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와 마네 부인의 초상’, 에드가르 드가, 캔버스에 유채, 일본 기타큐슈 시립미술관 소장.
그러나 드가가 숱하게 그린 무희는 우리가 ‘발레리나’ 하면 떠올리는 하늘하늘하고 아름다운 이미지가 결코 아니다. 그의 캔버스에 등장하는 무희는 대부분 허리를 구부리거나, 몸을 긁고 있거나, 뒷모습이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무대 가장자리에 서서 서투르게 춤추고 있다. 드가가 활동하던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에서 발레리나는 그리 대접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주역이 아닌 군무 무용수 처지는 공장 직공이나 카페 여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 하류계층 여성이 일에 시달리는 고단한 모습을 실제와 가장 가까이, 날카로운 묘사력으로 그려낸 것이 드가의 발레리나 작품들이다.
이처럼 지나칠 정도로 날카롭고 예리한 작품 성향 때문에 드가는 종종 동료 화가들과 갈등을 빚었다. 미국 출신 여류화가 메리 커셋은 드가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 카드를 든 채 의자에 쭈그리고 앉은 모습의 초상화에 대해 “나를 그렇게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그려놓은 사실을 견딜 수 없다. 내 가족이 그 초상을 보지 않길 바란다”고 토로했다.
드가와 일생 동안 교우관계를 유지했던 에두아르 마네도 그림 때문에 드가와 불편한 관계가 된 적이 있다. 1869년 드가는 마네가 그의 아내 쉬잔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는 장면을 그려 마네에게 선물했다. 마네는 그 답례로 과일 정물을 그린 자신의 작품을 드가에게 주었다. 그런데 정작 드가의 그림을 들고 집으로 온 마네는 캔버스의 일부분, 피아노를 치는 아내 쉬잔의 모습을 칼로 잘라내버렸다. 드가 특유의 인간에 대한 찌르는 듯한 냉소가 마네 부인의 초상에 분명히 드러났고, 이 점이 마네를 몹시 불편하게 한 것만은 확실하다.
문제는 마네 화실에 놀러왔던 드가가 반토막 난 자신의 작품을 봤다는 데 있다. 격노한 드가는 당장 그 그림을 들고 화실을 나와버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화실 벽에 걸어둔, 마네가 답례로 주었던 과일 정물화를 떼어내 포장한 뒤 편지와 함께 부쳤다.
“마네 선생, 당신의 ‘자두’를 돌려드리겠소.”
드가는 까다롭고 사귀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는 일생 동안 결혼하지 않았고 인상파 동료 화가 그룹에서도 ‘독선적인 선배’로 통했다. 그러나 마네는 이런 드가의 성격적 결함에도 그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하곤 했다. 그것은 드가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작품을 훼손한 데 대해 몹시 화를 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드가는 마네의 예술성에 탄복하고 그를 존경했다.
‘마네 부인 초상화 사건’의 후일담에 대해 한 저널리스트가 드가에게 물었다. 그 후 마네와 절교했느냐고. 드가는 이렇게 답했다.
“그럴 리가요. 마네 같은 사람과 사이가 나빠질 리 없죠.”
화가로서의 자존심은 서릿발 같은 드가였지만, 그는 다른 예술가의 수준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안목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치관에서 볼 때 마네는 늘 최고 화가였다.