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18일 한 종합편성채널(종편)과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해양경찰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다 올해 1월 무죄 판결을 받은 홍가혜(27·사진) 씨. 당시 그는 인터뷰에서 ‘해경(해양경찰)인지 정부 쪽인지 민간 작업을 막고 있다’ ‘시간만 대충 때우고 가라고 했다더라’ ‘유가족 대표에게 구조대원이라는 놈들이 여기는 희망도 기적도 없다고 했다더라’ 등의 발언을 해 기소됐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피고인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글과 방송 인터뷰는 민간잠수부 지원과 구조 작업 투입이 원활하지 못함을 토로하고, 해양경찰과 민간잠수부들의 합동 구조 작업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그 인터뷰로 해양경찰청장이나 세월호 구조 담당자의 명예가 훼손됐다고 할 수 없다”고 판단해 홍씨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두 달 뒤인 3월 중순 ‘주간동아’는 ‘홍씨가 자신을 향한 악의적인 글과 댓글을 작성한 이들을 고소했고, 그 수가 1000여 건에 이르며, 합의금은 1억 원에 이른다’는 제보를 받았다.
팽목항으로 향한 건 트라우마 때문
홍씨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을 하자 그는 “고소 건수와 합의금 규모가 소문과 다르다. 피해자가 1000여 건의 고소를 했다면 그 이상으로 몇만 건의 악의적인 글과 댓글이 있었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느냐”며 반문했다. 주간동아는 피고소인과 고소인 양측 주장을 모두 듣고자 홍씨와 인터뷰 약속을 했으나 그사이 고소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가 터지면서 홍씨는 다시 입을 닫았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홍씨가 자신을 비방하는 댓글을 인터넷에 올린 누리꾼에 대한 고소를 1500건가량 했으며, 합의금을 종용했다는 것. 또 검찰이 홍씨를 향한 일부 언론의 검증되지 않은 보도와 누리꾼의 도를 넘은 비난 글은 처벌할 방침이지만 고소가 남발되고 있다고 판단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 때문에 인터넷상에서 홍씨의 악플러 고소사건은 한동안 크게 논란이 됐다. 설득 끝에 3월 마지막 날 기자는 대구에서 홍씨와 마주 앉았다.
약속시간인 오후 1시까지 연락이 닿지 않던 홍씨는 전화통화에서 “요즘 수면제 없이는 깊은 잠에 들 수 없는 상태라 약을 먹고 잤는데 늦게 일어났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며 전화를 끊은 지 20분 만에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그는 최근 쏟아진 보도에 대해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부분과 악의적인 부분, 공인이 아닌 나의 이름을 허락 없이 쓴 언론에 대해 법적대응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악플러 고소 합의금은 극히 일부만 받았을 뿐 합의금을 받지 않고 고소를 취하해준 경우도 많다는 이야기를 일일이 나서서 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나쁘게 볼 사람은 나쁘게 보려 할 것이다. 법적 절차를 통해 대응하겠다”며 말을 아꼈다.
이어 그는 자신에 대한 보도에 답답한 심정을 드러냈다. 홍씨는 1월 9일 무죄 판결 이후 쏟아진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면죄부는 아니다’라는 언론 보도에 대해 “판결문에는 그런 내용이 단 한 문장도 없다. 결론에는 ‘무죄를 선고한다’는 문장뿐이다. 그런데 판사가 나를 따로 불러 ‘홍가혜 씨, 이 판결이 무죄더라도 또 같은 행동들을 했을 때 그것까지 정당화해주거나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한마디 했다. 지금까지 그 말이 판결문인 양 보도되고 있다”고 했다. 기자가 입수한 판결문에는 실제로 그런 내용이 없었다.
홍씨에 대한 인터넷상 댓글,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은 모두 지난해 4월 18일 홍씨가 종편과 인터뷰를 한 후 생긴 것들이다. 홍씨가 전남 진도군 팽목항으로 향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았을 일이다. 당시 부산에 살던 홍씨는 왜 팽목항까지 갔을까. 그는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답했다.
