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신라가 운영하는 서울 중구 동호로 서울신라호텔 전경.
여행이나 출장이 하루 이상으로 길어질 경우 대부분 전체 숙박비를 하루치씩 균등하게 나눠 쓴다. 그게 합리적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다른 선택을 하는 이들도 있다. 정말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비싸고 좋은 호텔에서 하루를 머물고, 나머지 일정은 남은 돈으로 값싼 숙소를 이용하는 거다. 분명 앞의 부류와 총 숙박비는 같지만 아주 좋은 호텔에서 하룻밤을 누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남은 기간은 조금 불편하거나 나쁜 숙소에서의 생활을 감수해야 한다.
다행히 요즘엔 전 세계 숙박공유 서비스 ‘에어비앤비’를 통해 상대적으로 저렴하면서도 괜찮은 숙소를 찾을 수 있고, 게스트하우스나 각종 민박도 많아져 싸다고 무조건 나쁜 숙소는 아니다. 해외 출장을 자주 가는 지인 중에는 이런 방법으로 주요 도시의 최고급 호텔에서 한 번씩 머물러봤다는 이도 있다. 스스로 선택한, 출장에서의 작은 사치란다.
이 방법은 출장이 아닌 여행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여행의 작은 사치이자 일상의 작은 사치인 셈이다. 계속 그저 그런 숙소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선택과 집중으로 딱 하루는 영원히 기억에 남을 만한 곳에서 머무를 것인지는 당신의 선택이다. 전체 일정의 예산은 동일하니 개인별 선호에 따라 선택은 달라질 수 있다. 같은 돈을 쓰더라도 어떤 방식으로 쓰느냐에 따라 소비자의 성향이 구분되는 시대다. 어차피 한정된 금액이라면 평범하고 무난하게 쓰는 대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치하는 것도 합리적인 소비다.
공항, 딱히 여행 가지 않아도
연초에 새해 계획을 세우고, 생각도 정리할 겸 호텔을 찾았다. 책과 잡지를 잔뜩 챙기고, 노트북컴퓨터도 가져갔다. 물론 그녀와 함께다. 우리끼리는 부부 워크숍이라 이름 붙여 각자 생각을 정리하고 한 해 계획도 공유하려는 목적이었지만 쉬면서 빈둥거리려는 속셈도 컸다. 해외여행을 갈 시간까지는 없어 일부러 인천국제공항 근처에 있는 호텔을 잡았다. 공항 근처 호텔이 주는 미덕은 창밖으로 비행기가 꽤 가깝게 날아가는 게 자주 보이고, 호텔방 안 TV에서는 공항 전광판처럼 파란색 바탕화면 위에 흰 글씨로 비행기 출발, 도착 시간이 실시간으로 계속 나온다는 거다. 저 비행기가 나를 기다려주는 듯한 착각에도 빠지고, 몸은 비록 여기 있지만 맘은 비행기에 실어 날려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이것이 공항 근처 호텔이 주는 흥미로운 공간적, 감성적 착시 효과다.
작가이자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종종 공항 근처 호텔에 머물며 TV에 나오는 비행기 출발, 도착 시간이나 창밖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면서 여행을 가는 듯한 일상의 착시를 누린다고 했다. 이 대목에 공감했던 터라 비행기 탈 일이 없어도 일부러 공항에 간다. 서울에선 대략 한 시간이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다. 집 앞에 공항버스정류장이 있어 아무 생각 없이 버스에 올라타 넋 놓고 공항까지 간 적도 있다. 공항에 도착하면 잠시 내려 공항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사들고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식이다. 왕복 2~3시간이면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듯한 착시를 느낄 수 있다. 생각이 복잡하거나 머리가 안 돌아갈 때 이 방법을 쓴 적이 있는데, 꽤나 효과적이었다.
내게 공항은 일상의 쉼표와도 같다. 공항에 가는 것은 집을 떠나는 것이고, 익숙한 일상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의 새로운 일상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하여간 공항 근처 호텔은 가끔씩 일상의 흥미로운 여행지가 될 수 있다.
일하러 호텔에 가는 이도 꽤 많다. 호텔방에서 두문불출하며 글을 쓰는 작가도 있고, 프로젝트를 위해 호텔방에 모여 다 같이 노트북컴퓨터를 펼쳐놓고 밤샘 작업하는 직장인도 있다. 드라마 ‘미생’에도 등장하는 이런 장면은 모든 직장인에게 해당하는 건 아니지만, 특정 업종에선 아주 자주 있는 일이다. 특히 마감이 급한 작업일수록 이런 합숙이 자주 벌어진다.
