으로 웃는 의사
그러나 바로 그, ‘감정적으로 의존하는’ 암환자가 된 경험은 그의 생각을 다시 한 번 바꿔놓았다. 환자에게 가장 고마운 사람은 실력 있는 의사가 아니라 진심 어린 미소를 보여주는 의사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박씨는 “암환자는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의사 표정을 가장 먼저 보게 된다. 그걸 통해 이 사람이 오늘 내게 어떤 얘기를 할까, 지금 가져온 것이 좋은 소식일까 나쁜 소식일까를 가늠하게 된다. 의사의 표정 하나에 환자 마음이 요동친다는 걸 알고부터는 늘 ‘웃고 살자’고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다만 자신의 경험 때문에 환자들이 지나친 기대감을 갖게 될까 봐 전공만은 암과 거리가 먼 쪽으로 택했다. 암환자를 끊임없이 마주해야 하는 게 그 자신에게 트라우마가 된 것도 알레르기내과를 선택한 한 이유다. 박씨는 “복직 후 처음엔 유방암을 전공하려 했다. 그런데 함께 주사실에 누워 있던 분들이 내 환자가 되는 상황이 힘들더라. 나와 같은 증상을 가진 분들의 예후가 나빠지는 것도 감정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그 대신 그는 먼저 투병 과정을 거친 사람으로서 자신에게 암에 대해 묻는 이들의 질문에는 어떻게든 답을 주려 노력한다고 했다. 언론 인터뷰에 나선 것도 지금 암으로 고통받는 이에게, 이 힘겨운 치료의 끝이 과연 있을까 걱정하는 이에게 “암에 걸렸던 사람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잘 살아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세 살배기 아들이다. 박씨는 “함께 집에 있을 때 내가 잠시 주방에 가기라도 하면 금방 엄마를 찾으며 보챈다.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내가 건강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웃었다. 자신이 병원에서 일하는 사이 그 아이를 돌보느라 고생하는 친정엄마, 소중한 남편을 위해서도 그는 더 잘 살고 싶다고 했다. 그 마음이 지금 그의 ‘평범한 삶’을 지켜주는 힘이었다.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박경희(33·사진) 씨가 말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출렁였다. 한 손을 뻗어 쓸어 올리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그 평범함에 대해, 자연스러움에 대해 듣고 싶었다.
박씨를 만난 곳은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이다. 내과 전문의인 그는 이곳에서 천식 알레르기 환자들을 진료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상황이 달랐다. 그때는 박씨가 환자였기 때문이다. 2009년 3월, 그는 바로 이 병원에서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았고, 환자복 차림으로 링거병을 끌며 병원 복도를 걸어 다녔다.
당시 내과 레지던트였던 그에게 암은 갑자기 닥친 시련이었다. 48시간 내내 깨어 있어도 끄떡없을 만큼 튼튼하고, 담배는커녕 술도 입에 대지 않은 그였다. 그러나 암은 어느 날 불쑥 찾아왔다. 발견했을 때는 이미 한쪽 가슴을 절제해야 할 만큼 중한 상태였다. 담당의사는 박씨에게 “5년 후 살아 있을 확률이 50%”라고 했다.
그도 알고 있긴 했다. 암 진단을 받은 뒤 관련 논문을 찾아본 것이다. 그의 가슴에 자리 잡은 ‘삼중음성 유방암(triple negative breast cancer)’은 예후가 좋지 않았다. 재발률과 전이율도 높았다. 그는 “다른 환자들처럼 병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라면 막연한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게 안 됐다. 침상 이름표에 적힌 ‘만 26세’라는 글씨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고 했다. ‘내게 서른 살이 올까’ ‘다시 의사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연애는 어떻게 하지, 결혼은, 아기는…’ 하는 갖가지 고민도 그를 괴롭혔다.
6년이 지난 지금, 이 모든 걱정은 옛날이야기가 됐다. 박씨는 어느새 서른을 훌쩍 넘겼고, 투병 중 사랑을 확인한 연인과 가정을 이뤘으며, 2013년 두 사람 사이에 귀여운 아들이 태어났다. 항암치료 중 속절없이 빠졌던 머리카락도 다시 길고 아름답게 자라나 바람에 나부낀다. 그의 이 ‘평범한 삶’이 얼마나 많은 젊은 암환자에게 희망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그래서 봄날, 그와 마주 앉았다. ‘당신은 얼마나 평범한가’를 묻기 위해서였다.
“암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암 치료 후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재발하는 사람을 많이 봐왔거든요. 제가 걸린 암이 아직 충분히 연구되지 않은 종류이기도 하고요. 만약 재발한다면 어떤 치료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사들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아요.”
그는 “여전히 내 상태에 대해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삶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제는 암에 대한 걱정보다 현실에 대한 생각, 아이를 잘 키우고 일과 가정을 조화롭게 꾸리는 것 같은, 그 또래 여성이 으레 하는 고민을 더 자주 한다. 잡곡밥을 챙겨 먹고,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꼭 운동하려고 노력하지만 이 역시 유난할 게 없다. 박씨는 이 평화를 찾은 배경으로 ‘정해진 치료를 열심히 받은 것’을 들었다.