“열일곱 살 때 할머니, 고모와 함께 살았는데 고모가 집에서 자살 기도를 했다. 내가 울면서 119에 신고했으나 장난전화인 줄 알고 40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그때까지 고모는 분명 살아 있었지만 병원으로 향하는 20분, 그 짧은 시간 안에 돌아가셨다. 또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당시 도쿄에 살고 있었는데, 실종자 1만여 명이 며칠 사이 모두 사망자로 바뀌는 걸 목격했다. 너무 끔찍했고 큰 공포였다. 세월호 사고 소식을 접하자 이 두 가지 기억이 동시에 떠올랐다. SNS에서 민간잠수사를 모집한다는 글을 보고 아마추어 다이버지만 빨리 가서 도울 수 있다면 한 명이라도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팽목항에 갔다.”
공안관련 사범으로 분류, 101일 수감 생활
그러나 팽목항은 홍씨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고 한다. 언론 보도와 달리 구조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잠수인력 500명이 투입됐다는 정부 발표도 사실이 아니었다고. 그때부터 홍씨는 정부 관계자들을 따라다니며 민간잠수사 투입을 요청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실종자 가족들이 홍씨에게 다가와 먼저 손을 잡았다고 한다. 그는 “실종자 가족들이 ‘기자냐’고 묻기에 ‘저는 기자가 아니에요. 민간잠수사를 지원하러 왔어요’라고 했더니 울면서 그저 도와달라는 말만 반복했다”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그 와중에 한 종편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확답하지 않은 채 현장에 있던 다른 민간잠수사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젊은 애가 겁도 없다’며 인터뷰를 만류했다고 한다. 홍씨는 “현장에서 같은 이야기(종편 인터뷰에서 밝혔던 내용)가 반복되고 있었고 정부 관계자에게 사실 확인을 요청했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만 돌아왔다. 실상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주변인들과 함께 들었던 ‘시간만 때우고 가라’ ‘희망도 기적도 없다’는 등의 이야기를 인터뷰에서 전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홍씨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관련 증인인 민간잠수사들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사실관계를 확인해줌으로써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은 1월 홍씨가 있지도 않은 말을 허위로 한 것은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관련자들 이름과 발언은 판결문에도 적혀 있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인터뷰 직후 인터넷상에는 홍씨에 대한 각종 루머가 떠돌았고, 경찰은 곧바로 홍씨의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잠적했다는 당시 언론 보도와 달리 홍씨는 자진 출두했다. 그는 “경찰조사 이후 당연히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주거지가 명확했음에도 경찰에서 ‘여관을 전전하는 여자’로 만들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목포교도소에 석 달 넘게 갇혀 있으면서, 최초 검찰 조사를 받았던 20일 동안은 독방에 있었다. 그때 나는 공안관련 사범으로 분류됐고, 세월호 선원들도 독방에 있었지만 그들보다 못한 처우를 받았다. 내가 과연 그들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홍씨는 난생처음 경험한 교도소 독방 생활이 끔찍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정도로 좁고, 변기와 수도꼭지가 머리맡에 있었으며, 하루 종일 폐쇄회로(CC)TV로 감시를 당했다. 그는 “잠시 벽에 기대 다리를 뻗고 앉아 있으면 교도관이 몽둥이로 문을 치면서 ‘44번 똑바로 앉으세요!’라고 소리쳤다. 기대지 말고 눕지도 말고 정좌로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다른 수감자들과 눈도 마주칠 수 없었고, 운동은 혼자 하루 30분만, TV 시청은 금지였다. 죄가 확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인권 유린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고 울분을 토했다.
홍씨는 독방에서 하혈을 하는 등 몸 상태가 극도로 악화됐다고 한다. 교도소에서는 병원에 가고 싶다는 홍씨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았고, 두 달 뒤 자원봉사 의료팀이 ‘자궁경부 편평상피암’ 양성 판정을 내리자 그때서야 병원에 갈 수 있었다. 이후 세월호 유가족들이 법원에 홍씨에 대한 ‘불처벌 탄원서’를 냈고, 홍씨는 7월 31일 101일간의 수감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홍씨에게 우호적인 것은 그가 유가족들 목소리를 대변했기 때문이다. 당시 홍씨는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현장에서 듣고 공감했으며 인터뷰를 통해 그대로 전했다. 홍씨에 따르면 “유가족 가운데 일부는 나의 경찰 체포 소식을 접한 뒤 정부 관계자에게 ‘그런 말은 나도 했으니 잡아가라’며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다독여줘
홍씨는 석방 이후 지금까지 악화된 건강 탓에 10년째 해오는 고아원 봉사를 제외한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와 다를 바 없는,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하고 있다고. 그러던 그에게 2월 세월호 유가족 측으로부터 먼저 연락이 왔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3보1배에 동참해달라는 요청이었다고. 그는 “처음엔 고민했지만 함께하고 싶어 팽목항으로 갔다. 사람들이 너무 없어 안타까웠다. 지금도 그분들은 서울 광화문을 향해 3보1배를 계속하고 있다. 끝까지 함께하고 싶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진도를 벗어날 때까지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홍씨는 유가족의 고통을 알기에 그 앞에서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유가족들은 그런 홍씨에게 오히려 ‘흔들리지 말라’며 기운을 북돋워줬다고 한다.
