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명동 KB금융지주 본사.
심지어 금융지주 체제를 해체해야 한다는 강경론도 나온다. 금융 겸업화에 따른 시너지 효과도 내지 못하면서 집안싸움만 하는 금융지주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나은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그렇지 않아도 배경은 각각 다르지만 KDB산업은행, 우리은행, 씨티은행이 이미 지주회사 체제를 허물기 시작했고, 스탠다드차타드(SC)은행 역시 지주사 해체로 가고 있다.
금융지주 체제 자체는 필요
그러나 전문가들은 금융지주 체제 자체는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금융지주사 도입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게 문제였다는 얘기다. 2001년 국내 최초 금융지주사인 우리금융지주 설립 과정에 깊숙이 관여한 한 금융 전문가의 말이다.
“다양한 고객 수요에 부응하려면 금융 겸업화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거의 없다. 그리고 금융 겸업화 방법에는 미국식 금융지주 체제, 유럽식 유니버설뱅킹(증권·보험 등을 겸하는 은행), 그리고 과거 우리나라나 일본처럼 은행이 비(非)은행 금융기관을 자회사로 두는 형태 등 3가지가 있다. 우리는 외환위기에서 교훈을 얻어 금융지주 체제를 도입했다.”
잘 알려진 대로 1997년 말 위환위기는 국내 은행 부실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해 7월 태국 부동산 거품 붕괴 이후 국내 은행에 돈을 빌려준 외국계 은행이 떼일 위험이 크다고 판단해 기존 대출금을 회수하거나 신규 대출을 꺼리면서 외환 부족 사태가 발생한 것. 당시 국내 은행은 한보그룹 등 재벌의 잇따른 도산으로 부실 채권이 급증하고 있었다.
당시 국내 은행 부실은 리스사 등 자회사 부실에서 시작됐다. 은행이 리스사에 출자하고 자금까지 빌려주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일부 은행의 경우 리스사 부실을 처리하자 은행 자본금이 모두 잠식될 정도였다. 앞의 전문가의 말이다.
제도보다는 운영과 사람 문제
임영록 전 KB금융지주 회장(왼쪽)과 이건호 전 KB국민은행장.
문제는 일부 금융지주사가 여전히 은행 부행장을 다른 계열사 사장으로 보내는 등 금융지주사 도입 이전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 금융지주 내에서 은행의 위상이 워낙 크기 때문이라고는 해도 금융지주사 도입 취지를 외면하는 일이다. 지난해 금융지주사의 은행 비중은 84%(자산 기준)인 데 비해 비은행 부문의 비중은 한 자릿수에 불과했다. 한 금융그룹 계열 생명보험사 부사장의 말이다.
“은행과 보험이 힘을 합쳐 시너지 효과를 내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보험사를 은행 부행장 출신이 경영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 보험 전문가는 분명 따로 있다. 대개 부행장 출신은 보험사 경영을 맡자마자 저축성 보험상품을 무리하게 팔아 단기 실적을 내려고 한다. 장기적으로 역마진 문제가 뻔히 보이는데도 자기 임기 동안에는 실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험사가 장기 전략을 바탕으로 경영을 할 수 있겠는가. 보험사뿐 아니라 금융지주사까지 망치는 일이다.”
결국 금융지주 체제는 제도보다는 운영과 사람 문제라는 얘기다. 능력 있는 CEO를 선임해 금융지주사를 제대로 경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낙하산만 없어지면 금융지주 지배구조 문제의 90%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KB금융지주의 한 임원)는 얘기는 가볍게 들을 수 없다. 문제는 금융을 전리품으로 생각하는 권력이 ‘떡’을 여러 사람에게 나눠주면서 회장과 행장 간 갈등의 빌미를 만든다는 점이다.
금융권에서는 임영록 전 KB금융지주 회장과 이건호 전 KB국민은행장 간 갈등을 서로 다른 줄을 타고 내려온 낙하산들의 공중전으로 이해한다. 잘 알려진 대로 임 전 회장은 KB금융지주 사장을 지내다 이사회의 절대적인 신뢰 속에 회장이 됐지만 재정경제부 2차관을 지낸 경제관료 출신이다. 반면 이 전 행장은 박근혜 정부 들어 금융권 인재풀로 떠오른 한국금융연구원 출신이다.