투병 중 사랑 확인
그의 암은 발견 당시 이미 상당히 진행한 상태였다. 먼저 항암치료를 받고, 한쪽 가슴 전절제수술을 받은 뒤 다시 한 달에 걸쳐 방사선치료를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림프부종 등 부작용이 발생해 재활의학과를 다녔고 신경정신과, 안과, 산부인과 진료도 받았다.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초등학생 시절 ‘선수 해도 되겠다’는 말을 들을 만큼 수영을 잘했고, 중학생 때까지도 학교 계주대회가 있으면 맡아 놓고 선수로 출전했던 그였지만 체력이 곧 바닥났다. 지하철역 계단조차 오르기 힘들 만큼 지쳐버렸을 때, 그는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실은 수십 번 했어요. 치료받는 내내, 혼자 속으로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과 싸워야 했죠. 혹시라도 암이 재발하면 이 모든 과정을 다시 밟아야 할 거라는 게 상상만으로도 끔찍했어요. 모든 치료를 잘 받으면 완치될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데, 그 믿음을 이어 나가는 게 힘들었어요.”
하지만 그는 버텼다. 가장 큰 힘은 주위에서 왔다. 박씨는 레지던트 생활 중 암 진단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실이 자연스럽게 주위에 알려졌다. 함께 병원에 근무하는 친구, 선후배, 교수들까지 모두 그를 지켜봤다. 환자 사이에도 이야기가 퍼졌다. 내과 전공의로 병실 회진을 돌며 암환자를 보던 의사가 자신들과 같은 처지가 돼 항암제를 맞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들의 응원과 격려는 투병생활 내내 박씨에게 큰 힘이 됐다.
그의 초·중·고교 동창이던 남편도 친구를 통해 박씨의 투병 소식을 듣고 손을 내밀었다. 반복되는 입원과 퇴원 때면 소리 없이 찾아와 병실을 지켰고, 박씨의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회복되면 어디든 데리고 가 바람을 쐬주려 했다. 그리고 암 치료가 끝날 무렵, 슬며시 마음을 털어놓았다.
“실은 오랫동안 저를 좋아했다고 하더라고요. 대학 때도 한 번 고백하려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대요. 상상도 못한 얘기였죠. 그런데 좋았어요. 제가 아픈 것, 한쪽 가슴이 없는 것, 치료 경과가 좋지 않을 수 있는 것…. 이 모든 걸 그 친구는 다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오래 고민하지 않았어요. 그런 이유 때문에 마음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몸 때문에 마음까지 아프게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박씨는 “또 연애한다고 다 결혼하게 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래서 쉽게 생각했다”며 밝게 웃었다. 그 용기가 박씨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줬다.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 부모님’으로 알고 지내던 시부모도 한 마디 반대 없이 그를 며느리로 받아들였다. 박씨는 결혼 과정에서 힘든 일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몸에 맞는 웨딩드레스를 찾기 힘들더라”고 할 정도로 씩씩하고 유쾌했다. 그는 “돌아보면 처음 암 선고를 받았을 때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병을 숨기지 않은 게 참 잘한 일이었다. 투병 과정을 공개함으로써 정말 많은 정서적 후원과 지지를 받았다. 그것이 암환자에게는 항암치료 이상의 힘이 된다”고 했다.
또 하나 그를 버티게 한 건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는 암 치료를 마치자마자 병원에 복직했고, 전문의 과정을 밟았다. “쉼 없는 삶으로 돌아갔다 암이 재발하는 건 아닐까 두렵기도 했지만, 환자 시절 경험한 걸 바탕 삼아 더 좋은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했다.
“인턴 시절 제 꿈은 암환자를 보는 종양내과 의사가 되는 거였어요. 암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선생님들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죠. 하지만 레지던트가 돼 막상 암환자들을 만나니 두려운 마음이 들더군요. 감정적으로 의존하는 환자들이 부담스러워 ‘친절한 의사보다 실력 있는 의사가 더 좋은 의사’라고 생각하며 그분들을 냉정하게 대하기도 했습니다.”
진심으로 웃는 의사
그러나 바로 그, ‘감정적으로 의존하는’ 암환자가 된 경험은 그의 생각을 다시 한 번 바꿔놓았다. 환자에게 가장 고마운 사람은 실력 있는 의사가 아니라 진심 어린 미소를 보여주는 의사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박씨는 “암환자는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의사 표정을 가장 먼저 보게 된다. 그걸 통해 이 사람이 오늘 내게 어떤 얘기를 할까, 지금 가져온 것이 좋은 소식일까 나쁜 소식일까를 가늠하게 된다. 의사의 표정 하나에 환자 마음이 요동친다는 걸 알고부터는 늘 ‘웃고 살자’고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다만 자신의 경험 때문에 환자들이 지나친 기대감을 갖게 될까 봐 전공만은 암과 거리가 먼 쪽으로 택했다. 암환자를 끊임없이 마주해야 하는 게 그 자신에게 트라우마가 된 것도 알레르기내과를 선택한 한 이유다. 박씨는 “복직 후 처음엔 유방암을 전공하려 했다. 그런데 함께 주사실에 누워 있던 분들이 내 환자가 되는 상황이 힘들더라. 나와 같은 증상을 가진 분들의 예후가 나빠지는 것도 감정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그 대신 그는 먼저 투병 과정을 거친 사람으로서 자신에게 암에 대해 묻는 이들의 질문에는 어떻게든 답을 주려 노력한다고 했다. 언론 인터뷰에 나선 것도 지금 암으로 고통받는 이에게, 이 힘겨운 치료의 끝이 과연 있을까 걱정하는 이에게 “암에 걸렸던 사람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잘 살아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세 살배기 아들이다. 박씨는 “함께 집에 있을 때 내가 잠시 주방에 가기라도 하면 금방 엄마를 찾으며 보챈다.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내가 건강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웃었다. 자신이 병원에서 일하는 사이 그 아이를 돌보느라 고생하는 친정엄마, 소중한 남편을 위해서도 그는 더 잘 살고 싶다고 했다. 그 마음이 지금 그의 ‘평범한 삶’을 지켜주는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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