홍씨는 세월호 참사 1주기가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인터넷상에서 또다시 자기에 대한 이야기가 떠돌아다니는 것을 우려했다. 그는 “지난 연말부터 악플러들을 고소했는데 다시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지금 반드시 다뤄야 할 중요한 사실들이 나에 대한 기사들 때문에 묻힐까 걱정된다”며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경계했다.
만약 지난해로 돌아간다면 홍씨는 종편 인터뷰에 응할까. 그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바뀐다”며 머뭇거렸다. 그는 “인터뷰한 것이 후회되다가도 한편으론 후회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생긴다. 소중한 것을 너무 많이 잃은 현재를 생각하면 후회되지만 당시 세월호 실종자 구조를 도우려는 마음에서 나선 것이기 때문에 후회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기운다. 그러면서도 ‘내가 과연 내 인생이 송두리째 날아갈 정도로 나쁜 일을 한 것일까’ 생각해보면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며 복잡한 심경을 전했다.
홍씨는 끝으로 자신에 대한 욕설과 성적 모욕, 합성사진 등을 인터넷에 올리며 끊임없이 모욕을 가하는 이들에 대한 생각도 밝혔다.
“악플러 가운데 (직접 만나 보니) 악의적이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다. 용서를 구하며 찾아온 이들을 만나면 ‘네가 그런 일(세월호에 갇혀 구조를 기다리는 일)을 당해도 나는 너를 위해 똑같이 현장에서 구조를 촉구하며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너는 소중한 사람이고, 사랑받는 사람(누군가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악플을 다는 행위로 관심을 받으려 하지 말고, 다른 일을 하면서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악플러들도 사람이고 언젠가 어른이 될 텐데 반성하고 달라질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만약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내 자식이 변화된 악플러들을 보면서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걸로 다 될 것(마음이 풀릴 것) 같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일에 시간을 쏟는 대신 그들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살았으면 좋겠다.”
홍씨의 악플러 고소사건 담당 변호사는 “고소사건에 대한 내용은 조심스러운 부분이기 때문에 어떤 입장도 밝힐 수 없다. 또한 홍가혜 씨가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했기 때문에 의뢰인의 부탁에 따라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양해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피고인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글과 방송 인터뷰는 민간잠수부 지원과 구조 작업 투입이 원활하지 못함을 토로하고, 해양경찰과 민간잠수부들의 합동 구조 작업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그 인터뷰로 해양경찰청장이나 세월호 구조 담당자의 명예가 훼손됐다고 할 수 없다”고 판단해 홍씨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두 달 뒤인 3월 중순 ‘주간동아’는 ‘홍씨가 자신을 향한 악의적인 글과 댓글을 작성한 이들을 고소했고, 그 수가 1000여 건에 이르며, 합의금은 1억 원에 이른다’는 제보를 받았다.
팽목항으로 향한 건 트라우마 때문
홍씨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을 하자 그는 “고소 건수와 합의금 규모가 소문과 다르다. 피해자가 1000여 건의 고소를 했다면 그 이상으로 몇만 건의 악의적인 글과 댓글이 있었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느냐”며 반문했다. 주간동아는 피고소인과 고소인 양측 주장을 모두 듣고자 홍씨와 인터뷰 약속을 했으나 그사이 고소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가 터지면서 홍씨는 다시 입을 닫았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홍씨가 자신을 비방하는 댓글을 인터넷에 올린 누리꾼에 대한 고소를 1500건가량 했으며, 합의금을 종용했다는 것. 또 검찰이 홍씨를 향한 일부 언론의 검증되지 않은 보도와 누리꾼의 도를 넘은 비난 글은 처벌할 방침이지만 고소가 남발되고 있다고 판단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 때문에 인터넷상에서 홍씨의 악플러 고소사건은 한동안 크게 논란이 됐다. 설득 끝에 3월 마지막 날 기자는 대구에서 홍씨와 마주 앉았다.