형식적으로만 본다면 KB금융지주가 KB국민은행 주식을 100%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은행장이 금융지주 회장에게 대드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더구나 갈등의 발단이 된 주전산 시스템 교체 문제는 이 전 행장 본인이 위원장인 경영협의회에서 의결했고 이사회에서도 승인한 사항이다. 물론 이 전 행장 본인은 범죄적 행위를 방관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금융권 관계자는 “신한금융지주나 하나금융지주에서 KB금융 사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최소한 낙하산이 없었던 데다 회장 권한이 막강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금융지주의 경우 출범 이후 회장과 행장 간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가 낙하산 때문이었다. 초대 윤병철 회장과 이덕훈 행장의 불협화음에 이어 박병원 회장과 박해춘 행장, 이팔성 회장과 이순우 행장도 끊임없이 부딪쳤다. 황영기 행장이 회장을 겸임한 때만 예외였다.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위)과 신제윤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KB금융 사태를 4개월 가까이 해결하지 못해 혼란을 키웠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금융지주사 회장을 은행장이 겸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당연한 얘기지만 회장직을 겸임한 황영기 전 우리은행장이나 이순우 현 우리은행장 시절엔 원천적으로 갈등이 없었다. 그러나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는 법이다. 황영기 전 행장의 독단적 경영으로 2조 원에 가까운 파생상품 투자 손실을 입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겸임이 최선의 대안은 아니다. 한 금융 전문가의 얘기다.
“국내 금융지주사들은 은행이 중심이 돼 금융지주로 출범했기 때문에 은행에 편중된 자산을 일부 분배해야 한다. 따라서 금융지주사 출범 초기에는 은행장이 회장직을 겸하면서 카드 부문 등 은행 자산을 떼어내 다른 계열사로 분사시켜야 저항이 없다. 이 작업을 완료한 다음에 회장직과 행장직을 분리해야 한다. 그러나 KB금융지주와 우리금융지주는 회장과 행장을 겸임해야 할 때 분리했고, 분리해야 할 때 겸임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금융지주 지배구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문제가 회장이나 행장의 ‘황제 경영’이다. 회장이나 행장의 권한을 사외이사가 중심이 된 이사회가 견제하는 현재 구조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사외이사 가운데 실무 경험이 없는 교수가 많다는 걸 약점으로 지적하는 전문가가 많다. 금융지주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사내 임원을 등기이사로 선임하면 회장이나 행장에 대한 견제가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황제 경영’리스크 견제 필요
국내 금융지주사에는 사내 등기이사가 회장 1명인 경우가 많다. 대표이사 사장 출신인 임영록 전 회장도 회장이 된 후 사장직을 없앴다. KB금융지주 내부에서는 “비용 절감을 명분으로 사내 등기이사 1명을 없앴지만 어윤대 전 회장의 임기 후반 대표이사 사장으로서 어 전 회장과 각을 세웠던 임 전 회장이 자신과 같은 사장을 두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은행도 비슷한 상황이다. 국내 시중은행은 은행장과 부행장 1명이 등기이사인 경우가 많다. 은행장의 힘이 너무 세다 보니 다른 집행 부행장은 임기 1년짜리 임시직원에 불과하다는 자조의 목소리가 나온다. 과거 한 시중은행에서는 행장이 바뀌자 행장을 따라 종교를 바꾼 부행장이 나타날 정도였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금융 전문가의 말은 귀 기울일 만하다.
“이번 KB금융 사태에서 CEO 리스크가 얼마나 큰지 드러난 만큼 금융지주 회장이 은행장을 통제할 수 있게 하되 회장의 권한에 대해서는 사내 등기이사가 더 많이 포함된 이사회가 견제하게 해야 한다. 아울러 은행 역시 사내 등기임원을 지금보다 늘리되 행장이 단기 실적을 위한 자산 늘리기에 나설 유인이 큰 만큼 이를 견제할 리스크 담당 부행장만큼은 반드시 등기이사로 선임하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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