나도 호텔에서 일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호텔이 좋은 건 내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집이 주는 익숙함, 편리함이 일할 때 방해가 되는 경우가 있다. 적당한 긴장감, 낯섦이 있는 호텔이 오히려 몰입하는 데 좋은 듯하다. 특히 돈을 내고 들어갔으니 적어도 호텔비만큼은 효과를 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몰입도를 높여주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호텔은 잠자는 공간이 아닌 일하는 공간으로도 꽤나 유용하다. 물론 너무 자주 가면 이런 효과도 반감한다.
‘제주에서 한 달 살기’가 유행이 됐는데, 사실 내가 외지에서 한 달 살기를 계획했던 건 결혼하고 얼마 안 된 15년 전쯤 일이었다. 아내와 1년에 한 달씩 다른 도시에서 살자고 계획을 세웠다. 처음엔 런던, 뉴욕, 파리 같은 도시를 떠올렸다. 특정 도시에서 그냥 현지인처럼 밥 먹고 산책하고 책 읽고 전시 보고 공연 보고 맛난 거 사 먹으면서 지내다 오자는 거였다. 서울에서 하는 걸 공간만 바꿔 다른 도시에서 하고 오자는 생각이었고, 서울에서 쓰는 생활비면 전 세계 어디서든 비슷하게 누릴 수 있을 거란 계산에서였다. 물론 항공과 숙박비는 별도로 하고.
여행을 갔다면 한 호텔에 계속 머물기보다 숙박비 중 일부를 투자해 하루는 좋은 호텔에 묵는 건 어떨까. 웨스틴 조선호텔 부산 프레지던트룸(왼쪽)과 파크하얏트서울 스위트룸.
현실에서 한 달 살기 계획이 어그러진 건 돈보다 시간 때문이었다. 매년 한 달씩 장기휴가를 내는 게 불가능한 아내의 현실 때문에 이 계획은 대폭 축소돼 2주씩으로 바뀌었다. 한 달은 어렵지만 매년 다른 도시에서 잠시나마 일상을 보내는 걸로 절충하고 타협했다. 이렇게 우리 부부는 1년에 2주씩 호텔에서 생활한다. 여기에 각자의 출장까지 감안하면 대략 한 달씩은 호텔에서 지내는 셈이다. 이렇게 며칠만 ‘호텔살이’를 하면 호텔이 집처럼 느껴진다. 밖에서 놀다 어두워지면 집에 가자고 하면서 호텔로 들어간다. 빠른 적응력이 아닐 수 없다.
호텔살이도 좋지만, 때론 주방을 쓸 수 있는 레지던스가 좋고, 젊을 때는 게스트하우스살이도 해볼 만하다. 가끔 집이 아닌 곳에서 지낸다는 건 일상에 좋은 활력이 된다. 그러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집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늘 익숙하고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는 집. 특별히 집을 변화시키지 않아도, 그냥 잠시 떠났다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집이 가진 매력을 한층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여행이 즐겁고 호텔이 매력적인 건 돌아갈 집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요즘 집을 호텔 스위트룸처럼 꾸미는 이들이 있는데,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다. 집을 호텔 스위트룸처럼 꾸며놓고 호텔 침구와 가구를 들여놓으면 내 집 같은 맛이 덜 난다. 집은 ‘집 같은’ 구석이 있어야 한다. 방 하나를 호텔처럼 꾸미는 건 가능하지만, 집 전체적으로 호텔 느낌이 나는 건 싫다. 그럼 호텔에 가서도 호텔이 주는 새로운 느낌을 받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텔은 집이 주지 못하는 일상의 느낌표 같아야 좋다. 문장에서도 가끔 찍어줘야 매력적인 게 느낌표 아니던가. 집은 쉼표이자 마침표처럼 자주 찍어 있는 듯 없는 듯한 매력이 있다. 그래서 가끔 호텔에서의 하룻밤을 자신에게, 혹은 가족에게 선물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환경이 사람을 바꾸듯, 공간만 살짝 바꿔도 우리는 좀 더 로맨틱해질 수 있고, 집에서 못 하던 얘기도 나눌 수 있다. 늘 같은 말, 같은 상황만 반복하는 건 일상을 너무 지겹게 만드는 일일 수 있으니까. 일상을 즐겁게 만드는 건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다. 특히 가족이 있는 사람에겐 더더욱 필요하다.
호텔은 분명 남의 집이다. 그래서 편하기도 하다. 평소에 집안일을 많이 하는 내 처지에서 호텔살이가 가장 좋은 건 청소, 침구 정리 등을 하지 않아도 그다음 날이면 늘 깨끗하게 정돈된 공간이 제공된다는 점이다. 아침식사도 마찬가지다. 그냥 부스스 눈뜨고 내려가 호텔 뷔페에서 느긋하게 식사하면 된다. 멀리 여행 갈 필요도 없다. 서울에서도 얼마든지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누리는 느긋한 하루, 일상의 작은 사치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