약속시간인 오후 1시까지 연락이 닿지 않던 홍씨는 전화통화에서 “요즘 수면제 없이는 깊은 잠에 들 수 없는 상태라 약을 먹고 잤는데 늦게 일어났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며 전화를 끊은 지 20분 만에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그는 최근 쏟아진 보도에 대해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부분과 악의적인 부분, 공인이 아닌 나의 이름을 허락 없이 쓴 언론에 대해 법적대응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악플러 고소 합의금은 극히 일부만 받았을 뿐 합의금을 받지 않고 고소를 취하해준 경우도 많다는 이야기를 일일이 나서서 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나쁘게 볼 사람은 나쁘게 보려 할 것이다. 법적 절차를 통해 대응하겠다”며 말을 아꼈다.
이어 그는 자신에 대한 보도에 답답한 심정을 드러냈다. 홍씨는 1월 9일 무죄 판결 이후 쏟아진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면죄부는 아니다’라는 언론 보도에 대해 “판결문에는 그런 내용이 단 한 문장도 없다. 결론에는 ‘무죄를 선고한다’는 문장뿐이다. 그런데 판사가 나를 따로 불러 ‘홍가혜 씨, 이 판결이 무죄더라도 또 같은 행동들을 했을 때 그것까지 정당화해주거나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한마디 했다. 지금까지 그 말이 판결문인 양 보도되고 있다”고 했다. 기자가 입수한 판결문에는 실제로 그런 내용이 없었다.
홍씨에 대한 인터넷상 댓글,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은 모두 지난해 4월 18일 홍씨가 종편과 인터뷰를 한 후 생긴 것들이다. 홍씨가 전남 진도군 팽목항으로 향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았을 일이다. 당시 부산에 살던 홍씨는 왜 팽목항까지 갔을까. 그는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답했다.
“열일곱 살 때 할머니, 고모와 함께 살았는데 고모가 집에서 자살 기도를 했다. 내가 울면서 119에 신고했으나 장난전화인 줄 알고 40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그때까지 고모는 분명 살아 있었지만 병원으로 향하는 20분, 그 짧은 시간 안에 돌아가셨다. 또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당시 도쿄에 살고 있었는데, 실종자 1만여 명이 며칠 사이 모두 사망자로 바뀌는 걸 목격했다. 너무 끔찍했고 큰 공포였다. 세월호 사고 소식을 접하자 이 두 가지 기억이 동시에 떠올랐다. SNS에서 민간잠수사를 모집한다는 글을 보고 아마추어 다이버지만 빨리 가서 도울 수 있다면 한 명이라도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팽목항에 갔다.”
공안관련 사범으로 분류, 101일 수감 생활
그러나 팽목항은 홍씨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고 한다. 언론 보도와 달리 구조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잠수인력 500명이 투입됐다는 정부 발표도 사실이 아니었다고. 그때부터 홍씨는 정부 관계자들을 따라다니며 민간잠수사 투입을 요청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실종자 가족들이 홍씨에게 다가와 먼저 손을 잡았다고 한다. 그는 “실종자 가족들이 ‘기자냐’고 묻기에 ‘저는 기자가 아니에요. 민간잠수사를 지원하러 왔어요’라고 했더니 울면서 그저 도와달라는 말만 반복했다”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그 와중에 한 종편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확답하지 않은 채 현장에 있던 다른 민간잠수사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젊은 애가 겁도 없다’며 인터뷰를 만류했다고 한다. 홍씨는 “현장에서 같은 이야기(종편 인터뷰에서 밝혔던 내용)가 반복되고 있었고 정부 관계자에게 사실 확인을 요청했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만 돌아왔다. 실상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주변인들과 함께 들었던 ‘시간만 때우고 가라’ ‘희망도 기적도 없다’는 등의 이야기를 인터뷰에서 전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홍씨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관련 증인인 민간잠수사들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사실관계를 확인해줌으로써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은 1월 홍씨가 있지도 않은 말을 허위로 한 것은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관련자들 이름과 발언은 판결문에도 적혀 있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인터뷰 직후 인터넷상에는 홍씨에 대한 각종 루머가 떠돌았고, 경찰은 곧바로 홍씨의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잠적했다는 당시 언론 보도와 달리 홍씨는 자진 출두했다. 그는 “경찰조사 이후 당연히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주거지가 명확했음에도 경찰에서 ‘여관을 전전하는 여자’로 만들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목포교도소에 석 달 넘게 갇혀 있으면서, 최초 검찰 조사를 받았던 20일 동안은 독방에 있었다. 그때 나는 공안관련 사범으로 분류됐고, 세월호 선원들도 독방에 있었지만 그들보다 못한 처우를 받았다. 내가 과연 그들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홍씨는 난생처음 경험한 교도소 독방 생활이 끔찍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정도로 좁고, 변기와 수도꼭지가 머리맡에 있었으며, 하루 종일 폐쇄회로(CC)TV로 감시를 당했다. 그는 “잠시 벽에 기대 다리를 뻗고 앉아 있으면 교도관이 몽둥이로 문을 치면서 ‘44번 똑바로 앉으세요!’라고 소리쳤다. 기대지 말고 눕지도 말고 정좌로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다른 수감자들과 눈도 마주칠 수 없었고, 운동은 혼자 하루 30분만, TV 시청은 금지였다. 죄가 확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인권 유린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고 울분을 토했다.
홍씨는 독방에서 하혈을 하는 등 몸 상태가 극도로 악화됐다고 한다. 교도소에서는 병원에 가고 싶다는 홍씨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았고, 두 달 뒤 자원봉사 의료팀이 ‘자궁경부 편평상피암’ 양성 판정을 내리자 그때서야 병원에 갈 수 있었다. 이후 세월호 유가족들이 법원에 홍씨에 대한 ‘불처벌 탄원서’를 냈고, 홍씨는 7월 31일 101일간의 수감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홍씨에게 우호적인 것은 그가 유가족들 목소리를 대변했기 때문이다. 당시 홍씨는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현장에서 듣고 공감했으며 인터뷰를 통해 그대로 전했다. 홍씨에 따르면 “유가족 가운데 일부는 나의 경찰 체포 소식을 접한 뒤 정부 관계자에게 ‘그런 말은 나도 했으니 잡아가라’며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다독여줘
2014년 4월 18일 오전 6시 쯤 한 종편과 인터뷰를 했던 홍가혜 씨.
홍씨는 세월호 참사 1주기가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인터넷상에서 또다시 자기에 대한 이야기가 떠돌아다니는 것을 우려했다. 그는 “지난 연말부터 악플러들을 고소했는데 다시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지금 반드시 다뤄야 할 중요한 사실들이 나에 대한 기사들 때문에 묻힐까 걱정된다”며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경계했다.
만약 지난해로 돌아간다면 홍씨는 종편 인터뷰에 응할까. 그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바뀐다”며 머뭇거렸다. 그는 “인터뷰한 것이 후회되다가도 한편으론 후회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생긴다. 소중한 것을 너무 많이 잃은 현재를 생각하면 후회되지만 당시 세월호 실종자 구조를 도우려는 마음에서 나선 것이기 때문에 후회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기운다. 그러면서도 ‘내가 과연 내 인생이 송두리째 날아갈 정도로 나쁜 일을 한 것일까’ 생각해보면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며 복잡한 심경을 전했다.
홍씨는 끝으로 자신에 대한 욕설과 성적 모욕, 합성사진 등을 인터넷에 올리며 끊임없이 모욕을 가하는 이들에 대한 생각도 밝혔다.
“악플러 가운데 (직접 만나 보니) 악의적이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다. 용서를 구하며 찾아온 이들을 만나면 ‘네가 그런 일(세월호에 갇혀 구조를 기다리는 일)을 당해도 나는 너를 위해 똑같이 현장에서 구조를 촉구하며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너는 소중한 사람이고, 사랑받는 사람(누군가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악플을 다는 행위로 관심을 받으려 하지 말고, 다른 일을 하면서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악플러들도 사람이고 언젠가 어른이 될 텐데 반성하고 달라질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만약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내 자식이 변화된 악플러들을 보면서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걸로 다 될 것(마음이 풀릴 것) 같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일에 시간을 쏟는 대신 그들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살았으면 좋겠다.”
홍씨의 악플러 고소사건 담당 변호사는 “고소사건에 대한 내용은 조심스러운 부분이기 때문에 어떤 입장도 밝힐 수 없다. 또한 홍가혜 씨가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했기 때문에 의뢰인의 부탁에 따라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양해 부탁드린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